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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관리하는 국가유공자는 크게 '국가수호'와 '독립운동' 분야로 나뉜다. 국가수호 유공자는 6.25전쟁과 월남전쟁 참가자 위주로 선정된다. 그에 비해 독립운동 유공자는 일제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 국내외에서 애국활동을 한 사람들이 선정되며, 현재까지 전북지역에는 총 699명이 지정돼 있다.

의병을 포함해 3.1운동, 광복군, 국내항일운동, 중국·만주·일본지역 항일운동, 문화운동, 애국계몽운동, 의열투쟁, 임시정부, 학생운동 등을 한 사람들이다. 이중 의병이 230명으로 가장 많다. 3.1운동은 223명, 국내 항일운동 154명, 학생운동 22명, 광복군 12명 등이고, 나머지는 모두 10명 이내다. 그만큼 의병의 역할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크나큰 의미가 있다.

전북지역 의병장 중 유일하게 성역화사업이 진행된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를 모신 소충사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하지만,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후손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해보인다.
 전북지역 의병장 중 유일하게 성역화사업이 진행된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를 모신 소충사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하지만,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후손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해보인다.
ⓒ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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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조명은 여전히 소원하기만 하다. 구한 말 의병은 비단 일본군뿐만 아니라 친일 정부와 그 관리들, 그리고 관군조차도 적으로 해 그들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아가면서 힘겨운 투쟁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현재 그들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미진한 듯하다. 단적인 예로, 전북지역에서 한말 의병과 관련된 현충시설은 22개에 불과하다.

임병찬 의병장을 기리는 동의기념비. 풀이 무성할 정도로 방치돼 있다.
 임병찬 의병장을 기리는 동의기념비. 풀이 무성할 정도로 방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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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또한 소충사와 같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비석과 같은 단순 조형물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동의기념비와 항일애국지사진치만공적비, 무성서원, 병오창의기적비, 임병찬선생창의기념표석 등이 있는 정읍지역과 일광기념관과 도동사, 의병장김공삼기적비, 정시해충효비, 한말의사박도경추모비 등이 있는 고창지역에 각각 5개의 현충시설이 있다. 시설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이밖에도 무주에는 순국의병장사지상, 의병장강무경상, 의병대장문태서순국비가 있고, 임실에는 이석용의병장 생가와 소충사, 운현전적의혼 추모시설 등이 조성돼 있다. 진안에는 래산사와 호남창의동맹단의병위령비, 대한이산묘가 있으며 완주에는 일문구의사사적비, 장수의 의사전해산추모비, 전주 황극단 등이 있다.

이규홍 의병장 생가터. 십수년전 집주인에 의해 헐려진 이곳은 아직도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이규홍 의병장 생가터. 십수년전 집주인에 의해 헐려진 이곳은 아직도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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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는 더 큰 문제로 지적된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 그나마 있던 유적지들이 사라져가고 있고, 애써 만들거나 복원한 곳도 방치되기 십상이다.

오합지졸이었던 의병을 규합, 연이은 3번의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 129명을 사살하는 대단한 전과를 올린 이규홍 의병장. 그가 나서 자란 생가는 십수 년 전 해체됐다. 마을 주민들도 이곳이 의병장의 생가였음을 알고 있고, 지금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복원도 가능해보이지만, 그 흔한 설명문 하나 없고, 누구 한명 나서는 사람도 없다.

순창 회문산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쳤던 양춘영 의병장. 그의 묘는 현재 이정표가 없어 아는 사람을 부르지 않고는 찾기 어렵다. 애써 찾아가도 자그마한 설명문 하나 없다. 미리 알고 가지 않는 이상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다는 말이다. 양춘영 의병장의 주 세력권이 회문산이었는데,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본부가 있던 곳과 겹친다. 주민들 중에는 당시의 피해의식이 있어 지금도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 많다. 누군가는 나서서 양춘영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순창이 역사의 한 주역이었음을 말할 수 있다.

전해산추모비각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전해산추모비각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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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의병의 정신적 지주인 전기홍 의병장을 기념하는 '의사전해산추모비'는 장수군 번암중학교 정문 앞 비각에 모셔져 있다. 그런데 관리의 어려움을 빌미로 문을 걸어 잠갔다. 안으로 들어가 확인할 길이 없다. 그 비석이 거기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문수사 안내도 어디에서도 박도경 의병장과 관련된 설명을 찾을 수 없다. 흔적 자체가 온전히 사라진 느낌이다.
 문수사 안내도 어디에서도 박도경 의병장과 관련된 설명을 찾을 수 없다. 흔적 자체가 온전히 사라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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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문수사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백성으로부터 '진짜 의병은 박포대 의진뿐'이라는 칭송까지 들었던 박도경 의병장의 추모 시설은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다. 아마도 고창군민 기억 속에서 머지않아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기삼연과 함께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문수사에는 의병과 관련된 문구 하나 찾아볼 길이 없다. 또한 고창읍 교촌리에 있던 묘소와 '한말의사박도경추모비'는 지난 2009년 후손에 의해 대전 현충원으로 옮겨졌다. 고창의 역사를 대변해줄 수 있는 기념물이 조용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현재 그의 고향이라는 고창에서 그를 떠올릴만한 기념물은 전혀 없다.

석란정이 있던 그곳은 지금, 사람이 지나는 길목에 표지판이 하나 서있을 뿐이다.
 석란정이 있던 그곳은 지금, 사람이 지나는 길목에 표지판이 하나 서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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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시설뿐만이 아니다. 한말 전북지역 항일의병사에서 획을 그을 만한 역사적 장소들 역시 푸대접 받기는 마찬가지다.

1903년 호남유림대회가 열리고, 유림들이 모여 서보단을 쌓았다는 정읍시 내장산 벽련암 뒤편의 석란정. 그곳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27개 향교 54명의 유림들이 모여 일제에 대한 복수를 결의했다. 비록 무장투쟁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반일본 기치를 내건 유림들 최초의 집단적 움직임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 모임은 1906년 병오창의의 정신적 자양분이 됐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바위에 새겨진 '석란정'이라는 글씨만이 역사적 현장임을 말해줄 뿐이다. 독립운동사에서 전북이 자존심을 갖기 위해서는 이곳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종성마을 주민 김영환씨가 벌초를 하고 있다. 그가 아니라면 임병찬 의병장의 거점이었던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성마을 주민 김영환씨가 벌초를 하고 있다. 그가 아니라면 임병찬 의병장의 거점이었던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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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 말 전북 의병사에서 정읍 산내면 종성마을이 상징하는 바는 매우 크다. 1906년 정읍 무성서원에서는 임병찬이 유림의 태두였던 최익현과 함께 전북지역 한말 최초의 집단적 항일 무장투쟁에 돌입한 바 있다. 현재 종성마을에는 '임병찬 창의 유적지'가 있는데, 임병찬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을 훈련시키던 곳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종성마을이라는 거점이 없었다면 병오창의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한 때 150호가 넘게 있었다는 이곳에는 현재 단 6가구 10명의 주민이 살고 있을 뿐이다. 김영환(74)씨는 10대째 이곳에 살고 있다. 마을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임병찬 장군 유적지를 홀로 관리하고 있다. 누구 시켜서가 아니라 마을의 자랑이라며 스스로 나선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익현 피체지라는 곳이다. 최익현이 이곳에서 붙잡혔으면 함께 있던 임병찬이 붙잡힌 곳도 바로 이곳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의병에 정말 관심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이 알뿐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장소가 돼버렸다.
 최익현 피체지라는 곳이다. 최익현이 이곳에서 붙잡혔으면 함께 있던 임병찬이 붙잡힌 곳도 바로 이곳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의병에 정말 관심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이 알뿐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장소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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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푸대접받는 것은 아마도 동학과 엉킨 실타래 때문일지 모른다. 동학농민혁명의 3대 우두머리 중 한 명인 김개남이 임병찬의 밀고로 붙잡혔던 것. 당연히 동학에서는 임병찬을 멀리하게 됐고, 동학이 대세인 정읍에서 임병찬의 의병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구한 말 전북지역 의병이 부각되기 위해서는 임병찬에 대한 재평가가 무척 중요한데, 그게 원천봉쇄된 형국이다. 최근에는 임병찬의 밀고가 나머지 동학도들을 구하기 위한 고육지계라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임병찬과 동학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의병운동의 재조명 사업이 정치논리에 의해 진행되는 안타까운 장면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회문산 중봉 아래 돼지툼벙이라 부르는 계곡이 있던 안내앙굴은 양춘영 의병장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 의병공원을 만든다며 2005년부터 도로개설 작업이 시작됐지만, 단체장이 바뀌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 그곳은 도로포장이 중간에서 끊겨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이석용 의병장 생가. 물론 자물쇠를 걷어내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저 자물쇠가 상징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석용 의병장 생가. 물론 자물쇠를 걷어내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저 자물쇠가 상징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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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구한 말 의병장에 대한 성역화 사업이 어느 정도 완료된 곳은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를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소충사가 유일하다. 무성서원이나 대한이산묘 등은 제법 규모 있는 의병관련 현충시설이기는 하나, 다른 여러 의미가 혼재돼 있어 순수한 의병 시설물은 아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단순 조형물에 불과하다. 현충시설 관련 활성화 사업도 학생 탐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반가운 일은 전기홍 의병장 성역화 사업이 이르면 내년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익산의 이규홍 의병장 기념사업회도 올해 출범에 성공, 성역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주변을 조금만 되돌아봐도 불과 100여 년 전 피 흘려 이 땅을 지킨 의병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그분들의 업적을 후손에게 전해줄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의병, #항일의병사, #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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