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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동안 노숙인운동을 해온 이동현 홈리스행동 집행위원장은 "홈리스를 비롯한 가난한 이들이 빈곤의 형벌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10년동안 노숙인운동을 해온 이동현 홈리스행동 집행위원장은 "홈리스를 비롯한 가난한 이들이 빈곤의 형벌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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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확대될수록 홈리스문제는 점차 심화될 것이다." 홈리스행동이 노숙인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지난 1월 26일,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홈리스행동 사무실을 찾았다. '빈곤사회연대' '금융피해자연대 해오름'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의 단체와 위, 아래층에 이웃한 사무실 푯말엔 '아랫마을'이라고 쓰여 있다. 잘 사는 윗마을 사람들만 최고로 치는 사회에서 스스로 아랫마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독이면서 삶을 꾸려가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이동현(36) 홈리스행동 집행위원장은 10년째 노숙인운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노숙을 하고 싶어서 노숙을 하는 사람은 없다"면서 "겉으로 볼 수 없는, 산재나 해고를 당하거나 빚보증을 잘못 서서 빚더미에 앉는 등의 노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봐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홈리스의 현실을 전했다. 꼭 홈리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차갑기만 해야 하는지를 묻는 듯했다.

목사 되려다가 '빈민운동'에 눈 떠

홈리스행동 사무실엔 자투리공간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한 평 남짓한 사무공간이 보인다. 바로 옆 컴퓨터실엔 컴퓨터 아홉대가 양쪽 벽에 죽 놓여있다.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엔 칸막이로 나눈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 겸 교실이다. 점심 전이었지만 비좁은 사무실 곳곳을 회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컴퓨터실에 셋, 강당 앞 간이소파에 한 명, 강당에서 나뉜 교실에 한 명 등. 낮에 딱히 갈 곳 없는 홈리스 회원들이다.

강당으로 들어서던 이동현씨가 갑자기 생각난 듯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컴퓨터실에 있던 한 청년에게 "영철(가명)아, 냉장고에 케이크 있다. 꺼내 먹어라. 접시에 예쁘게 담을 수 있지?" 회원을 대하는 그의 모습이 살갑다.

그의 삶에 가난은 늘 익숙했다. 고향은 충남 홍천의 '깡촌'이다. 동네에서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사람은 목사와 우체국장, 단 둘뿐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목사를 동경했다. 대학 선택에 망설임이 없었다. 신학교에 갔다. 기숙사에서 선배들과 방을 함께 썼다. 모두 동아리가 같았다. '도시빈민선교회', 철거지역 공부방에서 아이들도 가르치고 부모들도 조직하는 동아리였다. 가난한 농촌마을의 흙벽집에서 자라온 그에게 철거마을의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도시빈민선교회에 가입했고, 대학시절 내내 철거마을을 오갔다. 자연스럽게 목사의 꿈은 잊혀갔다. "교회가 기업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엔 목사가 되겠다던 꿈을 미련 없이 버렸죠."

그는 사회에 나가서도 빈민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시대의 빈민은 누구인가' 자문했다. 1997년 외환위기(IMF)를 거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숙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회 구조조정의 피해자들이기도 했다.

"저도 IMF의 피해자에요. 대학 때 계속 신문과 유유배달, 식당 서빙 등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군대 전후엔 중국집 배달일을 했죠. 그런데 1996년 입대 전엔 한 달에 110~120만 원을 받았는데 제대한 1898년엔 70만 원 밖에 안 주더라고요. 알바비가 엄청 떨어진 거죠."

노숙인행동이 아니라 '홈리스행동'인 이유

서울역 노숙인 강제퇴거로 서울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계단에서 박스집을 짓던 노숙인이 “매일 박스 안으로 자러 들어가는 것이, 꼭 관에 들어가는 것 같아” 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울역 노숙인 강제퇴거로 서울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계단에서 박스집을 짓던 노숙인이 “매일 박스 안으로 자러 들어가는 것이, 꼭 관에 들어가는 것 같아” 라고 말했다고 한다.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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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대학 졸업 무렵, 홈리스행동의 전신인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이하 노실사)을 찾았다. "노숙 당사자들이 주체로 서는 운동"을 고민하는 단체였다. 이 시대 빈민운동으로 노숙인운동을 택한 그의 고민과도 맞닿았다. 그는 2002년부터 일했다. 노실사는 2002년 월드컵을 맞아 노숙인 대책을 요구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해왔다. 2004년 이후 노숙인 사망자에 대한 추모제를 매년 지냈고, 2007년부터 노숙인 야학인 '주말배움터'도 운영했다. 노실사는 2010년 홈리스행동으로 다시 출범했다. 그때부터 그는 따로 대표가 없는 홈리스행동의 집행위원장을 맡아 활동을 총괄해오고 있다.

왜 노숙인행동이 아니라 홈리스행동일까? 그는 '노숙인'과 '홈리스'는 용어 하나지만 그 의미 차는 크다고 했다. "지난해 6월,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노숙인지원법)'이 만들어졌어요. 그 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노숙인'은 거리, 쉼터나 상담보호센터 등 노숙인 시설에 사는 사람들로 규정했어요. 그 수가 정부 통계로 5000여 명, 극소수죠. 그에 대한 정책도 잔여적(시혜적)이고요. 또한 범주가 좁으면 좁을수록 부정적인 낙인은 커질 수밖에 없어요. 150만 명인 국민기초생활수급자들과 5000명이라는 노숙인이 느끼는 낙인감은 다르거든요."

그는 "홈리스는 주거가 불안정한 주거빈민계층을 포괄한다"고 설명했다. 노숙인 복지가 활성화된 나라들에선 어느 정도 합의된 개념이다. "거리, 쪽방, 고시원, 무허가건물 등을 비롯해 조만간 살던 곳에서 쫓겨날 사람들까지 포함돼요. 정부 추산으로도 20만 명이 넘죠." 홈리스행동은 지난해에 홈리스지원법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명을 외래어로 한다는 한글단체들의 비판에 막혀 홈리스행동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 '홈리스'는 '노숙인 등'이란 표현으로 대체됐다.

"정부가 하는 뉴타운 정책, 동사무소를 주민센터로 바꾼 것 등에 대해선 왜 한글단체들이 문제제기 안 하죠?" 그가 섭섭해했다.

홈리스들도 문화생활이 필요해

홈리스행동이 현재 하는 활동은 주로 네 갈래다. 야학과 홈리스 인권침해 감시, <홈리스뉴스> 매체 발간, 반빈곤 연대활동 등. 이중 야학이 눈에 띈다. '주말배움터'로 이어오다가 2010년 8월부터 '아랫마을 홈리스 야학'으로 문을 열었다. 이씨는 야학 과정이 "짬뽕"이라고 표현했다. "홈리스들의 평균 학력은 약 9년, 중졸 이하죠. 근데 그분들 중에는 고졸, 대졸도 있어요. 반면 아예 학교 그림자도 못 밟아본 분들도 있고요. 과정을 표준화하기가 힘들어서 생활학문, 취미문화, 반빈곤인권으로 영역을 나눠서 야학을 운영해요."

생활학문은 한글, 기초 영어, 컴퓨터 기초 등 보다 상위교육을 받기 위한 토대를 만든다. 취미문화는 요가, 영화토론, 만들기 교실, 텃밭농사 등 다양한 문화활동이 배치돼 있다. 홈리스 권리교실을 만들어 권리교육과 현장실천 등 반빈곤 인권활동도 한다. "짬뽕"이라고 할 만큼 다채롭다.

야학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은 문화도 다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이 돼버렸잖아요. 시골은 일 자체가 사람을 만나는 계기이자 문화예요. 우리 동네는 도라지농사를 많이 지었어요. 다들 도라지 바구니 하나씩 들고 와서 밤새 도라지 까며 수다 떠는 재미가 있었죠. 그런데 도시는 문화도 돈으로 사야죠. 그런데 홈리스는 돈이 없으니 제일 만만한 게 '1200원짜리 두꺼비(소주)' 사먹는 거고. 근데 그게 노숙생활을 더 피폐하고 각종 사건사고에 연루되게 만들죠. 홈리스들도 기본적인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밖에 홈리스행동은 매주 거리, 시설 등을 방문해 인권침해 감시와 복지지원 연계를 하는 홈리스인권지킴이활동도 한다. 사회복지, 의료, 금융피해 등 홈리스운동과 맞닿아 있는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연대활동도 벌인다. 이들 활동은 <홈리스뉴스>에 오롯이 담긴다. 현재 창간준비 20호까지 나왔다. <홈리스뉴스>를 보면 홈리스의 삶을 그대로 알 수 있다.

'지난 금요일 저녁, 서울역 중앙지하도에 갔다. 여느 때처럼 치질로 고생하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서 박스 집을 짓다가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분이 오셨다. 그분은 자기는 일을 열심히 했다고 했다. 배움이 짧아서 할 수 있는 것은 몸 쓰는 것이라 일용직이지만 열심히 나가서 일하면서 쪽방 생활도 했다면서. 그러나 일의 특성상 공치는 날이 많았고, 나이 때문에 점점 거절당하는 일도 많아지더니 돈을 모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뎃잠이 싫어 어쩔 수 없이 상담보호센터의 야간잠자리를 전전하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땐 거리에서 노숙을 했었다고 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얼마 전에는 운전면허도 땄지만 여전히 노숙을 하고 있는 자신이 서글퍼졌다고 했다.' <홈리스뉴스> 창간준비18호, 2011.10.24)

'최대한 빨리'가 홈리스문제의 해법

"최대한 거리에 있지 않도록 해야 해요. 거리생활에 처해있을 때 빨리 발견하는 게 중요하죠. 빠르게 복지자원과 연결시켜서 빨리 거리에서 벗어나게 해야 해요."

홈리스문제의 해결책을 물으니 그가 '빨리'를 강조했다. "미국의 한 정신분석학자가 노숙상황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되나 분석했어요. 심리정신적 손상지수가 비행기 추락사고의 생존자들이 사고 당시 겪었던 스트레스지수와 맞먹어요. 또, 월남 파병병사들이 전장에서 실제 전투를 수행할 때의 스트레스와도 똑같이 나왔어요. 그 스트레스가 엄청난 거죠. 이 생활이 3개월, 6개월 시간이 지날수록 심리적으로 맛이 안 가는 게 이상하죠. 거의 알코올중독 등 정신과적인 질환이 생겨요. 그 전에 거리에서 벗어나게 해야죠."

그는 "정부나 지자체는 이와는 정반대"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나 지자체는 기본적으로 거리 홈리스에게 지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서비스가 늘면 노숙인도 늘어난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노숙인 지원이 지자체로 이양된 사업이어서 지자체들끼리 서로 눈치를 봐요. 서울시 노숙인 복지가 좋아지면 인천에 있는 노숙인이 서울로 온다는 걱정에 노숙인 복지정책을 잘 펼치지 않는 거죠."

그는 정부나 지자체가 노숙인 정책을 "자기들 필요에 의해서 하지. 탈노숙을 위해 정책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임시주거지원을 예로 들었다. 홈리스행동은 줄곧 정부와 지자체에 임시주거지원을 요구해 왔다. 이미 사례가 있었다. 지난 2006년부터 홈리스행동 등이 민간 사회지원기금을 받아서 임시주거지원사업을 해왔다. 홈리스들에게 최장 3개월간 쪽방이나 고시원을 얻어준다. 일자리를 알선하거나 복지수급을 받게 해 3개월 이후에도 계속 당사자가 방값을 낼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6년간 지원을 받은 이들이 다시 노숙으로 오지 않고 방을 계속 유지한 비율이 80.5%에 이른다고.

이런 성과 결과를 보여줘도 별 반응이 없던 서울시가 2010년, 200호의 임시주거를 지원했다. 서울 G20정상회의를 앞둔 때였다. "외국 정상들 오는데 거리에 노숙인이 많으면 안 되니까 그제야 한 거죠."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2011년 지원 규모는 100호로 줄었다. 박원순 시장 당선 후 서울역 노숙인 퇴거조치가 이슈가 되자 100호 더 늘어나긴 했다. 물론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전수조사에 따르면, 서울지역 거리 홈리스는 1350명이다. 그중 1/6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죽음이 너무 가까워

그가 빠른 지원이 왜 중요한지 간절하게 말했다. "아까 케이크 먹으라고 했던 영철이는 서른 살인데 아버지도 노숙인이고 본인도 노숙인이에요. 노숙생활이 장기화되면 벗어나기 정말 어려워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저 친구랑 아버지 같은 경우는 최소한 15년, 20년 가까이 거리에서만 살았을 거에요.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에 정신질환이 있고, 영철이도 지적장애가 있고…."

10년 동안 홈리스운동을 하면서 많은 죽음을 목격했겠다고 하자 그가 '휴~' 한숨을 쉬었다. "저희 야학 학생이었던 선호(가명)가 시야가 계속 좁아지는 터널증후군을 앓았어요. 노숙으로 인한 질병과 눈이 먼다는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지난해 광명에 있는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죠. 또, 우리 사무실에 올 때마다 통닭이나 귤을 사 오셨던 성조(가명)아저씨도 한 달 전쯤에 돌아가셨죠. 채무 때문에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노숙을 하다가 쪽방으로 옮긴 분이었어요. 광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구급대가 와서 술을 마셨다고 안 데려갔어요. 시설 관계자가 그대로 서울역 퇴거 후속조치로 만든 지하응급대기실에 데려다놓은 거죠. 그렇게 새벽에 돌아가셨어요. 지난주 금요일에도 문상을 하고 왔어요. 우리 야학 학생이었고 글쓰기 모임도 같이 했던 병수(가명)아저씨도 택시에 치어 돌아가셨죠. 이런 식이에요. 굉장히 많죠."

죽음을 계속 접하는 심적 고통을 어떻게 견딜까. 그가 "이제 무덤덤해지는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몸은 달리 반응했다. 그의 눈이 잠깐 충혈 된다. 목도 멘다. 그의 자기반성이 이어진다.

"홈리스를 조직한다면서 저희가 잘 못해요. 변명을 하자면 홈리스상태에 계신 분들이 입은 여러 손상들을 극복하고 운동의 주체로 서기까지는 굉장히 많은 지원이 필요해요. 알코올 중독이나 질병은 지원으로 극복할 수 있게 풀어야 하는데 그런 지원체계가 안 갖춰져 있다는 게 문제죠. 그런데 우리는 정부기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임대주택이나 임시주거지 지원, 기초생활보장수급을 기관과 연계해주는 정도죠. 어떤 죽음이든 내가 해야 할 과업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했으면 나았을 텐데...' 하는 심적인 혼선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더욱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횡단보도에서 신호위반한 택시에 치었던 병수아저씨 같은 경우도 20년 동안 알코올 중독이었어요. 근데 술을 끊으면 1년씩도 안 먹어요. 1년에 술 마시는 날이 열흘 정도 밖에 안돼요. 저보다도 훨씬 적은 거죠. 고치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정신병원에도 입원하고 치료재활시설에도 가고.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걸 보면서 알코올 중독이 정말 위험한 병이란 걸 알았죠. 그러니 이런 병에 걸리지 않게 빨리 노숙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서울역에서 쫓겨난 노숙인, "매일 관에 들어가는 것 같아"

서울역 계단에 박스집을 짓던 한 홈리스가 말했다. "매일 박스 안으로 자러 들어가는 것이, 꼭 관에 들어가는 것 같아."(<홈리스뉴스> 창간준비20호, 2011. 12. 26) 죽음이 삶만큼 가까운 그들이다. 매년 서울지역에서만 300명이 넘는 홈리스들이 사망하고 있다.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가운데 혹서, 혹한 등의 날씨 변화에 무방비로 노출된 탓이다. 그런데 한국철도공사 서울역에선 지난해 7월, 오후 11시 이후 서울역사 내 노숙인을 모두 퇴거 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부산역에서도 11월에 같은 조치를 취했다. 곧 전국 주요 철도역사에서도 같은 방침이 내려질 가능성이 커졌다.

"거리 홈리스들에게 공공역사는 생존을 위한 최적의 장소예요. 화장실 쓸 수 있고, 주변에 급식소 있고, 어느 정도 따뜻하고, TV도 볼 수 있고... 서울역 강제퇴거는 단지 거기서 못 잔다는 문제가 아니에요. 노숙인이 시민에게 테러를 자행한다는 등 노숙인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거죠. 퇴거방침을 철회시키지 않으면 결국 강제퇴거의 근거들을 용인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홈리스들의 인권이나 복지 개선에도 크게 발목이 잡혀요."

그는 서울역 강제퇴거 이후 거리 홈리스들에 대한 집단 린치사건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서울시도 발목이 잡혔다. 후속대책으로 노숙인 자율카페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지금껏 시행을 못하고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때려 박아도 이런 노숙인에 대한 낙인이 사라지지 않으면 노숙인 복지 못해요."

공공역사에서 자지 못하면 노숙인 쉼터로 갈 수도 있지 않나. 이 집행위원장은 현실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란다. "쉼터들도 포화예요. 보통 7~8명이 한 방을 쓰지만 50명씩 자는 곳도 있어요. 사생활 보호가 전혀 안 되죠." 그가 "새벽 노가다 나가는 사람과 야간경비일 하는 사람이 같은 방을 쓸 수 있나요?"라고 되물었다.

더 근본적인 제기를 해보자. "일을 하면 되잖아요?" 그가 답했다. "보통 노숙인이 일할 의지가 없다고 보는데 그건 사실과 달라요." 노실사는 2005년, 2006년 홈리스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며칠 간격으로 구직활동을 하고 있냐'는 질문에 '매일'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2005년 88%, 2006년 85% 정도 조사됐다.

구직의지가 구직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직업이력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중국집 주방장, 미싱사, 공사장 일용직, 프레스 등. 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사양길로 접어든 직종들이 많다. "정부가 서비스산업을 육성한다고 하는데 망치 들고 가위 잡던 손으로 컴퓨터 자판 두드릴 수 있겠어요? 노숙하는 형님들 직업 중에 요리사가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많아요. 그런데 직업훈련이 대부분 요리 관련된 것들이에요. 홈리스일자리 정책이요? 특별자활근로라고 하는데 한 달 일하면 38만5000원 받아요. 그것도 1년에 6개월밖에 못해요. 서울시는 인원도 연간 600명으로 제한하고요."

"자립한다고? 도둑놈이고 불효자다"

사회는 계속 홈리스들에게 '자립' '자활'하라고 부추긴다. 그는 "어느 누구도 자립, 자활했다고 말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도둑놈이고 불효자"일 거라고. "삼성 이재용이 아빠인 이건희 회장 덕 없었으면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아빠와 같이 노숙하는 영철이도 아빠를 잘 만났다면 노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겠죠. 산다는 건 부모나 다른 인간관계에 기대는 거죠. 또,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의탁처가 되기도 하고. 이런 게 바로 사람 사는 방식이죠. 스스로 살고(자활), 스스로 서는(자립) 건 자체로서 말이 안돼요.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그는 현재 노숙인은 '빈곤의 형벌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8월 발표된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의 보고서'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제 '가난은 죄가 아니다'는 옛말이 돼버렸다. 가난은 죄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는 가난을 택했다. 아내도 시민단체활동가다. "부부활동가로 살기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죠"라고 '쿨'하게 답한다. 현재 그가 받는 활동비는 60만 원, 그나마도 2년 전 20만 원에서 오른 거다. "수입에 맞춰서 살아야죠." 가난에 대처하는 방식 또한 초연하다. 그만큼 삶의 지향이 분명하다. 번드르르하게는 못 살아도 번듯한 공동체는 만들고 싶다. 가난하지만 서로 도우며 같은 꿈을 만들어가는 마을 말이다. 그는 오늘도 아랫마을에서 홈리스 형님들의 손을 잡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노동세상, #이동현, #홈리스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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