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하사탕>의 압권은 영호가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장면입니다. 폭력과 광기의 역사가 만들어낸 그에게 남은 거라곤 파멸의 시간뿐. 피폐해진 삶의 끝자락에서 영호가 마지막 안식처로 선택했던 곳은 순결한 영혼이었습니다. 파시즘의 시대였을지언정 '순결한 영혼'은 그의 가슴 한 켠에 순백의 여백처럼 오도카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짓밟히고 뒤틀리며 갈가리 짓이겨졌던 80년대의 비극을 상징합니다.

영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나잇값 못하고 망가지는 것만큼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하물며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일단 평가절하는 한국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싯적에 '꼰대'들 뒤에서 쑤군거리던 청춘에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이고 어느새 '꼰대가' 되어버린 자신을 대면하는 것 또한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월리엄 워즈워스의 시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를 목청껏 읊어봐도 한 번 흘러간 청춘은 되돌아오지 않는 법, 빛바랜 희망마냥 꼰대들의 일상은 누추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 꼰대들이 '가장 찬란한 순간, 우리는 하나였다'며 '청춘의 빛'을 복기하고 나섰습니다. 영호와 같이 1980년대를 겪어 왔지만 어둡고 무거운 상처투성이의 꼰대들이 아닙니다. 쉼 없는 수다와 잔소리로 연방 꼰대질을 해대는 아줌마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항상 돌아가고 싶은 바로 그때이기를 염원하는 엄마들의 희망 이야기, 영화 <써니>입니다.

 학교 미술실에서 보니 엠의 써니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써니 멤버들. 원색의 옷차림만큼 소녀들의 꿈과 희망은 무지개 빛깔처럼 찬란하다.

학교 미술실에서 보니 엠의 써니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써니 멤버들. 원색의 옷차림만큼 소녀들의 꿈과 희망은 무지개 빛깔처럼 찬란하다. ⓒ (주)토일렛 픽쳐스, (주)알로하 픽쳐스


여느 전업주부처럼 엄마와 아내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미(유호정)는 친정 엄마의 병문안을 들렀다 여고시절 '절친' 춘화(진희경)를 만납니다. 말기 암 환자로 두 달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녀는 나미에게 죽기 전에 보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며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의리짱' 춘화와 어리바리 나미부터 쌍꺼풀녀 장미, 욕쟁이 진희, 문학소녀 금옥, 4차원 복희, 차도녀 수지 등 '써니' 멤버들입니다.

나미가 친구들을 찾기 위해 진덕여고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영화는 1986년 여고 2학년 교실로 카메라를 돌립니다. 꼬막의 고장 벌교 출신의 나미가 서울로 전학 온 첫날, 긴장하면 벌교 사투리가 툭,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본드 걸 상미가 집적대며 놀립니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의 춘화가 일순간에 잠재우고 나미는 자연스레 춘화네 아이들과 어울립니다.

나미가 합류하고 모임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친구들은 MBC FM '밤의 디스크쇼'에 사연을 보내고, DJ 이종환은 찬란하고 눈부시다는 뜻의 '써니'가 어떻겠느냐고 제안합니다.

영화는 독일의 팝 그룹 보니 엠의 히트곡 '써니'가 OST처럼 경쾌하게 흐르는 가운데 한때 껌 좀 씹고 침 좀 뱉었던 언니들의 우정과 사랑을 노래합니다. 여느 80년대 영화와 달리 <써니>의 80년대는 극복해야 할 대상도, 투쟁정신의 계승도, 살아남은 자의 아픔도 아닙니다.

그네들의 알록달록한 패션만큼이나 아직 영글지 않은 꿈과 희망이 쉬지 않고 조잘대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 돈에 속고 사랑에 치인 40대의 그네들이 미숙했지만 눈부시게 푸르렀던 10대의 희망을 되짚으며, 다 커버린 자신들의 희망에 다시금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에 이 영화의 미덕이 있습니다. 

"나도 역사가 있고 내 인생의 주인공이었거든"

모교 담임선생님을 통해 나미는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장미를 찾습니다. 영업실적은 최하위지만 성형수술에 대한 미련은 여전한 그녀는 춘화를 끌어안고 한바탕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둘은 나머지 써니들을 찾기 위해 '원하면 행한다' 흥신소에 의뢰합니다. 이윽고 우아한 사모님으로 변신했지만 흥분만 하면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는 진희, 시어머니에게 온갖 구박을 받으며 달동네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금옥이, 하나뿐인 딸은 시설에 맡기고 변두리 술집에서 접대부로 웃음을 파는 복희와 차례로 해후합니다.

 나미, 춘화, 진희, 장미가 춘화의 병실에 누워 진희 남편의 외도를 바나나에 빗대며 바람피우는 바나나는 싹둑 잘라내야 한다고 성토하며 깔깔거리고 있다.

나미, 춘화, 진희, 장미가 춘화의 병실에 누워 진희 남편의 외도를 바나나에 빗대며 바람피우는 바나나는 싹둑 잘라내야 한다고 성토하며 깔깔거리고 있다. ⓒ (주)토일렛 픽쳐스, (주)알로하 픽쳐스


영화는 나미가 '써니' 멤버들과 한 명씩 만나는 과정을 통해 단절된 줄로만 알았던 1980년대의 푸른 틈새로 비집고 들어갑니다. 시종일관 과거와 현재가 숨 가쁘게 교차 편집되지만 거칠지 않고 작위적이지 않습니다. 등굣길에 모교를 찾은 나미가 어린 나미에게 떠밀리면서 25년 전으로 되돌아가거나, 현재의 나미가 얼굴에 멍이 든 딸을 하굣길에 뒤쫓다가 장미의 오빠 친구인 잘생긴 준호를 가슴에 품고 뒤쫓는 어린 나미로 자연스럽게 플래시백 합니다.

그 중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짝사랑 준호로 인해 상처받은 어린 나미가 벤치에 앉아 흐느끼고 있을 때, 현재의 나미가 다가가 따듯하게 포옹하며 위로하는 장면입니다. 어린 나미와 현재의 나미가 하나가 되는 이 장면은 단순한 시각적 완성도를 넘어 관객들에게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아저씨가 되어버린 준호를 찾아 어린 나미가 스케치했던 그의 모습을 전해 준 뒤 나미는 병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춘화의 두 손을 마주 잡고 나지막이 말합니다.

"오랫동안 누구 엄마와 아내로만 살았거든. 그런데 나도 역사가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적어도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았어."

영화가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에 한껏 기댄 노스탤지어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잘 뜯어보면 80년대 문화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함의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87년 6월 항쟁을 앞둔 당시 서울 거리 모습과 음악과 패션 등은 덤입니다. 종로 옛 피카디리 극장, 금성 가전매장, 의상실 등에서 마이마이 카세트, LP판과 같은 소품은 물론 음악다방, 골목길, 학교 교실, 매점, 방송실에 이르기까지 80년대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여기에 교복 자율화 세대답게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팝송 써니 등 흘러간 노래에 몸을 흔드는 그네들로 말미암아 스크린은 추억의 감흥에 흠뻑 젖습니다. 그렇게 영화는 열여덟 소녀의 톡톡 튀는 감수성을 코믹하게 되살리면서 흑과 백의 색상만이 지배했던 시대에서 원색의 선명한 색감이 거리를 활보하는 시대로의 이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88만 원 세대 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엄마들의 이야기

불온한 시대를 읽는 영화의 독법 역시 '써니스럽'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짓는다는 여고생들이 욕과 주먹질에 능하다는 것만큼 불온한 기운을 내포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웃학교 소녀시대와 벌이던 욕대결에서 진희가 밀리자 나미가 순도 100% 벌교 욕의 진수를 보여주며 7공주 세계에 화려하게 등판하지만 그것은 서곡에 불과합니다. 나미에겐 현란한 육두문자를 전수해 준 할머니(김영옥)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에게 "언제까지 더러운 정권 밑에서 하수인 노릇할 거냐"며 대들던 오빠 종기가 노동운동을 하다 수배를 당합니다. 할머니는 종기를 잡으러 온 경찰들에게 "야, 이 씨부럴 새끼들아. 집으로 기 들어 와"라며 욕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당당하게 보여줍니다. 더러운 시대를 향한 할머니의 '니미럴'은 '욕지기 종결자'로서 손색이 없었던 셈입니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종로 피카다리 극장 앞에서 나미의 복수에 나선 써니 멤버들이 전경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종로 피카다리 극장 앞에서 나미의 복수에 나선 써니 멤버들이 전경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다. ⓒ 대학(주)토일렛 픽쳐스, (주)알로하 픽쳐스


욕대결에서 무참히 패배한 뒤 '핑클'로 개명한 소녀시대는 나미에게 보복을 합니다. '써니'는 "우리 중 한 명을 건드리는 거는 우리 전체를 건드는 거"라는 철칙에 따라 핑클과 '맞짱'을 뜹니다.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하는 대학생과 전경들 사이에서 오스트리아 팝 그룹 조이의 <터치 바이 터치>가 흐르는 가운데 소녀들이 벌이는 격투장면은 제5공화국의 파시즘을 비틀어 대는 백미입니다. 

나미가 무심코 휘두른 방패에 사과탄이 자신을 쏜 전경들 한복판으로 날아가 터지거나, 쓰러진 학생들을 두들겨 패며 마구잡이로 연행하던 전경들이 '써니' 멤버들까지 잡아가려 하자 춘화가 실력발휘 해 친구들을 구해내는 장면은 1980년대 그 폭력과 공포가 지배했던 암울한 시대상을 슬랩스틱 코미디로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장면은 소년들의 청춘을 요약한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현수를 통해 교련선생과 선도부로 상징되는 제3공화국의 폭력과 위선을 고발하는 것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그리고 수지와 본드 걸 상미의 싸움 끝에 수지가 음독자살을 시도하면서 '써니'가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나 현수가 학교를 평정했음에도 파시즘 교실의 이데아를 뒤로하고 학교를 떠나는 것도 일맥상통합니다.

영화는 행방이 묘연했던 수지까지 '써니'의 멤버들이 25년 만에 춘화의 영결식장에 모두 모이면서 끝납니다. "야, 이년들아 다들 왔니"로 시작하는 춘화의 유언장 내용이 엔딩 크레딧에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묘사되면서 '써니' 멤버들의 10년, 20년 뒤의 이야기들이 한 컷 한 컷 펼쳐지니 진득하게 기다려볼만 합니다.

저마다 살아온 인생의 굴곡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40대의 여자들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을 맞이하는 모습은 어떤 색깔일까요? 춘화가 죽기 전 나미에게 건네준 비디오테이프는 이를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써니'의 멤버들이 미래의 자신에게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나미의 눈물은 나에게도 청춘의 서사가 있었다는 깨달음이자, 신산한 일상을 살아왔던 '써니'와 모든 중년 여성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손짓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취업을 위해 학벌, 학점, 영어, 자격증, 해외연수, 다이어트, 성형 등 '스펙 7종 세트'를 갖춰야 하는 기막힌 현실 앞에 서 있는 이 땅의 모든 딸에게 보내는 엄마들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고사하고 세상에 맞춰 살아가는 것만도 벅차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88만 원 세대의 딸들이지만, 그 딸들과 함께 상상하고 함께 성찰하며 역사와 인생의 서사를 기록해 보고 싶은 엄마들의 사랑 만들기입니다. 

봄날, 딸과 함께 극장에 나란히 앉아 깔깔거리며 웃다가도 눈물지으며 들려주고 싶은 엄마들의 이야기, <써니>입니다.

써니 여고시절 88만원 세대 박하사탕 말죽거리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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