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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집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와서 보라 그래. 불에 다 타고, 남은 건 그냥 시멘트 바닥뿐인데. 우리를 없는 사람 취급할 땐 언제고…. 왜 자꾸 없는 집에 이런 걸 보내는지 이해가 안 돼."

김금란(69·가명)씨는 1월 9일 오후 마을 주민 3명과 천막으로 된 산청마을 자치회관에 앉아 있다가 국민연금공단에서 온 우편물을 보고 이렇게 푸념했다. 우편물에 적힌 주소는 서울시 서초구 서초 3동 산160번지 27호. 하지만 그곳에는 지금, 아무것도 없다.

다 타버린 마을... 그들의 삶은 아직 그대로

마을자치회 막사에 모여 있는 김금란(69·가명·왼쪽)씨와 마을 주민들.
 마을자치회 막사에 모여 있는 김금란(69·가명·왼쪽)씨와 마을 주민들.
ⓒ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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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11월 28일 이 일대 비닐하우스촌인 산청마을에 불이나 54가구 중 21가구가 타버렸다. 사람들이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은 한 마을주민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게 원인이었다. 불은 판자벽과 비닐, 떡솜 등으로 지어진 이웃 가건물들로 순식간에 번졌다. 당시 화재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마을주민 120명 중 52명이 보금자리를 잃었다. 불을 낸 주민은 구속됐다.

마을회장 박진규(52)씨는 "주민들 주거 실태 파악을 해 가고도 이 모양"이라며 "동사무소나 구청이 우리한테 관심이 없다는 증거"라고 김씨를 거들었다.

2010년 11월 산청마을에 불이나 비닐하우스촌 절반가량이 사라졌다.
 2010년 11월 산청마을에 불이나 비닐하우스촌 절반가량이 사라졌다.
ⓒ 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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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마을은 원래 비닐하우스에서 꽃을 재배하던 화훼단지였다. 그러다 1960~70년대에 종이나 빈 병 등 고물을 주워 파는 넝마주이들이 이 일대에 수용되면서 비닐하우스촌을 형성했다. 이후 가족 단위의 빈곤층이 모여들면서 자치회도 만들고, 전기 수도 등도 가설했다. 마을이 생긴 지 40년이 넘었지만, 큰 화재가 일어난 것은 2010년이 처음이었다.

불이 난 지 400여 일이 지나고 두 번째 겨울이 찾아 왔지만, 피해주민들 다수는 '난민'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청마을 자체가 사유지에 무허가로 세운 가건물들이라는 이유로 구청에서 재건을 막았기 때문이다. 불탄 집터에는 소파, 장롱 등 망가진 가구들과 주민들이 내다 버린 연탄재 등이 쌓여 있었다.

화재를 피한 집들도 위험스러워 보이긴 마찬가지. 성인 한두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에는 집집마다 쌓아 올린 연탄과 액화석유가스(LPG)통이 불안하게 세워져 있었다. 건물 벽과 지붕 등에는 전선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작은 사고가 큰 재앙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 보였다.

임대주택? 들어갈 돈 없다... 떠나면 먹고 살 길 막막

화재로 망가진 가구류와 잔해들이 방치돼 있다.
 화재로 망가진 가구류와 잔해들이 방치돼 있다.
ⓒ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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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났을 때 주민들은 마을 앞 교회에서 이틀 동안 신세를 졌어요. 하지만 교회에 계속 있을 수 없어 마을에 돌아와 회관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죠. 그 옆에 공동취사장을 만들려는데 구청에서 용역들을 써서 건축자재 반입을 막았어요. 용역들 인력비만 해도 엄청날 텐데, 그럴 돈은 있으면서 주민들 스스로 취사 공간 짓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게 구청이 할 일입니까?"

박진규 회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성토했다. 서초구는 불이 난 뒤 산청마을 밑에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한 뒤 밤낮으로 10명씩 용역을 세워 단속했다고 한다. 무허가 건축물을 다시 짓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서초구가 주민들을 전혀 돕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초구가 보유한 보금자리 주택 6가구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임대주택 14가구 등 총 20가구를 이재민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21세대 중 7세대만 보금자리 주택 등으로 이사가고 나머지 이재민들은 창고 같은 곳에 난로를 설치해 만든 임시 거처에 살고 있다.

마을자치회 막사에 있는 시민단체와 개인 후원 물품들.
 마을자치회 막사에 있는 시민단체와 개인 후원 물품들.
ⓒ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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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주택에 들어갈 비용도 없을 뿐더러 새벽에 인근 빌딩을 청소하거나 신문을 배달하는 등 생업 기반이 이 동네라 떠나질 못하는 거죠. 아이들은 이 근처 학교를 다니는데 임대주택에 가면 전학을 가야 해요."

서초구가 지원한 양재동 보금자리 주택은 보증금과 월세가 없지만 최대 3년까지만 살 수 있다. 3년 뒤 집을 내놓아야 하는데 아무런 재산이 없고 은행에서 돈을 대출할 형편도 안 되는 주민들에게는 불안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또 관악구와 동작구 일대의 임대주택은 보증금 350만 원에 월세가 11만 원인데, 기초생활수급자나 일용직 노동자인 주민들은 이만한 목돈을 마련하거나 월세를 낼 형편이 안 된다고 한다.

산청마을 주민이자 '주거권 실현을 위한 비닐하우스주민연합' 사무국장인 김재필(41)씨는 "화재를 당한 주민들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대책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천재지변이나 재난 등으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산청마을은 방화로 인한 것이라 법적으로는 정부 지원이 어려운 형편이다.

산청마을 입구 전경.
 산청마을 입구 전경.
ⓒ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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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초구는 산청마을 일대를 공원으로 만드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마을주민들도 적절한 보상과 이주대책이 마련되면 이 계획에 협조할 계획이다. 그러나 생활기반을 옮기기 어려운 주민들이 서초구 내에서 전월세 등 주거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청의 현실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김 사무국장은 "화재 피해자는 물론 다른 마을 주민들도 옮길 곳을 알아보고 생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고, 대화를 통해 현실적인 지원책을 세워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산청마을, #비닐하우스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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