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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다. 말이 집이지 월세 방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7월 하순에 길을 떠났으니, 실은 미국 땅에는 되돌아갈 집이 없다. 귀소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한편으로 허허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막하다. 

 

길 바닥에서 보낸 날이 이제 제법 된다. 윤의도 야영 생활에 꽤 이력이 붙었다. 매일 저녁 어디론가로 이동해 텐트를 치고, 이튿날 아침이면 걷어내는데 몸놀림이 거의 자동이다. 텐트를 펴고 접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이 될까 말까이다. 옮겨 다니는 게 완전히 몸에 익었다. 거의 유목민 수준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자동차 주행거리는 그간 1만km를 훨씬 넘겼다. 왼편 뒷좌석 쪽은 내려 앉기를 멈춘 상태다. 오르막 길에서 가속 발판을 밟으면 가끔씩 '쿨럭' 혹은 '멈칫'하다가 '왱'하고 큰 소음이 나는 걸 빼면 지금까지는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점화 플러그 문제인지, 엔진오일을 갈아준 뒤 뛴 거리가 5000km가 훨씬 넘었는데도 교체를 해주지 않아서 그런 건지 원인은 알 수 없다.

어느 결엔가 윤의도 야생에 적응한 짐승처럼 변해있다. 한데에서 자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눈초리가 널려있는 길 바닥에서 밥을 차려 먹어도 불편해 하지 않는다. 아무튼 사람에서 야생동물 쪽으로 많이 진화했다. 게다가 식은 밥에 반찬이라고는 단무지 딱 하나여도 불평이 전혀 없다. 둘이 합쳐 하루 식비가 10달러가 안 될 정도로 궁색하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잠은 썩 잘 자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병 나지 않고 버틸 만큼의 수면은 무난하게 취하고 있다. 무엇이 윤의의 심경을 변하게 만들었을까. 인간이란 존재를 실로 조그맣게 만드는 대륙의 대자연? 지친 나머지 바닥까지 가버린 심리 상태?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아버지와 여행이 끝나기 전에 관계 개선을 이뤄야 내야 한다는 의무감? 알 수 없다.  

 

우리 부자는 서로 너무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유전의 법칙에 따르면 절반은 분명히 서로 닮아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유랑인의 피가 아들에게도 어느 정도 흐르고 있나 보다. 연전에 내가 1년 가까이 차 안에서 잠을 자면서 북미대륙을 헤맬 때 아들은 그런 나에 비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헌데 지금 보니 유랑인 생활을 한다면 그럭저럭 후계자로 삼을 만 하다.

 

매번 텐트에서 자면서 이리저리 이동하기를 30일 넘게 했으니, 아들도 유랑인 맛보기 과정쯤은 이수한 셈이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그런대로 떠돌이 자질이 있다. 이번 우리 부자의 여행도 그렇고, 전에 내가 혼자 떠돌 때도 주변 사람들은 "힘들겠다"며 대체로 걱정을 해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세상에 유랑 생활처럼 쉬운 것도 드물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유랑 생활은 모두 다 내려 놓는 삶이다. 아니 내려놓지 않으면 배길 수가 없다. 내려놓지 못하겠다면 욕심을 좀 덜어도 된다. 욕심마저 물리치기가 쉽지 않다면, 그냥 무조건 신경을 끄면 된다. 유랑자의 입장에서는, 신경을 써서 되는 일이, 내 경험으론 거의 없다.   

        

"집 같지?"

"예, 그렇죠 뭐."

 

윤의는 여행을 시작한 뒤 한 동안 텐트 안을 매우 불안정한 임시 주거공간으로 인식했었다. 그런 사고방식이 어느 날 인가부터 달라져 있었다. 뉴욕에 있을 때까지 만 해도 텐트 안에서 밤을 나는 생활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나 이제 어둠이 내려 앉으면 고개를 잔뜩 숙이고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품에 전혀 스스럼 같은 게 배어나지 않았다.  

 

"식구들이 보고 싶을 뿐, 텐트가 집보다 그다지 많이 불편하지 않은걸요."

 

유랑 생활에 따른 불편함은 단순한 체력으로는 극복하기 힘들다. 하루 이틀이라면 모를까, 열흘, 보름, 한 달을 예컨대 잠을 자지 않고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랑비에 바지 가랑이가 젖듯, 몸이 심리적인 침식에 서서히 무너지게 돼 있다. 이런 식으로 서서히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 

 

아들과 나, 아마도 마음을 비워서 새 마음이 들어갈 자리가 생겼을 수도 있다. 비워졌든, 혹은 그대로이든 아무튼 우리 부자 서로의 마음을 담아 보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럽다. 아들에게는 어릴 적 나로부터 받은 상흔이 너무 깊게 남아있다. 나는 또 그 상흔을 의식해서 말을 가려서 한다. 가슴에서 만들어진 말을, 머리로 한 번 더 점검한 뒤에야 비로소 입으로 내뱉는다. 위선이나 작위가 아니라 나름 아들에 대한 나의 배려이다.

 

우리는 다시 로키 산맥으로 접어들었다. 7월 하순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으로 향할 때는 남 로키를 관통했다. 여행의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북 로키를 넘는다. 험난한 빅혼(Big Horn) 국유림 지역을 구불구불 지나 그 유명한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US루트 14A 길을 달린다. 로키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들은 수없이 많다. 내가 타 본 것도 10개가 넘는다.

 

14A 길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인데 지금까지 이용한 다른 로키 동서횡단 도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서울의 북한산 인수봉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 큰 갖은 모양의 바위산들이 150km에 육박하는 14A 길 구간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시피 했다. 그 웅장함에 '아~'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서부의 스케일, 나아가 북미대륙의 스케일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곳도 미국에 많지 않다. 우리 부자의 관계처럼 마침 우리가 지나는 땅들도 전혀 새로운 경지로 접어들고 있다.    


태그:#야생, #변화, #로키,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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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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