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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행은 여유가 좀 있나요?"

"그럼요, 천천히 다녀옵시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에 올랐다. 지난 23일(토) 산악 동아리 '참메' 회원 다섯 명이 만나 안영 나들목에서 경남 함양 황석산 초입까지 한 시간 반을 달렸다. 멀리 황석산 정상을 바라보며 배낭을 멨다. 이번에는 천천히 걷기로 의견을 모았다. 옆도 보고, 뒤도 보고, 하늘도 보며 느릿느릿 요모조모 가슴에 담기로 했다.

 

대숲을 지나 능선에 오르기까지 흰꽃, 노란꽃, 고사리가 눈에 띈다. 흰꽃은 개별꽃, 노란꽃은 노랑제비꽃이라 한다. 그동안 어리석었다. 수많은 야생화나 나무, 조류를 보고도 이름을 몰라 지나치던 버릇을 탓한다. 사진만 있다면 인터넷 공간에서 얼마든지 이름을 알아볼 수 있는데, 왜 지나치고 말았을까?

 

황석산 정상이 가까이 다가선다. 로봇 사자 머리처럼 생긴 바위산이다. 저 암벽을 타고 정상에 오르는 걸까? 정상을 앞두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권춘 회원이 홀로 정상 도전에 나선다. 훤칠한 키에 정상에 선 모습을 망원렌즈로 당겨본다. 호탕한 기개가 느껴져 좋다. 곧장 내려와 점심 도시락을 푼다. 보온 밥통에 담긴 닭볶음탕을 내놓는다. 다정스런 부부애가 막걸리 안주다.

 

이 집 저 집 그 집에서 나온 음식이 풍성하다. 햇살과 바람도 자연의 식탁에 적당히 차려져 있다. 옹기종기 도란도란 적나라한 이야기들이 꽃을 피운다. 사방이 열려 있는 산자락이어서 더욱 좋다.

 

박종근 회원을 따라 나도 정상에 오르기로 했다. 때론 밧줄에 의지해야 한다. 손아귀에 힘이 있다. 두 다리도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손이나 발 어느 하나에 오차가 생기면 위험천만한 상황이 비일비재한 게 산이다. 내가 나를 버티게 하고, 산이 나를 안아줘서 고맙다.

 

정상에 올라 거센 바람을 맞으며 치기어린 만세 동작을 해본다. 순간 내 정든 모자가 바람에 날려 까마귀처럼 휙 날아간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본 회원들이 묘한 쾌감에 젖었단다. 내 모자여, 날리고 날려 누군가의 눈에 띄어 외롭지 않기를!

 

우리는 거망산 쪽으로 이동하여 지장골을 지나 용추폭포로 하산하기로 했다. 일행 중 이것저것 조망하며 사진을 찍느라 느림보 거북이가 된 나를 송치수 회원과 강정옥 회원이 챙겨준다. 잘 따를 테니 먼저 가시라 했다. 뒤를 따르다 보니 오솔길 요소요소에 내 이름과 화살표가 눈에 띈다. 갈래 길에서 망설일 필요 없도록 앞선 이들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 덕택에 나는 잘 걸었다.

 

용추 폭포로 내려오는 길, 계곡의 물줄기가 합수하여 봄 노래를 합창한다. 작은 벼랑 아래로 지장 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흘러흘러 강을 따라 바다로 갈 것이다. 막혀서 고이거나 삽질로 불어난 흙탕물에 아프지 않기를!

 

신록을 향해 치닫는 잎들이 햇살과 만나 경이롭다. 저토록 여린 가지들이 매서운 겨울을 견디고 살아 있었다니! 한겨울 내내 분주했을 물관 체관의 거룩함이란!

 

거망산 용추폭포, 하산길 마지막 명소다. 물이 많아 소리도 웅장하다. 시인 김수영은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며 폭포의 선구자적 행위에 찬사를 보낸다. 변함없는 낙하! 그래서 시인 기형도는 폭포를 '산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으로 보고, 벼랑의 직립에 질주하는 전율을 느낀다고 했다. 용추폭포는 선구자의 전율을 느끼게 한다.

 

내 능력보다 긴 산행을 잡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좀 짧아도 여유 있게 천천히 느긋하게 이 한 몸 산에 맡겨둬도 좋다. 황석산, 거망산, 지장골, 용추폭포! 오랫동안 기억될 거북이 산행! 사진으로 찍은 것은 허상일 터! 실상은 눈에 가슴에 곱게 담아뒀다.


태그:#황석산, #거망산, #용추폭포, #대전참메, #참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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