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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용(龍)의 해라며 덕담을 주고받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월 하고도 닷새가 지났다. 덧없는 세월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하늘이 내려준 축복의 시간이니 아껴가며 열심히 살아야지, 우주의 섭리를 어찌 탓하겠는가.

농로 오른쪽은 모내기, 왼쪽은 수확을 앞둔 보리밭. 요즘 농촌이 얼마나 바쁜가를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농로 오른쪽은 모내기, 왼쪽은 수확을 앞둔 보리밭. 요즘 농촌이 얼마나 바쁜가를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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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5일)는 농사일이 절정기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망종(芒種)이었다. 24절기에서 아홉 번째 드는 망종은 보리를 수확하고 볏모를 심는 시기로 '발등에 오줌 싼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농촌은 정신없이 바빴다. 농법과 농기구가 현대식으로 바뀐 지금도 바쁘기는 마찬가지.

아침에 일어나니 산들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십자들녘의 이앙기 소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먼 옛날로 추억여행을 떠나게 한다. 논갈이와 밭갈이를 소와 쟁기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이때쯤 물이 흥건한 들녘에서 농부들의 <농부가> 소리가 들려와서다. 

"여보시오 농부님들 내 말 한마디 들어보소~ 서 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승달이 반달이지, 어~얼럴~러 상사디야, 어~얼럴~러 상사디야. 이 논배미 얼른 심고 저 논배미로 건너가세···."

옛날 농부들이 모심기나 김매기 할 때 부르던 노래로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여기에서 '상사'는 '상서롭다'는 뜻. 모내기할 때 못 줄 잡는 일은 열서너 살의 아이들 몫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시키지 않았다. 모심는 농부들과 손발이 맞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50~60년대 우리 마을 생활 수준을 알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새참 시간을 군산-나포를 오가는 버스를 보고 알았다는 것이다. 모를 심거나 김을 매다가 첫 버스가 지나가면 "오매, 벌써 새참 시간이네!"라는 소리와 동시에 막걸리와 안주가 나왔던 것. 시계가 귀하던 옛날 농촌에서는 해가 하늘의 어디쯤 걸려 있는지를 보고 끼니 때를 알았다.

여린 모들은 춤추고, 보리는 결실을 노래하는 십자들녘

마을 앞 국도에서 바라본 십자들녘.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경이다.
 마을 앞 국도에서 바라본 십자들녘.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경이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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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틀어박혀 옛날생각만 하고 있으려니까 나 자신이 늙고 구차해지는 것 같았다. 해서 아침밥도 미루고 이앙기 소리가 들리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수로에서 논으로 물을 대느라 요란하게 돌아가는 발동기 소리는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듯하다. 

시야에 들어오는 십자들녘은 '평화'와 '풍요'가 넘실댄다. 수로를 따라 옥수수가 심어져 있고, 열무와 고추 텃밭이 조화를 이룬다. 노란 꽃잎이 앙증맞은 호박꽃도 옆에서 거든다. 금방 심은 가녀린 모들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춤을 추고,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은 결실을 노래하고 있다.

농로를 따라 들어가니 이웃 '등동마을'에 사는 김공태(65)씨 부부가 모를 심느라 분주하다. 새벽에 나왔단다. 구릿빛 얼굴의 김씨는 십년지기처럼 반가워하며 막걸리 한잔하라고 권한다. 술은 못한다니까 토마토도 있고, 우유도 있다며 자꾸 권한다. 어찌나 끈덕지게 권하는지 사양하기가 미안할 정도.

모내기, 하지(夏至) 안에 끝내면 걱정 없어

아주머니가 사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이앙기에 모판을 옮겨 싣고 있다.
 아주머니가 사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이앙기에 모판을 옮겨 싣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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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질펀하게 앉아 새참을 즐기는데 아주머니(57)는 이앙기가 반대편 논두렁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모판을 나르고 채워주느라 정신이 없다. 얼마나 열심인지 사람이 다가가도 허리를 펼 줄 모른다. '망종 때는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옛말이 아주머니를 두고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하시는데 죄송합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모내기가 늦은 것 같은데 어떤가요?"
"윤달이 들어서 그런지, 늦어도 한참 늦었죠. 아직 물도 대지 않은 논도 많잖아유. 작년 모내기는 5월 초에 시작해서 그믐쯤 거의 끝났는디 올해는 며칠 전부터 심기 시작했으니, 보리도 아직 안 익었고···. 그래도 모는 하지(夏至) 안으로만 심으면 걱정 없다고 하네요."  

"오늘 모심기는 언제 끝나나요?"
"여기는 두 필지(2천4백 평)밖에 안 되니까 서너 시간이면 다 심을 거예요. 빨리 끝내고 길 건너 논으로 가야죠. 그쪽 '네 마지기'(800평)도 오늘 심어야 허니께유. 모내기도 중요하지만, 가을에 얼마나 거둬들이느냐가 더 큰 문제죠. 작년에는 나락(60kg)으로 130개 얻어먹었는디, 이것 가지고는 먹고 살기도 어려워요···."

"이앙기를 사서 직접 심으면 이득 아닌가요?"
"농사나 아니나 손바닥만큼 지으면서 무슨 이앙기래요. 한 대에 3~4천만 원씩 나가니께 빌려서 심는 게 훨씬 이익이죠. 2400평 심는디 30만 원만 주면 되거든요. 대신 모판은 집에서 만들어야죠. 맡기면 모판 하나에 2500원씩 줘야 하니까 노느니 염불하더라고···."

옛날 같으면 열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온종일 할 일을 이앙기 한 대가 한나절에 끝내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아주머니는 요즘은 이앙기가 대신해 주니까 모심는 일도 힘들지 않는다며 하루에 10필지(1만 2천 평) 심는 아저씨도 있다고 귀띔했다.

"겉보기에 그렇지 속은 고집쟁이에유!"

새참을 마치고 모판을 나르는 김씨 아저씨. 그래도 힘든 일은 도맡아 한단다.
 새참을 마치고 모판을 나르는 김씨 아저씨. 그래도 힘든 일은 도맡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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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렇게 익어가는 십자들녘 보리밭. 열흘 후쯤 타작을 마치고 모를 심으려면 하루도 쉴 틈이 없다고 한다.
 누렇게 익어가는 십자들녘 보리밭. 열흘 후쯤 타작을 마치고 모를 심으려면 하루도 쉴 틈이 없다고 한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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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참을 끝내고 모판을 나르는 아저씨에게 옆에 있는 보리밭은 언제쯤이나 수확을 하게 되는지, 모는 언제 심는지 물었다.

"보리는 아직 익지도 않았어요. 보시다시피 군데군데 시퍼런 허잖소. 그래도 햇볕이 좋으니까 며칠이면 누렇게 익을 것이고, 곧바로 거둬들일 겁니다. 모를 심어야 하니께. 그리고 이렇게 이모작을 해도 정신없이 바쁘기만 허지, 알짜 소출은 별것 아니에요. 쌀도 맛이 떨어지고, 며칠 사이에 장대비라도 쏟아지면 모두 버리거든요."

예로부터 '망종이 일찍 들면 보리농사가 잘되고 늦게 들면 나쁘다'고 했다. 망종까지 보리를 수확해야 논에 모를 심을 수 있었기 때문. 그런데 올해는 3월에 윤달(공달)이 들어서 수확량이 별로일 것 같다는 게 마을 어른들의 중론이다.

아저씨는 8대 선조부터 등동마을에서 살기 시작했다니 마을의 터줏대감이다. 키도 크고 얼굴도 미인형인 아주머니는 스물일곱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농사만 짓고 살았단다. 그는 "아저씨 인상이 좋고, 젊게 보인다"니까 "겉보기에 그렇지 속은 고집쟁이에유!"라며 환하게 웃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모내기, #망종, #십자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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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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