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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은 1945년 일본제국이 패망한 날이기도 하고,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한 날이기도 하다. 전자의 8·15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날이고 후자의 8·15는 남쪽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민족 분단이 확정된 날이기도 하다. 물론 8·15는 '경축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1945년의 8월 15일은 '착잡한 날'이었고, 민족적인 관점에서 1948년의 8월 15일은 '비극적인 날'이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오늘 우리의 역사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자랑스러운 선조들이다. 하지만 진정한 독립운동가는 자기 영달과 무관하게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다. 또한 그 분들은 해방에는 기뻐했을지언정 분단에는 분노하거나 절망했다. 이런 점에서 민족 분단을 자기 영달에 이용한 사람은 순수한 독립운동가였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북쪽의 김일성·박헌영이나 남쪽의 이승만·이범석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순수한 독립운동가였다고 말하기는 아깝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임정요인들의 생활상과 함께 자신의 영달과는 전혀 무관하게 임시정부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여성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본명은 정묘희(鄭妙喜), 속명은 정정화(鄭靖和)이며 1900년에 태어나 1991년에 타계했다. 이 글은 그의 회고록 <장강일기>(학민사)에 주로 의존해 씌어졌음을 밝힌다.                                    <필자주>

기차가 '뎅캉' 소리를 내며 차가운 겨울 공기를 찢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전진과 후진으로 몸을 뒤채더니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인의 입에서 가느다란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경성역을 빠져나온 열차는 육중한 쇠바퀴로 차디찬 선로를 짓이기듯이 갈고 비비면서 달렸다. 경성에서 상해까지의 먼 길, 20세 여인으로는 벅찬 여정이었다. 겁 없는 여인을 태운 의주행 열차는 밤을 패며 달렸다. 차창에 나타나는 자기 얼굴을 보며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대륙으로 가고 있다는 현실감을 느꼈다. 대륙에는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있었다.

그녀는 의주에서 봉천행 기차로 바꿔 탔다. 압록강 철교를 건너야 했고 그것은 곧 국경을 넘는 일이었다. 친정아버지가 만들어 준 여행허가서 덕분에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봉천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어 봉천에서 천진, 천진에서 남경, 남경에서 상해로 가는 기차를 연이어 갈아타며 꼬박 일주일을 기차에서 보냈다. 기차는 추웠고 의자는 딱딱했다. 그녀는 뒷자리의 중국인이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잠을 청할 수 있을 정도로 기차에 익숙해졌을 무렵 상해에 도착한다.

"네가 어떻게 여길 왔느냐? 여기가 어떤 곳인 줄은 알고 온 것이냐?"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의 일대기를 다룬 <장강일기>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의 일대기를 다룬 <장강일기>
ⓒ 학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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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는 크게 놀라면서도 어린아이처럼 그녀를 반겼다. 남편은 아예 기가 질려 버린 듯했다. 그녀는 친정아버지가 준 돈을 시아버지에게 드리면서 그것이 독립 자금이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당년 74세인 시아버지 김가진은 몇 년 안 될 것임이 분명한 여생을 기꺼이 조국 광복에 바치기 위해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해로 망명을 온 것이었다. 그녀는 시아버지를 비롯한 이시영, 이동녕과 같은 어른들을 돌보는 일도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임정 요인들의 생활 형편은 무참했다. 이름만으로도 민족적 지사인 그들은 대부분 하루 식사를 배달식으로 때우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식 백반이 아니었다. 반찬을 찔러 넣은 중국식 빵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빠우판'이라고 불렀다. 식대는 한 달에 한 번 계산하는데 그나마도 지불이 밀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상해임시정부의 실정은 국내에서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법무총장인 신규식이 임시정부에서 가장 핵심적 인사라는 것을 알고는 내심 놀랐다. 신규식은 이미 1911년에 거액의 자금을 가지고 상해에 와서 중국 혁명 주역들과 교류하며 임시정부의 기반을 닦았다고 했다.

그녀는 민족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의 생계가 저리 막막해서야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지사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구차한 형편을 밖으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들은 순수한 애국자임이 분명했다. 이제 그녀는 그런 어른들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제가 국내에 가서 자금을 구해 와야 할까 봐요."

남편과 시아버지는 일단 말리기부터 했다. 이시영과 이동녕과 안창호는 위험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녀가 계속 자기주장을 꺾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똑같은 말만을 되풀이했다. 아녀자로서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아녀자'라는 말이 앞에 하나 더 붙었을 뿐, 남자들의 생각은 완고하기 그지없었다.

신규식만은 조금 달랐다. 그는 40대 초입의 신사였다. 그는 정중하면서도 진솔하게 그녀에게 답변해 주었다

"부인도 아시겠지만 지금 국내는 사지(死地)와 같습니다. 게다가 동농(시아버지 아호) 선생의 망명으로 왜놈들의 감시가 심할 것은 자명합니다. 물론 사려 깊게 처신하시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붙잡히게 되면 큰 고초를 겪게 되실 겁니다."

그녀는 가슴이 미어져 옴을 느꼈다. 차라리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더라면 그녀의 가슴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을 터였다. 단호히 막지도 못하면서, 한 나약한 여인의 신변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신규식의 진실성이 그녀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활동명을 정정화(鄭靖和)로 정했다. 신규식은 정화의 일에 공식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그는 자신의 지시에 따르는 것을 전제로 정화의 국내 잠입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녀의 공식 임무는 독립자금 조달이며 출발, 잠입, 귀환의 모든 경로는 임정의 명령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정화의 공식적인 독립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첫 번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상해로 복귀했다. 이후 그녀는 다섯 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자금을 조달한다. 물론 그것은 매번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3차 잠입 때는 일경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조선인 형사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며 차츰 등을 돌리는 국내인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등을 돌리는 동포들의 모습을 대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잠깐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일화가 하나 있어 상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한 번은 기대했던 인사로부터 자금을 거절당한 정화는 착잡한 심정으로 경성 인사동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번 귀국 때, 크게 도와주었던 신필호 박사의 집을 떠올렸다. 정화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집을 찾아 들어간다. 젊은 안주인이 나왔다.

"저는 정화라고 합니다. 어른들 안녕하시지요?"
"누구시더라?"

젊은 여인에게서 나온 말은 정화를 당혹시켰다. 그녀는 민망하고 무안하고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얼른 뒤돌아선다. 젊은 여인은 여전히 맹한 얼굴로 정화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당신의 시숙부 두 분 중 한 분(신규식)은 독립운동을 하다 얼마 전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신건식)은 지금도 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몸단장 예쁘게 하고 나 몰라라 하고 있군요.'

길을 걸으며 정화는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과연 독립운동이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가? 나는 왜 상해로 갔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독립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남편을 비롯한 상해의 인사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다. 그녀는 그들과 국내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만약 국내에 있던 어떤 이가 상해에 가서 독립지사를 찾아가 내가 '아무개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을 때, '누구시더라?' 이런 말을 할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비정한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사람들이므로 그런 비정한 말을 할 리가 결코 없었다.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를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정화의 회고록 <장강일기> 서문 중에서)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과 석오 이동녕에 대한 회고

"백범은 내무부 경무국장을 지냈다. 그는 임시정부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 또한 백범은 테러 투쟁에 관심이 높았다. 그 분은 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좀처럼 돈을 쓰지 않는다. 백범에게 돈이 가면 나오는 법이 결코 없다는 말을 어른들은 우스개로 한다. 그러면서도 일부 생활이 나은 분들은 가끔씩 백범에게 돈을 준다.

백범은 워낙 체격이 커서 식사 양이 많은 편이다. 어쩌다 자금이라도 생기면 그는 임정의 살림 비용에 보태거나 책임 맡고 있는 애국단의 무기 비용에 쓰느라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먹고 사는 게 어려워 보인다. 그는 이따금 우리 집에 들른다. 주로 오후 늦게 오는 경우가 많았다.

"저, 밥 좀 주실 수 있나요?"

백범은 어려운 사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아녀자에게는 언제나 친절하면서도 격의가 없이 대했다. 나는 급히 반찬거리를 사다가 밥을 지어 드리곤 했다.

얼마 전 남경에 다녀오신 이시영 선생님께서 나를 불렀다. 그 분은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시기도 했는데, 늘 헝겊신만 신고 다니는 내가 측은했던지 놀랍게도 구두 한 켤레를 사다 주셨다."                                                                            - <장강일기> 요약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의 최후와 초대 부통령 이시영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임시정부는 가흥을 거쳐 장사로 옮겨 간다. 이어서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임시정부는 하염없는 유랑을 겪게 되었다. 장사에서 광주 그리고 다시 불산, 유주, 귀양, 기강 등을 거치게 된다. 이 길고긴 피난의 여정에 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기강에서 임시정부 주석이던 석오장 이동녕의 임종을 지켜본 이도 정화였다.

1940년 3월, 임시정부의 주석 석오 이동녕은 사천성 기강에 있는 임시정부 건물 2층 침소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 석오는 임정의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정화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사천성 남쪽의 3월 기후는 한국의 5월처럼 화창했다. 정화 일행은 중경으로 가는 임정요원들을 버스정류장에서 전송했다. 일행이 떠난 후 집으로 발길을 돌렸을 때 이동녕이 말했다.

"오늘은 날이 참 좋네. 산 구경을 하다가 저녁은 밖에서 먹지."

선생은 정화에게 저녁 밥 걱정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갑자기 선생이 심상치 않은 상태로 변한 것이다.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장과 국무총리와 주석 직을 연임하며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지켰다. 그는 독립진영의 분열에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 산하의 세 개 정당이라도 통합해 달라는 유언을 했다.

"백범, 백범이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이루어다오."

석오의 유언을 받들어 이동녕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그리고 홍진의 조선혁명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통합되었다. 당은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있던 백범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임한다. 아울러 백범은 석오가 맡고 있던 임시정부의 주석 직을 계승하게 된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피난지는 중경이었다. 정화는 8․15를 중경 인근의 토교에서 맞이했다. 정화는 임정 요인들이 중경을 떠난 뒤에도 토교에 남아 12월 한 달 동안 뒤처리를 마치고, 이듬해 1월 하순 상해로 갔다. 그 뒤 5월, 정화 일행은 상해 부두에서 미군이 제공한 화물 수송선 LST를 타게 된다.

짐 검사를 하던 한 미군이 소리를 질렀다.

"임시정부 것들은 모두가 다 거지야. 짐 검사 필요 없어."

부산에 도착한 정화 일행을 맨 먼저 맞이한 것은 미군이 무차별로 뿌리는 살충제 DDT였다. 정화는 화물차를 타고 3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이 압수한 정화 집안의 가산을 이유 없이 반환해 주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정화의 삶은 임시정부 시절보다 오히려 더 곤궁해졌다.

백범은 단정 수립에 반대하다가 피살되었다. 이시영은 백범과 달리 이승만 정부에 협조했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이시영이 어느 날 정화를 불러 만난다. 상해에서 예쁜 구두를 선물한 적이 있는 이시영은 이번에는 정화에게 정부 여성 몫으로 할당된 감찰위원 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완곡히 거절했다. 이시영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식으로 정화를 추천했지만 그녀는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태그:#정정화, #장강일기, #임시정부, #이시영,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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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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