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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히 눈 덮인 대관령 황태덕장을 돌자 산세는 더욱 가팔라졌다. 전날 진부행 버스에서 제천 가는 길을 물었던 선한 눈매의 장년 여성도 지금쯤 또 다른 여행지를 향하리라 여기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가파른 산들에는 정수리 쪽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는 초년의 노인처럼 듬성듬성 눈 쌓인 흔적들이 보이는데, 민둥산도 제법 있는 것이 황갈색과 군데군데 이끼 색으로 얼룩진 암벽에 햇살이 나앉은 모양은 제법 운치를 더해준다.

강릉 터미널에서 20여 분. 안목해변에 들어서자 갯내음 사이로 커피향이 슬며시 몰려온다. 넘실대는 파도를 앞에 둔 이곳은 매콤달콤한 양념을 발라 굽는 장어구이, 버터와 청양고추를 다져넣어 굽는 조개구이, 대구 혹은 동태머리를 넣고 얼큰히 끓여내는 해물탕을 파는 가게 속에 천연덕스레 카페가 어우러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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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목해변의 카페거리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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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식당? 뭔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부조화는 실로 큰 위력을 가지고 있다. 죽고 못살듯이 보이는 커플들, 남는 건 시간뿐이라고 외치며 모피를 둘둘 말고 온 중년 여성들 그리고 가장을 빼놓고 겨우 아장아장 걸음 떼는 어린 것들을 손으로 추켜세우며 아침 바람을 뚫고 들어서는 새댁을 품어주는 작은 해변이다.

그들은 가장 쉽게 눈에 띄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며 크로와상을 앞에 두고 2층에서 내다뵈는 푸른 바다와 느슨한 공기 속에 자신을 가만히 놓아본다. 바다는 말이 없고, 커피는 식어가고, 누구는 기뻐서 웃고, 때로 누구는 몰래 눈물도 찍어내며 삶을 다시 보듬어보는, 그런 그런 풍경이 있는 곳이다.

안목에 오면 커피에 취해보아야 한다. 이것저것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메뉴도 많지만 녹차 아포카토 같은 퓨전 음료를 시도해보는 것도 의미 있다. 원래는 쓰디쓴 에스프레소에 아이스크림의 달콤하고도 차가운 맛을 더한 것이 정석이지만, 동양적 음료인 녹차에 활용한 것이 바로 이 메뉴다.

새롭긴 해도 진실로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권하고 싶진 않고, 더욱이 당분이 들어간 녹차라떼를 사용한 주인의 무지는 아포카토를 농락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무엇이건 '진짜'란 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무르익고 그 의미가 깊어지는 것이기에 적당히 시류에 흡수한 채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고 창조된 것은 그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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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차아포가토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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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커피가 겨울날 안목 해변을 상징한다지만 원래 이곳은 갈매기와 가난한 어부들이 고만고만하게 더불어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번화한 도로 뒤편으로 가면 옹기종기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작은 골목들 사이로 색색가지 키 낮은 지붕을 인 옛날 집들이 지금도 자리해 있는데, 다들 하나같이 '민박'이란 팻말을 걸고 있는 게 특징이다.

노인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간혹 찾아드는 손님을 맞고, 자랑스런 깃발이라도 되는 양 빨랫대에는 가오리며 명태 같은 것이 줄줄 걸려서 겨울바람과 햇살 속에서 운치 있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바다 전망이 좋은 깨끗한 펜션에 짐을 풀고도 그 시골 정취가 궁금해 기웃거리니, 인심 좋아 뵈는 주인은 방 구경을 하라며 문을 열어봐준다.

아직도 존재하는 인심이 있기에 찜찜한 재래식 화장실 냄새가 날아들어도 이런 민박을 찾는 이들이 여전히 많은가 보다. 그러니 안목이 가진 도시와 시골의 독특한 풍경은 그저 불시에 만들어진 것만은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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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랫대에 걸린 생선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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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굵은 황설탕 같은 투명한 모래 위로 갈매기들은 떼 지어 몰려다니고, 선착장에는 유람선이 우뚝 정박한 채 겨울의 스산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있다. 무료한 해변에 십여 개가 넘는 편의점과 브랜드 카페를 따라 죽 걸으면 성글게 심겨진 소나무 사이로 푸른 바다의 모습이 숭숭 들여다뵈는 송정해변으로 들어서게 된다.  보다 시골스런 느낌이 강한 이곳에선 산뜻한 맛에 살얼음의 시원함이 어우러진 진짜 막국수를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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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국수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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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잘 익어 시큼시큼한 갓김치와 군내 슥 스치게 잘 삭은 배추김치를 내놓는 이런 가게들에선 마을 여인들이 무심한 듯이 부쳐내는 바삭하고 촉촉한 감자전, 이름만으로도 고소함이 물씬한 옥수수동동주, 숨 막힐 듯 둥근 달빛 아래 지천으로 꽃이 핀 흰 메밀밭을 떠올리게 하는 메밀꽃동동주, 면발 위로 벌겋게 양념장을 끼얹어선 척척 쳐내며 먹으면 더 맛있는 메밀비빔국수 같은 것들이 진국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게 맛이 있다.

특히나 김과 통깨가 듬뿍 들어간 물 막국수는 새콤하면서도 담백한 동치미 국물에 구수한 메밀 면발이 어우러진 것이, 살얼음이 그득히 면과 더불어 혀 위에 흘러들 때의 그 짜릿한 첫맛은 상쾌하고도 단정하고, 마지막에 한 방울의 국물까지 들이키고 나면 '아,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함께 내주는 고춧가루마늘양념장을 듬뿍 풀어서 후루룩 들이켜도 맛나지만 식초도 겨자도 치지 말고 그저 국물의 새콤함과 살얼음의 경쾌한 조화를 느끼며 먹는 것이 오히려 메밀의 담백함을 즐기는 비법이 아닐까 싶고, 적어도 강원도 물막국수는 어린애 마냥 멋모르고 순수하게 먹는 것이 최고라고 혼잣말도 해본다.

경관 좋고 맛난 거 많은 안목과 송정은 도시 속의 바닷면서 한편으론 군사 작전 지역이기도 하다. 1960년 이곳 바다를 통해서 간첩이 침투했기에 별도로 관리를 하느라 군인들이 지키는 초소가 군데군데 있다.

하여간 커피점과 호텔, 펜션이 자리 잡아 세련된 안목은 곱게 단장한 도시 여자라면, 송정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지형에다 어촌 마을의 모양새를 그대로 가진, 적당히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지만 성실하기가 누구보다 강한 시골 처녀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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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구에 정박한 여객선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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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키우는 강아지들이 방울소리를 딸랑거리며 해질녘의 해변을 저들끼리 산책하거나 해변에 드러누워 지그시 먼 해원을 응시하고, 굵은 붓으로 단번에 휙 하고 그어낸 것 같은 구름이 먼 해원을 향해 이어져 있는 곳. 잿빛, 연고동빛의 각자 다른 날개 빛을 가진 갈매기들이 지친 꿈을 안고 날아가는 곳이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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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목 해변의 집과 건물들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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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강릉, #안목해변, #강릉 송정해변, #아포가토, #막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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