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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그레그(84) 전 주한 미국대사
 도널드 그레그(84) 전 주한 미국대사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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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초 재미교포 1.5세대 한국계 미국인인 성김(김성용·51) 대북 특사가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됐을 때 가수 임재범씨가 함께 화제가 됐다. '나는 가수다'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임재범씨가 성김 내정자의 고종사촌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임씨와 함께 눈길을 끈 또 다른 인물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김재권(본명 김기완)씨였다.

1977년 미국 하원 소위원회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밝힌 '김대중 납치' 실행범 명단에는 성김 내정자의 아버지 김재권씨가 일본 내 총지휘로 등장한다. 또한 1993년 9월 한국 민주당 진상조사위와 일본 측 진상조사위 조사에서도 납치 사건 관련자 12명 명단에 김재권 당시 주일공사가 '총책지령'으로 되어 있다.

당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김재권씨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실패하자, CIA(미국 중앙정보부) 한국지부 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84) 전 주한미국대사에게 김 전 대통령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정작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앞장서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려진 그레그 전 대사는 김재권씨를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는 당시 납치됐던 김 전 대통령의 행방을 알려준 인물에 대해서도 끝까지 함구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한국어로 '한국인의 한'이라고 말할 만큼 한국 현대사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요지 중 일부이다(인물의 호칭은 생략한다).

"한국 정보부, 군 장성과 친구 맺으려 기생파티 자주 갔다"

도널드 그레그(84) 전 주한 미국대사
 도널드 그레그(84) 전 주한 미국대사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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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CIA 한국지부 총책임자를 맡았을 때, 당신의 임무는 무엇이었나?
"한국 내 활동하는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것도 내 주된 임무였다. 그러나 이후락이나 중앙정보부(중정부)는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정치적 반대 세력이 일어서는 것을 막는 것으로 보였다."

- 한국 정보기관들과는 어떤 식으로 관계를 유지했나?
"기생파티를 자주 갔다. 한국 정보부나 군 장성들과 친구를 맺고 연락 관계를 유지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CIA 서울 총책임자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정보 취합에 나서지는 않았다."

- 이후락이 CIA의 정보원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나?
"CIA의 정보원은 절대 아니다. 그는 지나치게 건방진데다, 그에게 권력이 모두 집중되어 있었다. 명실 공히 당시 제 2인자 아니었나.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온 그에게 김일성에 대한 인상을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가 '김일성 개자식, 정말 싫어, 총으로 쏴주고 싶었어'라는 식으로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엉터리 영어로, '매우 강력해! 일인통치! 대단한 사내야!'라고 말했다. 사실상 김일성을 칭송한 것이다.

유신을 단행하기로 한 뒤, 이후락이 나를 다시 찾아와서 말하기를 '민주주의를 고무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강력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락에 대한 인상을 더 이야기하자면,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김대중이 생환했을 때, 중정부에 대한 대학생들의 항의 시위가 잇달았다. 그래서 중정부는 최종길 서울대 법대교수를 체포했다. 최 교수가 고문에 의해 사망했는지, 고문을 피해 투신자살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최 교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워싱턴의 상관에게 이 내용을 보고하면서 '최 교수의 죽음을 한국 정부에 항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상관은 '한국 사람을 한국 사람으로부터 구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것은 나의 임무가 아니니,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직장생활 중 처음으로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

박종규(대통령 경호실장)를 찾아가서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기분(한국어로 '기분'이라고 말함)에 따라 말하는 것인데, 최 교수 사건은 끔찍한 일이다. 나는 한국 중정부와 함께 북한에 반대하여 활동하려고 하는데, 중정부는 국내 반대 세력을 억누르는 데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그들과 일하기가 거북하다'고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1주일 뒤 이후락이 해고됐다."

- 이후락과 중정부가 국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누르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것은 결국 미국의 이익과도 부합한 것 아니었나? 사실상 미국은 그들을 방조하거나 지원하지 않았나?
"사실 많이 방조했다. 나도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식의 탄압이 일어날 때, (제지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였다. 나는 CIA 요원과 얘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상부 명령에 불복종한 얘기를 꼭 들려준다. 나는 이 불복종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덕분에 형편없는 중정부 수장이 해고됐고, 훨씬 좋은 후임자가 나왔다."

- 미국의 이익과 자신의 판단이 부합하지 않았을 때가 얼마나 자주 있었나?
"방금 얘기한 상황이 그런 사례였다. 반대로 내 판단이 미국의 이익과 완전히 부합된 경우는 내가 미국대사로 한국에 근무할 때 일이다. 당시 미국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으면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좌절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이 남한에 핵을 배치한 이상, 북한이 그것을 핑계로 핵 개발을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서 북한이 핵 개발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남한에서 (미국의)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이 양국의 이해에 부합된다고 말했다. 노태우도 이에 동의했다."

성 김 대사 아버지 김재권씨와 그레그 전 대사


- 1989년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할 당시 세계적으로는 동유럽 붕괴로 냉전이 해체되고, 한국은 1987년 이후 민주화 초기 단계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어떻게 변했고, 당신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나의 전임자인 제임스 릴리 대사는 현재 그가 받고 있는 평가보다 더 후한 평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노태우와 김대중, 김영삼이 대결한 직선제 선거는 남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자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였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로의 전환을 이끄는 데 릴리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나 민주화는 한국의 국내 문제인데, 주한 미국대사가 무슨 역할을 했다는 것인가?
"릴리는 죽을 때까지 침묵했지만, 그는 직선제 개헌이 이뤄질 수 있도록 (당시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당시 온갖 시위가 있지 않았나. 모르긴 몰라도 당신들도 그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나? 한국인들은 군부지도자들을 증오했고, 민주화가 시작되기를 원했다. 릴리는 자기 권한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밀어붙였을 것이다.

나는 6년 반 동안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안보참모였다. 그가 부통령일 때도 그를 수행해 한국에 갔었다. 나는 아버지 부시에게 한국 국회에서 연설하도록 권했고, 실제 그는 연설했다. 당시 한국의 대통령은 너무 강력한 데 비해 의회는 허약했다. 그래서 부시가 연설을 하면 의회의 힘이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대사로 부임할 즈음, 한국은 동유럽 국가 중 수교한 나라가 단 하나였다. 중국도 러시아도 미 수교국이었다. 나는 한국이 모든 동유럽 국가와 수교하도록 돕겠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199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부시가 노태우를 고르바초프에게 소개했다. 중국대사를 지낸 부시는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가 중국에게 남한의 유엔 가입 반대를 철회하도록 권고했다. 그래서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2011년 1월 5일 오전 서울 외교부 접견실에서 방한 중인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오른쪽)가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과의 면담을 기다리며 성김 미 6자회담 특사(신임 주한 미국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1년 1월 5일 오전 서울 외교부 접견실에서 방한 중인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오른쪽)가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과의 면담을 기다리며 성김 미 6자회담 특사(신임 주한 미국대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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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한국계 첫 주한 미국대사로 성김이 부임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고, 그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매우 재능 있는 사람이다. 그를 매우 좋아한다. 내가 주한 미국대사일 때, 젊은 대사관 직원 중 하나였다. 당시 좋은 인상을 받았고, 매우 일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당시 성김을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으로 데려온 게 당신인가?
"그의 서울 근무는 나와 무관하다. 내가 부임했을 때 이미 그는 거기에 있었다."

- 당신은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김대중을 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성김의 아버지는 그 사건 당시 주일공사로 있던 김재권(본명 김기완)이고, 그 사건에 깊이 개입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말?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다." 

- 1977년 미국 하원 소위원회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밝힌 '김대중 납치' 실행범 명단을 보면 최고책임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고, 일본 내 총지휘로 김재권이 등장한다. 또한 1993년 9월 한국의 민주당 진상조사위와 일본 측 진상조사위 조사에서도 납치 사건 관련자 12명 명단에 김재권 당시 주일공사가 '총책지령'으로 되어 있다. 그래도 모르겠나?
"김형욱? 그런 조사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박종규가 내게 와서 김형욱의 행방을 묻곤 했다. 그 사람, 사라지지 않았나? 거기까지만 안다."  

-  당시 민주당 진상조사위 등에 따르면 김재권은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하는 일에 개입했다가 살해 계획이 실패하자, 당신에게 납치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뒤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정말 이 얘기를 처음 들었나?
"처음이다. 성김의 아버지가 당시 어디에 있었나?"

- 그는 일본 도쿄에 있었다.
"도쿄로부터 받은 정보는 없었다."

- 그럼 납치된 김대중의 행방은 누구로부터 들었나?
"말할 수 없다. (그 정보가) 일본에서 오지는 않았다."

- 한국인이 가르쳐줬나?
"말할 수 없다."

- 당신은 아직도 한국에 많은 친구들이 있다. 성김 대사가 부임할 당시 그의 아버지와 당신의 얘기가 언론에 계속 언급됐다. 한국의 친구들이 얘기해주지 않던가?
"얘기해 주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내 이름이 (언론에) 언급되고 있나?"

- 김재권이 당신에게 납치된 김대중의 행방을 알려줬다는 것이다.
"금시초문이다." 

1973년 8월 14일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사건에 대한 회견을 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1973년 8월 14일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사건에 대한 회견을 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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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당신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책임지고 있었다. 어떻게 일본에 있는 한국 정보책임자를 모를 수 있나?
"중정부가 내게 일본에 있는 정보총책이 누구인지 알려줄 이유가 없지 않나. 나라면 일본에서 누가 CIA 책임자인지를 한국 중정부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무관한 일이고, 나도 누가 한국의 정보책임자인지 알 필요가 없다. 분리된 공간이고, 서로 알 필요가 있는 것만 알면 된다.

성김이 한국계 미국인 중 처음으로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되다보니, 한국 언론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게 불가피한 것 같다. 온갖 이야기가 나오고, 일부는 맞고 일부는 맞지 않겠지. 내가 그것에 대해 판단할 입장은 아닌 듯하다. 내가 대사로 임명됐을 때, 많은 한국 사람들이 반대했다. 왜냐하면 내가 CIA 출신이었고, 나와 관련해 많은 소문들이 나돌았다. 성김에 대한 이야기가 떠도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지만, 내가 뭐라고 언급할 이야기는 아니고,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내가 주한 미국대사로 있을 때 봤던 성김은 재능 있는 정치 참사관이었고, 대북 문제에 정통했다. 대사로서는 제격이다. 이러한 나의 평가를 당신 기사에 꼭 실어 달라."

- 성김이 한국계라고는 하지만 미국에 충성을 맹세한 미국인이다. 한국계 출신 대사라는 점 때문에 그가 오히려 본국을 의식하게 된다면 그에게도 짐이 되고 한국에도 이로울 게 없지 않나?
"사변적 질문이라 답할 능력이 없다. 그는 매우 경험 많고, 유능한 외교관이고, 아시아에서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맹방의 대사로 적격이다. 난 지난 수년 전부터 아시아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더 중요한 동맹국이라고 말해왔다."

"대학가에 만연했던 반미주의에 놀랐다"

- 주한 미국대사관 대사로 부임한 1989년, 전대협 소속 대학생 6명이 대사관을 점거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국 민중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반미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
"6명이 체포된 후 난 청와대 의전담당에게 전화해서 그들이 중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들 중 2명은 국회의원이 되었고,(웃음) 3명은 내게 사과했다. 기자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사과했다. 대사로 재직할 동안 난 공식적으로 대학캠퍼스에 갈 수 없었다. 서강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학생들을 피해서) 수여식을 성탄휴가 한밤중에 진행했다.

당시 여전히 반미주의가 대학 캠퍼스에 만연해 있다는데 놀랐다. 서강대 총장인 박홍이 내게 '북한 첩자들이 그런 일을 고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한국 대학생과 직접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유감이었다."

- 당시 왜 반미주의가 만연했는지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1987년에 반미주의가 만연했던 것은 이해했다. 우리가 전두환 독재를 후원하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까. CIA 책임자일 때도 학생시위가 빈번했다. 그러나 내가 대사로 부임할 때쯤에는 이 모든 것이 잦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미국대사가 어떤 대학 캠퍼스도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다. 반미주의도 시간이 흘러야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이해한다."

- 당신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한국인을 이해하려면 '한'(한국어로 '한'이라고 말함)을 이해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의 '한'은 일본의 강제점령으로 인한 강렬한 슬픔과 아쉬움이다. 국민정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일본에 있을 때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편견을 봤고, 1968년 한국에 처음 방문했을 때 일본인들이 행한 일에 대해 들었다.

일본인들이 과거의 행위를 공식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그렇게 해서 한국인의 '한'이라는 개념을 이해했다. 한국이 일본대사관 앞에 한국 소녀상을 세운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일본이 정신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은 참 볼썽없는 일이다."


태그:#김대중 납치, #도널드 그레그, #성 김, #박정희, #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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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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