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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이후 히로시마 상공에 솟은 불기둥(사진은 양혜윤 저 '한 권으로 읽는 일본사'에서 발췌)
▲ 히로시마 원자폭탄 원폭 이후 히로시마 상공에 솟은 불기둥(사진은 양혜윤 저 '한 권으로 읽는 일본사'에서 발췌)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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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38년, 독일이 우라늄 연쇄반응에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개발에 한걸음 다가섰다. 이에, 독일과 전투를 벌이던 영국이 크게 당황했다.

영국은 독일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원자폭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고 원자폭탄 제조를 진지하게 검토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원자폭탄 제조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자칫, 영국의 원자폭탄 제조 공장이 독일의 폭격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대신 미국 정부에게 원자폭탄 제조에 나설 것을 제안하며, 자신들이 수집한 연구자료들을 미국 정부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를 설득해 미국정부로 하여금 원자폭탄 제조에 나서게 하였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 일본군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여 미국을 자극했다.

그렇게 해서 1942년에 원자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오펜하이머의 지휘 아래 3000여 명의 과학자들이 모여 '맨해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1944년에는 로스앨러모스에 공장을 짓고 원자폭탄 제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1944년에 이르러서는 독일군과 일본군은 연합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잠수함과 공습기가 일본 본토 가까이 접근하면서 일본군을 위협했고, 1944년 7월에는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사이판이 미군에 함락되었다.

1945년 2월 유황도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한 달 넘는 전투 끝에 1945년 3월 25일에 미군에 섬이 함락되었다. 게다가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시되고 있었다.

1945년 7월, 미국의 투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소련의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 등이 독일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회담을 열었다. 3국 정상은 패전국 독일의 처리 문제 및  일본과의 전쟁 등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회의에서 미국은 영국은 물론이고 소련과도 일본에 대한 '신무기' 사용 계획을 논의하였고, 7월 26일에는 일본에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하지만 일본은 "눈여겨볼 가치가 없다"며 거절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군부는 종전협상에서 천황제 유지와 일본 본토 사수 등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연합군과의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려 했다.

미국은 7월 16일에 이미 뉴멕시코주 아라모고드 사막에서 핵무기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상태였던 지라, 일본 폭격에 대해 장소와 시기를 결정하는 일만 남겨놓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저녁 8시 15분, 서태평양 테니안 기지에서 출발한 'B-29 에노라게이'호는 히로시마 상공 9600미터 지점에서 '리틀 보이'라는 이름의 포탄을 투하했다. 그리고 정확히 43초 뒤 히로시마에선 거대한 폭발이 있어났고, 섭씨 수백만도의 불공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초고온 열선과 거대한 방사선이 그 뒤를 이었고, 큰 폭풍우가 히로시마 도시를 한꺼번에 집어 삼켰다.

히로시마에 있던 건물 대부분이 붕괴되었고,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35만 명의 주민들은 모두 방사능에 노출되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폭발로 사망자가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며칠 뒤인 8월 9일엔 나가사키에서도 똑 같은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미국 국방부가 미국 태평양 전략공군 사령관이었던 칼 스파츠에 보낸 지시서에 따르면, 미국은 8월 3일 이후 육안 폭격이 가능한 날에 히로시마, 고쿠라, 니이가타, 나가사키 등에 준비가 되는 대로 포탄을 투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당시 미국이 히로시마를 최초 폭격 목표로 삼은 이유를 도시의 크기 및 지형조건과 군사도시로서의 기능적 측면에서 찾는다.

히로시마는 삼각주에 세워진 도시이면서도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여서 원폭의 파괴력을 실험하기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청일 전쟁이후 일본의 최고사령부가 주둔하는 군사도시였고, 태평양 전쟁에서는 모든 병력의 출병장소였기 때문에 히로시마에는 수많은 군수공장과 군사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공격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패망을 맞았다. 전후 히로시마시는 "평화도시 추진은 일본국가의 이름으로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평화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법률제정에 나섰다. 그리고 1949년 8월6일 일본 최초의 특별법인 "히로시마 평화기념 도시건설 법"이 제정되어 새로운 히로시마를 만들어 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중앙에 위치해 있다.(사진은 권혁건 저 '테마가 있는 일본기행'에서 발췌)
▲ 원폭 사망자 위령비 히로시마 평화공원 중앙에 위치해 있다.(사진은 권혁건 저 '테마가 있는 일본기행'에서 발췌)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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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률에 따라 일본정부는 히로시마를 인류평화를 기원하는 도시로 지정하였고, 피폭지역 바로 아래에 평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지정하여 평화기념공원을 만들었다. 평화기념공원 내부에는 '원폭 돔', '원폭 사망자 위령비', '평화기념 자료관', '기원의 샘' 등을 세워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평화의 명소로 키워가고 있다.

오늘날 히로시마는 세계최초의 핵무기 폭격이 남긴 상처를 증언하며 '인류는 더 이상 핵무기와 공존할 수 없다'는 준엄한 교훈을 전한다. 지금도 국내외 수많은 관광객들이 히로시마를 찾아 핵무기 없는 세상, 인류의 공영과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히로시마가 평화도시인 것은 단순히 인류 최초로 핵무기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군사주의와, 무력으로 자국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오만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군사도시 히로시마의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제주도에 군사기지를 지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히로시마의 역사는 그것이 얼마나 헛된 망상인지 잘 보여준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갈등을 보면서 보내는 히로시마 원폭피해 66주기가 불편한 이유다.


태그:#히로시마 원폭, #강정마을, #해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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