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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체벌은 폭력의 일종이다. 당장 학교 밖에만 나가면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논리가 받아들여지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회사에서 부장이 "내가 평소 김 과장을 사랑하고 관심이 많은데 업무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다니요. 한 대 맞아야 정신 차리겠군요. 자, 엎드리세요"라고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 63p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란 책에서 저자가 체벌을 비판하다가 유독 학생들에게만 '사랑의 매'라는 논리가 통하는 현실을 지적한 대목이다.

<인권, 교문을 넘다> 책표지.
 <인권, 교문을 넘다> 책표지.
ⓒ 한겨레에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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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을 처음 읽었을 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개인적 감정 없이 오로지 학생을 위해 '사랑의 매'를 든다는 말을 인정한다 해도 왜 그런 논리는 학교에서만 통하는 것일까. 인권의 사각지대라 할 만한 군대나 교도소에서도 공식적으로는 그런 이유로 후임이나 죄수를 때릴 수 없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공식적으로 가능하다.
 두발 규제도 마찬가지다. 학교 외에 머리카락의 길이와 모양을 규제하는 곳은 역시 군대와 교도소 정도 외에는 없다. 이유야 어쨌든 학생들의 인권은 군인, 죄수와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열악하다.

"학생이 학생다워야지"라는 말 한 마디에 학생들은 머리를 기를 자유,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자유, 연애할 자유, 보충수업을 하지 않을 자유, 그리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인간답게 살 자유를 박탈당한다.

인권교육센터 '들'이 기획하고 6인의 인권단체 활동가, 교사 등이 쓴 <인권, 교문을 넘다>는 이제까지 '교문 앞에서 멈춰 있던' 학생인권의 실태를 고발하고, 나아가 쟁점별로 학생인권을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   

학생인권과 교권은 서로 부딪히는 것일까

이 책은 1부에서 학생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진 후, 2부에서 두발 자유, 체벌, 휴대 전화 단속 등의 주요쟁점을 다루고, 3부에서는 학생인권을 억누르는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학생인권과 '교권'의 관계를 다룬 3부 3장이 흥미롭다.

지난 1월 공포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놓고 "교권이 추락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이런 주장의 저변에는 학생 인권과 교권이 서로 상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생각이 근거가 무척 박약한 것임을 보여준다.

 교권 붕괴를 이유로 학생인권조례나 체벌 금지 정책을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내놓은 통계자료만 봐도 교권 침해는 주로 다른 이유로 일어난다. 2008년 당시 1순위로 꼽힌 교권 침해 유형은 "학부모의 부당 행위"였고, 2순위가 "학교 안전사고 처리 과정에서 교사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과중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 그리고 3순위가 "교직원 간의 갈등"이었다.…(중략)…2010년 10월, 전교조 참교육연구소가 교사 1천5백여 명을 대상으로 '누가 교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자, 교육부가 1순위, 교육청이 2순위, 학교 관리자가 3순위를 차지했다. 학생이 교권을 침해한다고 답한 교사보다 그렇지 않다고 답한 교사의 수가 더 많았다. 교사들은 교권이 지켜지려면 교사의 기본권과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학교 운영의 민주화나 입시 경쟁 교육의 해소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학생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대답은 3%에 불과했다.
-<인권, 교문을 넘다> 266p~267p

그러면서 이 책은 교사의 '가르칠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교육내용과 평가 방식 등 교육 과정 전반을 결정하는 국가이며, 교사는 정치활동 등의 기본적인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형편 때문에 있다고 말한다.

또 이처럼 열악한 상황 때문에 교사도 학생 지도‧통제권에만 매달리고 있지만, "진정 존중되어야 할 교권은 교육의 자유와 교사의 인권"이라 주장한다. 명쾌하면서도 "교사와 학생 모두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잊지 않은 윤리적인 결론이다.

다른 학교는 가능하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그래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타국의 사례들이었다. 특히 일본의 두발 자유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권, 교문을 넘다>에는 곳곳에 만화가 실려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인권, 교문을 넘다>에는 곳곳에 만화가 실려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 한겨레에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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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두발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학교가 염색도 규제하지 않는다. 1960년대에 일어났던 학생운동의 결과로 자유화된 학교도 있고, 1990년대에 이른바 '학교 붕괴' 현상에 대처하기 위해 학교를 개혁하면서 두발 자유화가 이루어진 곳도 많다. 학교 붕괴를 막기 위해 두발 규제를 '강화'한 것이 아니라, 학생을 믿고 '자유'를 기초로 문제에 대처한 것이다.
-<인권, 교문을 넘다> 61p

'학교 붕괴'에 대처하기 위해 학생을 믿고 '자유'를 기초로 두발 자유화를 이뤘다는 말에 우리의 현실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네덜란드의 사례는 일본의 사례보다도 더 거리감이 느껴진다. 거의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을 지경이다.

2008년 네덜란드의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네덜란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일까? 놀랍게도, 학생들을 분노로 들끓게 만든 건 다름 아닌 '1040시간 룰'이었다. 2008년 네덜란드 교육부가 "일 년에 130일 간은 학생들이 하루 8시간씩(오전 9시~오후 5시) 학교에 있어야 한다(연간 1040시간)"는 방침을 정하자 고등학생들이 "학교에 왜 쓸데없이 그렇게 오래 남아 있어야 하느냐"면서 시위에 나선 것이다. 한국 상황과 비교해 보면 네덜란드 학생들의 요구는 참으로 배부른 소리로 들린다. 5시 하교라면 한국에서는 거의 단축수업 수준이다. 그것도 130일이라니, 일 년에 넉 달 정도만 5시까지 남아 있으면 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말한다. 독일은 1시 반, 오스트리아는 12시 반이면 끝나지 않느냐고. 이쯤 되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인권, 교문을 넘다> 161p~162p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과 네덜란드의 이 같은 사례는 다른 학교의 가능성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을 뿐 학생들의 자유와 자율에 기초해 문제를 해결하는 학교, 하루 종일 학생들을 잡아 가두지 않는 학교는 가능하고, 이미 존재한다. 세계사회포럼의 구호를 빌리면 "다른 학교는 가능하다"

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교육

사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게 정말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공부든 생활 태도든 뭔가를 강제하기 위해 체벌을 유지해 왔다면, 서로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관계와 조건을 만든다면 굳이 체벌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체벌 없는 학교를 꿈꾼다는 것은 학생과 교사가, 학생과 학생이 서로 존중하면서 배움의 기쁨을 일구어 나가는 학교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 꿈이 그토록 비현실적이고 거창한 것인가?
-<인권, 교문을 넘다> 85p

솔직히 아직도 확신은 들지 않는다. 체벌 없는 학교의 꿈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학생과 교사가, 학생과 학생이 서로 존중하면서 배움의 기쁨을 일구어 나가는 학교'는 우리 현실과 너무 멀어 보이기만 하다.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일본과 네덜란드의 사례를 보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학교, 다른 교육의 가능성을 생각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학교를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력이라고 느꼈다. 동시에 우리에게 씌워진 틀이 얼마나 부당하고 허위에 가득 찬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청소년의 건강을 걱정해 술, 담배를 금지시킨다면서 왜 '심야공부금지법'이나 '학원금지법'은  없을까? 수업 중에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는 학생이 있으면 꼭 매를 들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함께 그 이유를 찾고 머리를 모아 해결책을 생각할 수는 없을까?

이처럼 우리가 이제까지 당연하게 받아 들여왔던 것들을 의심하고 다른 학교를 상상하는 가운데 비로소 더 나은 학교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아마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혼란과 진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제와 억압 속에서는 진정한 배움이 일어날 수 없다. 혼란이야말로 교육이 피어나기 가장 좋은 토양이다.

그래서 학생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학생들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을 넘어 더 나은 교육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교육을 상상하는 이들이 학생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다.

 학생들이 인권을 말하기 시작하면 학교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껏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학생들이 옹알이를 시작하듯 말문을 트기 시작한다. 누구는 그 옹알이를 환영할 것이고, 누구는 옹알이하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고 다그칠 것이다. 소란스럽고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본래 배움터라는 곳이 그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는가? 자기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 반론에 부딪혀 보고, 자기 생각의 모순에 부딪혀 깨지는 경험도 해 보면서 자기의 한계를 확인하고 타인에게서 배움을 얻는 과정이 바로 교육 아닌가?
-<인권, 교문을 넘다> 245p

덧붙이는 글 | 김경훈 기자는 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학생인권, #두발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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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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