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무심하게도, 시곗바늘은 멈추지 않았다. 초조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침과 분침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합격자발표 시각을 향해 달리기를 해댔다. 머릿속이 엉클어져 지금은 뭘 해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 긴장감을 참지 못하고 열람실을 벗어나 도서관 마당에 앉았다. 1000원짜리 편의점 커피를 마시면서 줄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바지 주머니에서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핸드폰으로 알림 문자가 왔다. 여느 때처럼 아랑(언론사 지망생 카페)에 '합격자 문자가 돌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신경은 더 예민해졌다. 합격자 발표 시각으로부터 5분이 지났지만, 아무런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게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은 높고 맑았다.

'역시 떨어졌나...'

학생들이 모의면접을 보고 있다(자료사진).
▲ 모의면접 학생들이 모의면접을 보고 있다(자료사진).
ⓒ 박규택

관련사진보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갖고 있었지만, 희망은 이내 절망이 되었다. 합격자 발표날은 희비(喜非)가 엇갈리는 순간이다. 합격자는 면접시험을 준비하고, 탈락자는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자리는 없는 것인가... 언제쯤 나도 언론사 필기합격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나는 자조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바지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갖고, 휴대폰을 꺼냈다.

'필기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면접은 OO월 OO일 본사 7층 회의실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A종합일간지 필기합격 소식이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난 필기합격자 명단에서 수험번호를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나는 필기시험을 합격했다는 행복감에 젖었다. 아직 최종합격이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리영희'를 '리영희'라 말하지 못 하고...

나는 간절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보수적인 논조의 신문사였지만, 펜을 꺾지 않는 기자가 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급하게 면접스터디를 꾸렸다. 자기소개서와 최신 이슈를 바탕으로 면접에서 나올 예상 문제를 뽑고, 모의면접을 하기도 했다.

우리 스터디원 모두 기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컸다. 모의면접이었지만, 질문 하나 하나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질문자 역할을 할 때는 편집국장이라고 생각하고 물었고, 면접자 역할을 할 때는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예비 기자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내게 던져진 예상질문 한 개가 나를 공황상태로 만들었다.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 누구였나?"
"리영희 선생입니다."
"리영희 선생에 대해 우리 신문사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고 있지 않나?"
"선생이 언론인으로서 살아온 삶..."

말문이 막혔다. 나는 진심으로 리영희 선생님을 존경했다. 선생님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며 남미를 여행했을 만큼, 그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모의면접이었지만, 처음으로 언론사 면접의 어려움을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철학과 사상에 대해 소신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독'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나는 진보적인가? 소위 내가 좌파인가? 나는 사람들이 가난으로 자살하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 이것은 상식이 아니던가.'

면접 전날까지 내 자신에게 되물었다. 면접이 다가왔지만 예상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준비할 수 없었다. 한미FTA, 트위터, 카다피 사망 등 최신 이슈를 꼼꼼히 준비했지만,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답변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언론사와 개인 성향이 다른만큼, 소신있게 생각을 피력하자고 다짐했지만 궁핍한 백수 생활이 떠올랐다.

10분 때문에 우황청심환을 들고 고민했다

MBC는 신입 아나운서 채용을 공개로 진행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MBC는 신입 아나운서 채용을 공개로 진행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 MBC

관련사진보기


드디어 면접일이 됐다. 회사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대략 면접을 보러 들어가기까지 1시간이 남아 있었다. 대기실에서 나는 우황청심환을 들고 고민했다. 전날 시험 삼아 우황청심환을 복용하고, 마음이 좀 차분해진 효과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면접 볼 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 말도 못 할까봐 걱정이 됐다(나는 실제로 한 방송사 카메라테스트를 볼 때 화이트아웃을 경험한 적이 있다).

'우황청심환 따위에 의지하지 않겠다.'

가슴 속에서 괜한 용기가 생겼다. 내가 주머니에 넣어 온 우황청심환을 먹지 않겠다고 결정한 건 '정면돌파'하겠다는 내 나름의 의지였다. 나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있는 모습으로 말했다.

"발로 뛰고, 가슴으로 쓰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짧은 소개였지만, 진심이었다. 이것보다 더 길게 얘기한다고 한들 포장에 불과했다. 나는 기자실이 아닌 길 위에서 세상일에 대해 쓰고 싶었다. 폭염과 한파 속에서도 기자수첩에 취재한 내용을 쓰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발로 뛰고, 가슴으로 쓰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꼭 합격하고 싶습니다."

다섯 명의 면접관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안경 뒤에 가려진 눈빛이 느껴졌다.

면접관들은 나의 삶과 출신에 대해 물었고 내가 시민기자 활동을 하고 있는 <오마이뉴스>에 대해서도 물었다. 출신을 비하하는 질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애써 표정을 숨겼다. 솔직하게 얘기했지만,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면접이었지만, 면접관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개의 질문은 불쾌했고,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내 자신이 미웠다. 그날, 밤늦게까지 애꿎은 소주에 화풀이를 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한 달 전쯤 한 선배 기자의 언론사 탄압 고발 영상을 보면서 나는 울었다. 잇따른 면접 탈락에 지치기도 했고, 기자들이 언론탄압에 맞서 싸워야만 하는 현실이 슬프기도 했다. 기자가 되기도 힘들지만, 기자가 된 이후에도 '정론직필'(正論直筆)의 마음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은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B언론사 면접 이후에도 나는 언론사 몇 곳에 더 입사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필기합격을 하면, 면접에서 떨어졌다. 지난 1년 동안 난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지냈다. 합격자 발표 시각이 다가오면 도서관에서 가슴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는 일을 반복했다. 그리고 여전히 바지 속에 넣어둔 휴대폰의 떨림에 깜짝 놀라곤 한다.

그렇게 긴장되는, 그리고 힘든 1년을 보낸 나는 내년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공부했던 시사상식 문제집과 원고지들을 모아보니 꽤 두꺼웠다. 그사이 나는 서른에 한 뼘 더 가까워졌다. 언론사입사 준비생들 가운데 장수생이 된 것이다.

이후 시간은 흘렀고, 온도계의 눈금이 영하를 가리킬 무렵 슬픈 소식이 들렸다. 생면부지의 학교 후배가 '한미FTA 반대집회'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유명(幽明)을 달리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길에서 울었다.

곗돈을 모으듯이 모아놓았던 슬픔이 순간 터졌기 때문이다. 나는 지쳤지만, 오히려 강해졌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 쓰고 싶고, 말하고 싶고, 보도하고 싶다.

"낙심한 만큼 나의 펜도 강해질 것이다."


태그:#면접, #언론사입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