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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총선 닷새를 앞둔 6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 앞에서 수성구갑에 출마한 민주통합당 김부겸 후보가 <오마이뉴스> 총선버스 411에 올라타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손가락으로 기호2번을 알리고 있다.
 4.11 총선 닷새를 앞둔 6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 앞에서 수성구갑에 출마한 민주통합당 김부겸 후보가 <오마이뉴스> 총선버스 411에 올라타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손가락으로 기호2번을 알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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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마를 선언하는 게 맞겠나? 대구 출마를 선언하는 게 맞겠나?"

총선을 4개월 남긴 2011년 12월 14일, 오후 2시쯤이었다. 이틀 전 정장선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고, 그날은 호남 현역의원인 장세환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했다. 김부겸 의원은 정장선, 장세환 의원의 불출마 선언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김부겸 의원이 생각하는 불출마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피정(避靜)에 가까웠다. 중요한 결정이나 쇄신을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묵상이나 기도로 이루어지는 피정은 영어로도 뒤로 물러난다는 뜻의 'retreat'이다. 4년 동안 물러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공부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전당대회에 출마한 상태였다. 불출마는 정계 은퇴를 의미해야 명쾌한 것인데, 불출마할 것 같으면 당 대표는 왜 되려 하느냐는 모순이 생겼다. 우리가 불출마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뒤로 물러나거나 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더 힘든 길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4선에 대한 자발적 포기(?)뿐만 아니라, 민주통합당의 총선 및 대선 전략으로도 중요한 지역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불출마보다는 대구 출마가 더 옳다고 생각했다.

남은 관건은 가족의 동의 여부였다. 의원은 평소부터 '내게 다 방법이 있다'고 말해오긴 했다. 하지만 편한 길을 버리자는데 가족들이 선뜻 동의할지 걱정이었다. 잠자리에 들어 전전반측하는데 전화가 왔다.

"다 잘 됐다. 가자, 준비해라!"

들어보니 의원이 먼저 좀 세게 나갔다고 한다. '정치 더 이상 못하겠다. 그냥 불출마를 할까? 아니면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대구로 옮길까?' 했더니, 형수(김부겸 의원 부인)가 길게 말도 안 하고 '뉴스에 대구 간다 만다 소리 나올 때, 기어이 가고 말 거라 진작 눈치 챘어요. 그래요 갑시다. 언제는 우리가 뭐 누리고 살았나요?'라며 더 세게 나오더란다. 그때부터 의원보다 형수에게 더 미안했다.

그때가 12월 14일 밤 11시 40분. 열 시간여 만에 여러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을 결정을 했고 바로 다음 날 대구 출마 기자회견을 했다.

'민주당=전라도당' 편견, '민주당=열등당' 낙인

2012년 1월 15일 전당대회가 끝났다. 정말 길고 힘든 싸움이었다. 결심은 자발적으로 했지만 전당대회에서 당선된 이후 대구 출마는 80만 선거인단의 명령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를 시작하자마자 난관이었다.

리모델링 공사가 중단된 상태의 폐허나 다름없는 호텔 건물에 사무실을 꾸미는 일은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었다. 2월 1일 내려가자마자 예비후보 등록을 하고 선거용 명함부터 만들었다. 건물 외벽을 도배하다시피 큰 현수막도 내다 걸었다. 그런데 다녀 보면 사람들이 '왜 전라도 출신이 여기 와서 출마하냐?'라고 한단다. 후보가 대구에서 초·중·고를 나왔다는 내용을 현수막에다 표시하자는 조직 파트의 주문이 있었다. 깨끗이 무시했다.

좀 지나면 저절로 알 일인데 막 건 현수막을 바꾼다는 게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라도 출신이란 말은 잦아들더니, 이젠 '아니 경고에 서울대 나온 사람이 왜 민주당을 했는고?'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주당=전라도당'이라는 편견과 멀쩡한 스펙의 소유자가 왜 2진들이나 모이는 민주당에 가 있냐는 '민주당=열등당'이라는 낙인이었다. 대구에서 민주당을 한다는 게 거의 독립운동 수준임을 그때 알았다.

어느 날 김 후보가 들어와 해 준 말도 비슷했다. 50대 아주머니가 명함을 받아 들고는 '기호 2번 민주통합당'이라는 대목에서 흠칫 놀라더니 주섬주섬 주머니에 감추듯 집어넣고는 주변 눈치를 살피더라는 것이다.

대구가 달리 대구가 아니었다. 1988년부터 24년째 새누리당 이외는 당선된 적이 없는 아성이다. 새누리당의 정당 지지율은 60%대로 늘 확고했다. 거기다 '박근혜'라는 강력한 대선 후보를 갖고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높은 벽이 되었다. 우선 상대 후보의 지지율은 어떤 조사에서도 45%대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엔 박근혜 '대망론'까지 막판에 몰려나왔다.

그것은 총선 당일 출구조사에선 6%p 차가 났는데 실제 득표에서는 12%p가 난 것에서 알 수 있다. 6%차가 더 벌어진 것이다. 대개 출구조사는 오후 6시 정각에 발표하기 위해 오후 5시 전에 마감한다. 그러니 5시 이전엔 6%p 정도 차이가 났지만 마지막 한 시간 사이에 새누리당 지지층이 많이 나오면서 12%p로 벌어졌다는 얘기다. 김부겸을 지지하는 '숨은 표'도 있었겠지만, 이를 악물고 투표장으로 나오는 새누리당 지지층이 버티는 곳 또한 대구였다.

전투가 시작되다

대구 기자들에게 들은 얘기다.

'대구는 새누리당 공천이 끝나는 순간, 선거도 끝난다.'

누가 이길지 뻔한 데다, 선거운동 자체를 별로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거운동은 유일하게 후보가 유권자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온 지 두 달이 채 안 되었으니 아무리 언론 보도가 나갔어도 50%의 인지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니 거리 유세를 적극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장을 찾은 민주통합당 김부겸 후보가 물건을 팔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시장을 찾은 민주통합당 김부겸 후보가 물건을 팔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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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거리유세는 김의원의 강력한 무기였다. 오전 7시 출근인사부터 시작해서 한 번 나갔다 하면 하루종일 길 위에 살았다. 점심도 지나가다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나 어묵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그것도 발견했을 경우에만. 그러니 유세팀도 덩달아 배를 곯았다.

유세는 유세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면 어디서든 다 했다. 보통 7분 정도 연설과 이동을 40~50여 회에 거쳐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유세를 치고 간다'고 표현한다. 이번엔 차가 이동할 때도 연설을 할 수 있었다. 후보가 아예 내리지를 않고 차에 탄 채 이동하면서도 계속 연설하고, 목이 좋은 곳이면 차를 세우고 바로 연설할 수 있어서 좋았다.

선거가 끝난 이틀 뒤 Daum 아고라에 의원의 유세를 지켜본 30대 수성구 주민의 글이 올라왔다. 아무도 없는 시지 광장에서 아파트 벽을 바라보고 혼자 연설하는 모습에서 '아름다운 바보'를 보았다는 그 글은 조회 수 20만을 넘겼다.

우리는 그걸 '벽치기'라고 불렀다. 마치 어릴 적, 동전을 벽에다 대고 때려서 멀리 간 순으로 따 먹는 놀이처럼 연설을 벽에다 대고 때리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 사람들은 있다.

아파트 벽 안에 있을 뿐이다. 거기다 대고 연설을 하면 처음엔, '또 선거가 시작되었구먼…'하다가 두 번째 가면 '누구야?'하고 창문을 배꼼 열어본다. 세 번째 가면 '저 친구 또 왔네.' 하면서 조금 들어본다. 그러다 네 번 가면 귀를 열고 들어준다. 다섯 번 가면 이젠 손을 흔들거나, 박수를 쳐주는 지지자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물론 시끄럽다고 경비실에 신고하거나, 내려와 항의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면 '죄송합니다만 저도 선거운동을 해야겠기에 5분만 짧게 말씀드리고 금방 떠나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D-5일 즈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젊은 직장인들이 유세차로 다가와서 악수를 하고 가더니, 이젠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수행팀의 보고였다. '사인이라니? 아무리 지지자라도 손을 흔들어주거나, V자를 그려주고 가는 정도지, 사인이라니?'

정말이었다. 초등학교 여학생 둘이 명함에다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받아가더니 고2~3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아예 공보물을 들고 와서는 공손히 사인을 부탁하고는 '사진 한 장 같이 찍어주면 안 될까요?'라고 묻는 광경을 직접 보았다. 젊은 직장인이나 주부들도 그랬다. 왜 사인을 받아갔을까?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사인 공세와 함께 선물이 유세차에 실리기 시작했다. 방금 간 딸기주스를 유리잔에 담아 뛰어나온 아주머니, 비타민과 인삼 드링크류를 골고루 사 들고 온 40대 직장인, 막 농장에서 따오는 길이라며 유기농 토마토를 건네주던 50대 후반의 어르신 등. 수행팀을 통해 파악한 상황이 이 정도였는데, 나중엔 카카오톡 진동이 너무 자주 울려 보고를 중단시켰다.

둘째 딸 윤세인, 눈물을 흘리다

배우 윤세인(자료사진)
 배우 윤세인(자료사진)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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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말쯤, 늦은 저녁 예고도 없이 탤런트 윤세인이 아빠(김부겸 의원)와 함께 캠프에 나타났다. 여고생 때 군포 중심상가에서 유세를 시작하기 전 율동팀이 분위기를 띄우고 있으면 지나가다 슬쩍 끼어들어 우월한(?) 키에 생머리를 휘날리며 춤을 춰 동네에서 소문께나 날렸던 둘째 딸 김지수다.

탤런트가 되고 첫 출연한 드라마가 끝나는 3월 초순이 되면 대구에 내려와 선거를 돕겠다고 했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연예인의 선거운동 지원이 없는 일은 아니나, 이제 막 연기생활을 시작한 지수에게 후환(?)은 없을지 걱정스러웠다. 후보도 걱정했다.

미리 지수를 불러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아마 네가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해괴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상대진영의 참모라면, 이렇게 소문을 퍼뜨릴 거다. '아버지와 딸 얼굴을 비교해 봐라. 어디 한 군데라도 닮았는가? 딸이 엄청 뜯어고쳤을 거다. 성형미인 딸을 내세워 표 얻으려는 참 치사한 아버지다' 너 그런 말 듣고도 참을 수 있겠느냐? 겁나면 지금 말해라. 안에서 하는 선거운동시켜줄 테니까…."

지수는 "아이 참, 삼촌 제가 여기서 손 좀 봤으면 요것밖에 못 생겼겠어요? 제가 안 고쳤는데 누가 뭐라던 무슨 상관이에요?"라고 말했다.

이건 아예 제가 자연미인이라고 자랑을 하는 건지, 독하게 마음먹었으니 괜한 걱정 붙들어 매라는 소린지 하여튼 기특했다. 하지만 그렇게 교육까지 받고 시작했지만 지수는 몇 번을 울어야 했다. 두 손 꼭 모아 마이크를 쥔 채, 눈물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아무리 아버지였어도 존경할 수 없는 국회의원이었다면 제가 이렇게 발 벗고 기쁘게 나서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했을 때는 아차 했다. 저렇게 여린 마음 가지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싸늘한 반응이나 어깃장 놓는 상대당 지지자를 만나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텐데 싶었다.

D-3일부터는 숫제 '저희 아빠 김부겸 후보를 도와주세요'라고 쓴 팻말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니 대학생들의 통학버스 정류장에 나가 피케팅을 했다. 하필이면 그때 그동안 한 번도 안 보이던 상대 후보가 나타나 악수를 하면서 돌았다. 두 손으로 팻말을 높이 든 지수가 그걸 보고선 눈물을 똑, 똑, 흘리는 장면을 나중에 영상으로 보았다.

다음 선거에는 아빠를 돕겠다고 설사 애원을 해도 결단코 막아서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그 때 했다.

경쟁론 VS 대망론... 대구에서 희망을 보다

대구 수성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아깝게 낙선한 민주통합당 김부겸 최고위원
 대구 수성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아깝게 낙선한 민주통합당 김부겸 최고위원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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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패'였다.

선거운동 기간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이기는 선거 분위기였다. 져도 5%p 안팎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우리는 40.4%를 얻었고, 상대 후보에게 12%p 정도 뒤졌다. 우리가 분위기에 들떠 있는 동안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 마치 총동원령이 떨어진 예비군처럼 일제히 투표장으로 몰려가 총선 역대 최고 투표율인 58.2%를 기록했다. '필사적 열망'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4년 전 1:1 맞대결에서 진보신당 후보가 20% 정도 얻었던 걸 보면 우리가 추가로 얻은 20%는 이번에 처음 새누리당 외의 정당에게 투표한 유권자일 것이다. 즉 4만6000표 중에 2만3000표는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찍었거나 기권했던, 그러나 이번엔 김부겸을 찍은 '첫 유권자'였다.

이 '필사적 열망'과 '첫 유권자'가 서로 맞섰던 것이 이번 대구 수성갑 선거였다. 즉 여야 간 경쟁을 유발함으로써 대구를 발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듦으로써 발전의 계기를 다시 한 번 잡아볼 것인가 하는 두 테제가 맞붙은 것이다. 거의 모든 새누리당 후보들은 자신을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 측근'이라는 식으로 홍보하고 플래카드에 썼다.

경쟁테제와 대망테제 중에서는 어느 것이 이겼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두 테제가 설파되기 시작한 선거운동 기간 전과 후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김부겸 후보는 40%를 득표했다. 이는 선거운동 개시 전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지지율 25%보다 15%p가 많은 것이다. 반면 상대 후보는 초지일관 평균 45%의 지지율을 보이다가 실제 52%를 얻어 7%p가 늘어났다.

즉 경쟁테제는 김부겸에게 15%p의 새로운 지지를, 그리고 대망테제는 7%p의 추가적 지지를 이한구 후보에게 가져다 주었고 이는 대구 유권자들이 2:1의 비율로 경쟁테제를 더 많이 지지한 결과다. 선거가 끝난 후 '졌지만 이긴 선거'라는 과분한 상찬을 여기저기서 들었다. 하지만 정작 '졌지만 이긴' 것은 김부겸 후보가 아니라 경쟁론을 지지한 유권자들이었다.

남는 문제는 여전히 '대구'이다. 대구 밖에서는 대구를 가리켜 지역주의의 본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구야말로 지역주의의 피해자였다.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이가 후보 등록 3일 전 공천장을 받고 내려오는 곳이다. 당선되면 다시 서울 올라가 지역구에선 '코빼기도 보기 힘들' 이들이다. 그런 이들을 찍어주고, 또 그들에게 다시 푸대접을 받는다. 이것이 대구의 두 얼굴이다.

대구는 분명 두 개의 선택지를 여전히 갖고 있다. '양당 경쟁 체제'를 통해 전환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부활을 꿈꿀 것인가? 지역주의의 피해자로서 대구 유권자들은 양당 경쟁이 훨씬 현실적이고 확실한 방법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지역주의의 장벽은 밖에서 와장창 무너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안에서부터 두 얼굴의 대구가 싸워 힘의 균형이 회복되어가는 방식, 그래서 지역주의의 벽을 허물고 나오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었다.

우리는 대구 내부에 있는 그 힘을 발견했고 거기에서 희망을 보았다. 봄이 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진수씨는 이번 4.11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 선거에 출마헀던 김부겸 민주통합당 의원 보좌관입니다.



태그:#김부겸, #대구, #지역주의, #19대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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