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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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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했다. 러시아 정부의 대북 중대계획에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메드베데프의 중대계획이란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가로 가스관, 전력망 건설, 러시아와 한국간 가스통과료 확보라고 한다. 이 계획은 이미 북한에 전달된 상태였다. 김정일 위원장이 반응을 보일 차례였다.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뒤 대통령 대변인 나탈리야 티마코바는 이렇게 브리핑을 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아무런 전제조건없이 6자회담에 복귀할 준비가 돼 있다. 6자회담 과정에서 북한이 핵물질 생산 및 핵실험 잠정 중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이 내용은 김계관 제1부상이 뉴욕을 방문하여 보즈워스 대북정책특별대표와 협상을 마치고 귀국한 지 2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나온 것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도대체 이번 러시아 방문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노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부레야 수력발전소, 러시아판 대북 중대제안

이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선 정상회담이 열린 울란우데에 가기 전 김정일 위원장이 방문한 극동 시베리아 최대 수력발전소 부레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6자회담 청와대측 대표로 한 번도 빠짐없이 참여했던 필자(필자는 전 노무현 정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을 지냈음... 편집자)는 2005년 9·19공동선언을 만들어낸 제4차 6자회담이 떠오른다. 2005년 9월 필자는 부시행정부 백악관의 NSC(국가안전보장회의) 관리들과 숙소인 차이나월드호텔에서 거의 매일밤 1~2시간 별도 협의를 가졌다. 쟁점은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를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NSC 비확산담당국장 윌리엄 토비는 북한이 핵계획을 모두 포기한다 해도 경수로는 절대 지어줄 수 없다면서 나에게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우리측이 북한에 던진 대북중대제안, 즉 북한이 핵폐기를 하는 동안 경수로를 짓게 될 텐데 그 경수로 건설 기간 동안 200만Kw의 전력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아예 영속적으로 계속 유지하라, 아니면 러시아 극동 시베리아의 최대 수력발전소 부레야의 전력을 북한이 제공받도록 하고 그 송전비용을 한국이 대라는 것이다.

부레야 수력발전소의 전력생산량이 워낙 막대하므로 북한에 경수로 2기에 해당하는 200만kw 정도를 제공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될 것이라고 했다. 만약 6자회담 참가국들이 부레야 수력발전소를 통한 전력 제공에 합의한다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했다. 북한은 비교적 단기간에 전력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미국과 한국은 경수로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며, 러시아는 북한에 전력을 팔아 수익을 챙길 수 있다는 거다.

필자는 북한이 평화적 핵이용권리를 포기한다면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겠지만 이미 미국과 중국, 북한이 핵포기시 경수로를 제공한다는 문안을 놓고 마지막 협상을 벌이는 마당에 이걸 내놓는다는 건 협상을 좌초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특히 러시아와 북한이 부레아 전력 이용에 합의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 두 나라 사이의 경제협력 사안이 될 뿐 비핵화를 강제하고 북한의 행동을 통제할 카드는 못된다고 대응했다.

오히려 북한 금호지구에 신포경수로 공정이 35% 정도에 와 있고, 경수로 운영에 필요한 원자력발전기도 이미 완성해 둔 상태라는 점을 지적하며, 경수로를 지어주는 대신 핵연료의 반입과 발전소 가동 및 사용후 연료 반출을 6자회담 참가국이 공동관리하는 게 북한 핵폐기를 밀어붙이게 하는 데 더 낫다고 대응했다. 윌리엄 토비의 발언을 통해 미국측이 부레야 발전소 송전을 상당 부분 러시아와 협의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미국 백악관 비확산담당국장의 아이디어를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 측이 올해 봄 북한에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위한 카드로 전달했다. 금년 4월 17~21일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측 중재를 통해 6자회담 3단계 개최방안을 수용한 시기와 맞물려 벌어진 일이다. 러시아측 제안에 대해 북한은 미국과 고위급 접촉 및 김계관의 방미 협의를 마친 뒤 내부 총화(북한의 범부처 고위급 정책협의)를 거쳐 방침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판 대북 중대제안'을 수용한 것이다.

약발 떨어진 미국의 5대 선제조치 요구  

(뉴욕=연합뉴스) 주종국 특파원 = 김계관 등 북한 대표단 일행이 북미 고위급대화 참석을 위해 지난 29일(현지시간) 오전 뉴욕 맨해튼 밀레니엄유엔플라자 호텔을 나서고 있다. 뒤쪽은 최선희 부국장.
 (뉴욕=연합뉴스) 주종국 특파원 = 김계관 등 북한 대표단 일행이 북미 고위급대화 참석을 위해 지난 29일(현지시간) 오전 뉴욕 맨해튼 밀레니엄유엔플라자 호텔을 나서고 있다. 뒤쪽은 최선희 부국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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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이 러시아의 전력과 가스를 공급받는다는 건 향후 6자회담은 물론 북한의 생존전략에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진다. 미국의 '선 비핵화 후 경제지원' 요구에 '경제적 생존 대책이 전제된  비핵화' 카드를 구체적인 백업 플랜을 바탕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번 러시아 방문이 김계관 제1부상의 미국 방문과 그 직후 일련의 협의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김계관 제1부상 방미시 미국이 내놓은 북한이 취할 5대 선제조치란 무엇인가? 미국은 지난 7월 28일 뉴욕을 방문하여 일주일 정도 머문 북한 김계관 제1부상에게 6자회담으로 가기 위한 필요한 조치(necessary steps), 한국정부 용어로는 선제조치(pre-steps)로 (1) 미사일 시험발사 모라토리움, (2) 추가 핵실험 금지, (3) 농축우라늄 활동 중단, (4)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관 복귀, (5) 대남 군사도발 금지 등 5가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일단 즉답을 피하면서 나름의 입장을 내놓고 다음 회담의 여지를 남긴 채 베이징을 통해 귀국했다. 이때 베이징에서 북한 김계관과 중국 우다웨이 부부장이 만났다. 그래서 나온 게 미국이 취해야 할 5가지 선제조치, 즉, (1) 유엔 제재 해제, (2) 인도적 식량지원, (3) 지속적인 미북 접촉 및 회담, (4) 평화협정 논의 개시, (5) 관계정상화 논의 개시이다.

중국은 이를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른 균형된 요구로 평가했다. 현재 미국과 북한은 일단 물밑 협의를 지속한다는 전제 아래 한국전쟁시 북한 지역에서 전사한 미군유해발굴사업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약간의 인도적 식량지원 의사를 발표했다. 5 대 5 선제조치는 당분간 핑퐁게임 양상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북한은 이를 러시아의 중대계획으로 덮어 씌워버렸다.

미국이 5가지 선제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는데 자신은 핵물질 생산과 핵실험 잠정 중단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며 2가지 선제조치를 해소해 버렸다. 영변에서 플루토늄 활동이 진행중이라는 정보가 없는 현 시점에서 핵물질 생산 중단은 우라늄 농축활동의 중단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핵실험 중단 의사 역시 플루토늄 재고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농축우라늄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이 야심차게 내놓은 6자회담 재개의 조건은 힘을 잃게 된다. 일단 6자회담을 열어서 북한이 원하는 유엔제재 철회와 미북 관계정상화 및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하면서 비핵화 논의에도 시동을 걸어보자는 북측의 주장에 러시아와 중국이 동조할 때 과연 미국과 한국이 계속 5대 선제조치에 연연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북한은 자신의 5가지 선제조치 요구를 김정일 위원장의 '전제조건없는 6자회담 재개' 발언으로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북한식대로의 국면전환' 모색, 무엇을 노리는가? 

북한은 금년 들어 미국과 유럽,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적극적인 유화조치를 취해 왔다. 1월 북·미 고위급 군사회담 제의, 3월 독일에서 비핵화와 미사일 관련 미·북 기술협의, 4월 카터 전 대통령 방북, 5월 미 국무부 킹 특사와 식량실사단 북한 방문, 억류 미국인 석방, 6월 북한 태권도 시범단이 3년 8개월만에 미국을 방문했고, 북한 중앙통신과 AP통신사 평양 종합지국 개설합의 등 미국과 대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 각별히 공을 들였다. 최태복 의장이 영국을 방문했으며, 영국군 6·25전사자 유해송환이 5월에 이루어졌다.

김정일 위원장이 금년 5월 방중을 포함, 지난 1년 사이 3차례나 압록강을 넘었다. 중국측에서도 공안부장과 조직부장이 북한을 방문하였다. 나선 및 황금평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올해 1월부터 4월 사이 북·중 무역은 14억 3000만 달러에 달했다. 전년 같은 기간(7.2억달러) 대비 99.2%가 급증했다.

경제재건 움직임도 활발하다. 소위 2012년 '경제강국' 건설이라는 축제 분위기 조성을 위해 경제성과 도출에 집중하고 있다. 대규모 건설공사 가운데 2012년까지 마무리할 수 있는 희천발전소와 만수대 지구 건설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주민들에게 공급할 식량과 생필품 확보에 부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통일부의 인식은 참으로 구태의연하다. 북한이 중국과의 협력, 특히 고위급 교류와 경제협력을 강화하며 지원을 확보하고 나선·황금평 등을 중심으로 경협을 지속적으로 활성화할 것이며 러시아와 '전제조건없는 6자회담 재개'등 비핵화 공조는 물론 의외의 경협 프로그램도 추진하리라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이 모든 움직임은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리라 전망한다. 북한이 한국에 손을 벌리지 않고 살아갈 수 없으며, 결국 손들고 나올 수 밖에 없다는 '희망적 관측(wishful thinking)'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전부이다.

북한이 노리는 것은 아마도 한국 이명박 정부의 이와 같은 나태하고 여유로운 상황인식과 오판일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가든 러시아를 가든 별 볼일 없을 것이라는 방심의 틈을 노려 미국과 고위급 회담을 유지하여 인도적 식량지원을 부분적으로나마 얻어냈고, 러시아를 방문하여 에너지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중국의 정치적 외교적 지원과 경제협력, 러시아와 에너지 협력을 통해 비핵화는 장시간을 두고 서서히 풀어가도 된다는 북·중·러 3국간 의견 조율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당장 경제난 해결에 효과가 크지 않을지 모르나 북한이 앞으로 6자회담과 남측을 대하는 태도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장기 생존전략, 즉, 중러와 협력을 통한 경제개발 추진의 흐름 속에서 비핵화 등 6자회담을 미국이 준비되는 정도에 맞춰 천천히 추진해도 좋다는 방침을 이미 집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위성락 본부장은 베이징에서 김계관 제1부상을 만나라

6자회담 재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한한 우다웨이 중국 6자회담 수석대표(왼쪽)가 26일 오후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을 방문해 위성락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6자회담 재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한한 우다웨이 중국 6자회담 수석대표(왼쪽)가 26일 오후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을 방문해 위성락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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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외교부 인사에서 위성락 본부장이 주요국 대사로 나가고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맡는다고 한다. 대한민국 외교부 고위관리들은 그렇게도 애국심이 없는가?

지난 6월초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한반도특별대표가 초청해서 위성락 본부장이 급거 중국에 들어갔다. 우다웨이 특별대표는 김계관 제1부상이 위성락 본부장을 수 일내 만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좋은 회담을 갖기 바란다고 권유했다. 처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더니 급작스레 돌변했다. 이렇게 준비없이 만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했다.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맡은 지 상당히 오래된 위성락이 북측 협상 상대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면 그건 직무유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또 다시 그는 베이징을 방문중이다. 대사 부임은 잊어 버리라. 김계관 제1부상이든 이용호 부상이든 자신의 카운터파트를 만나 협의를 하겠다고 베이징 채널을 통해 요청해야 한다. 북한이 취할 5대 선제조치 운운하며 여유부릴 때가 아니다. 이미 상황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조건없는 6자회담 재개'를 수용하는 건 북한 술책에 말려든다는 구태를 던져야 한다. 실질적이고 결과가 보장될 수 있는 6자회담을 위해 한국정부는 준비되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의 핵포기를 구체적으로 추진해내는 게 대한민국 외교관의 임무이다.
 
이번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대규모 전력을 제공받아 '비핵화없는 경제회복'의 길로 서서히 움직일 것이다. 러시아에서 평양까지 송전선을 건설하는 데 수년이 걸리므로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남의 장단에 춤출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 중국,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저토록 '비핵화없는 생존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데 도대체 이명박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타를 피할 길이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미래발전연구원 부원장입니다.



태그:#6자회담, #부레야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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