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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보, 뭘 그렇게 보고 있어?"

"…."

 

밤 9시가 넘어 딸과 밥 먹고 들어 온 아내는 대답이 없다. 대체 뭘 보는 것일까? 표정이 어둡다. 좋지 않은 기분 건드릴 필요까지 없다. 딸은 군말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EBS 교육방송을 보기 위해. 이럴 때 중학교 1학년 딸이 대견하다.

 

"우리 딸, 알아서 척척 하네!"

 

'칭찬은 고래도 웃게 한다'고 했다. 아빠의 칭찬에 반응 없기는 딸도 마찬가지. 갑자기 아내가 몰두하며 보던 내용물을 편지봉투에 넣더니 내게 내밀었다.

 

"뭔데, 그래?"

 

말과 동시에 편지봉투를 살폈다. 딸의 중학교에서 보낸 봉투였다. 1학년 1학기 통신표가 분명했다. 내용물을 꺼냈다. 역시나 성적통지표였다. 한쪽에는 출석상황, 가정통신문 등이 있었다. 그리고 학부모에게 보낸 담임선생님의 가정통신문이 쓰여 있었다.

 

"방학 동안 학부모님께서 자녀의 부족한 과목에 대한 보충학습과 독서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방학 중에 개인적으로 지정된 봉사활동 기관에 가서 활동을 한 후, 확인서를 발급받아 개학날 가져올 수 있게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른 쪽을 살폈다. 다양한 점수가 성취도와 순위까지 적혀 있었다. 기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애써 참았다. 그 순간 전화가 왔다. 술 한 잔 하자는 거였다. 잔소리를 피하려면 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결국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나가면서 기어이 딸에게 격하게 한 소리 내뱉었다.

 

"성적이 이게 뭐야? 알아서 공부하고 있어. 이제 모둠활동은 그만 둬."

 

딸은 찍소리 없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있다. 분위기를 아는 탓이다. 어제 아침부터 딸은 컴퓨터 앞에 앉아 EBS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했다. 정액요금 초과로 자기 전화기를 사용할 수 없단다. 딸이 친구들에게 보낸 문자를 살폈다.

 

 

"나 오늘 그린나래 못 가뮤 ㅠㅠ. 성적표 날라옴 ㅜ."

 

성적표 때문에 동아리 활동을 못함을 친구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머리가 띵했다. 한동안 멍 때리다 생각에 잠겼다. 반성이 됐다. 성적표가 뭐라고 동아리 활동을 못하게 할까? 그건 아니었다. 딸은 친구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통해 '공부 잘 하는 딸', '공부 못 하는 딸'이 아닌 '한 인간인 딸'로 봐줄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딸에게 말했다.

 

"딸, 그린나래 갔다 와라."

 

순간 웃음 짓던 딸은 빠르게 웃음을 감추었다. 딸은 옷을 갈아입으면서 또 문자를 날렸다.

 

"○○야, 아빠가 가도 된데!!!!!!"

 

 

전화기가 먹통 돼, 본의 아니게 알게 된 딸의 감정 변화였다. 그렇게 기뻤을까? 흔히들 말한다.

 

"자녀 교육 시 부모가 마음을 비워야 한다!"

 

쉽지 않다. 삶에 있어 '공부가 다가 아니'라지만 학생에게 공부는 아주 중요한 필수조건이니까.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딸과 아빠의 관계는 소원할 수밖에 없다. 공부와 딸 중 어느 걸 선택해야 할까? 딸은 친구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에서 공부보다 자신을 선택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미안하다, 딸아!"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태그:#성적표, #문자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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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힐 수 있는 우리네 세상살이의 소소한 이야기와 목소리를 통해 삶의 향기와 방향을 찾았으면... 현재 소셜 디자이너 대표 및 프리랜서로 자유롭고 아름다운 '삶 여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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