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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3월 12일자. 불타는 건물과 모든 게 잠겨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아 보이는 배경, 그리고 '일본 침몰' 타이틀. 이보다 더 선정적일 수 있을까.
 <중앙일보> 3월 12일자. 불타는 건물과 모든 게 잠겨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아 보이는 배경, 그리고 '일본 침몰' 타이틀. 이보다 더 선정적일 수 있을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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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아직 사람이 사나? 미국 사람들은 이미 다 철수했다는데... 머지않아 나라 전체가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데."
"방사능 비 때문에 한국도 위험하다던데. 그러니 이제 일본은 더 이상 가서도 안 되는 곳이 되었고 일본인을 만나는 것도, 일본 물품을 이용하는 것도 좀 두렵다."
"런던 시내 일본 식당에도 손님이 줄어 반값 할인행사를 한다는데 앞으로 일본 음식 아무래도 안 먹는 게 좋겠죠?"
"이번 방학 때 한국에 들어가야 하나 고민이에요. 아무래도 방사능 때문에 위험하다고 부모님께서 말리시네요. 전 서울에 계시는 저희 식구들이 많이 걱정이 되고요."

최근 런던에서 만난 한국 교민과 유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과 이웃 한국의 위험천만한 상황에 대해 기자에게 묻는다. 일본 재난에 관한 뉴스의 중심이 실제적 재난 상황에 대한 보도에서 너무도 빨리, 그리고 급격히 원전 사고와 관련된 불확실한 '미래형 추측 보도'로 옮겨가 각 언론마다 경쟁적으로 '올인'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영국 언론 보도와 기자가 들은 일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비록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힘든 여건이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도쿄 시부야의 밤거리에는 이전과 같이 퇴근 후 한잔하며 지친 일상의 피로를 달래려는 회사원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도쿄의 코리아타운 격인 신오쿠보의 한식당에는 이번에 거액을 희사한 일로 더욱 추앙받는 '욘사마' 배용준을 칭송하는 일본 중년 여성들의 식사 모임이 이전과 다름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도쿄의 코리아타운 격인 신오쿠보 거리를 찾고 있다.
 일본인들이 도쿄의 코리아타운 격인 신오쿠보 거리를 찾고 있다.
ⓒ 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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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아직 사람이 사나?"

최근 들어 부쩍 많아진 아프리카나 아랍권, 동유럽 등지의 민족·종교·이념 분쟁에서 긴 침묵과 신중한 외교적 수사를 구사해왔던 미국, 영국 중심의 '다국적 연합'이 세계 8위 원유 매장량의 리비아에선 오랜만에 신속·정확하고 일치단결하는 모습으로 전격 출동했다.

이들은 흡사 우리가 예전 TV에서 보았던 지구 방위대 '독수리 오형제'의 멋진 출동장면이 주었던 감동(?)을 3D 멀티 플랫폼 시대에 재연하려 애쓰는 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 정체불명 '독수리 오형제'가 왜 전격 출동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의문이 더해지고 있다.

대처 정부 시절의 '포클랜드 전쟁(말비나스 전쟁)'과 같이 영토를 둘러싼 국가 간 교전이 아니기에 더욱 애매모호한 영국 언론의 관점에 많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다국적 런던 거주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BBC를 아무리 봐도 도대체 누가, 어떤 사람들이 반군(rebells)인지 모르겠다."
"반군들의 리더는 누구인가? 아무리 BBC 뉴스를 열심히 봐도 찾을 수가 없다."
"만약 반군들의 리더가 없다면 NATO가 보호하려 한다는 시민들은 도대체 누구이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자는 또 누구인가?"
"BBC 뉴스는 전쟁에 대한 묘사가 너무 일방적이고 친영국정부적인 것 같다. 심지어 이라크 전쟁 때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를 언론 보도에서 찾을 수 없다. 트리폴리 시민들은 인터뷰를 거부하는 건가, 아니면 취재를 하지 않는 건가?"

그러나 이 부분을 한국 언론 보도를 통해 살펴보면 논점은 아주 간단해 보인다. 즉 '너무도 정당한 전쟁에, 너무도 당연한 군사 행동, 너무 나쁜 독재자 카다피'라는 확실한(?) 팩트가 있고 여기에 이견을 제시하는 것마저 부담스러워 보인다.

영국의 진보적 일간지 <가디언>조차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이 '영웅적' 반군을 격려하기 위해 벵가지를 방문한 이야기를 톱기사로 올렸다.
 영국의 진보적 일간지 <가디언>조차 존 매케인 미국 상원의원이 '영웅적' 반군을 격려하기 위해 벵가지를 방문한 이야기를 톱기사로 올렸다.
ⓒ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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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이번 군사행동을 가능하게 한 3월 17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73호(핵심은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 설정) 관련 회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회의에 참여한 15개 안보리 회원국 대표 전원이 열변을 토하며 카다피의 비인간적 폭정을 성토하고, 이러한 정당한(?) 군사행동에 열렬히 동의했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강타자'들, 즉 독일, 인도, 중국, 러시아, 브라질은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기권)는 사실을 알면 좀 놀라울 수도 있겠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외에 가봉, 나이지리아, 남아공, 레바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콜롬비아 그리고 포르투갈이 찬성했다.)

오래전부터 서방과 불편한 관계였던 카다피는 작년에도 석유 강국 리비아의 수장으로서 원유 거래 때 달러화와 유로화만 사용하는 것에 반기를 들고 아랍 20개국의 자체적 통화수단을 만들 것을 주창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러한 '오래된 눈엣가시' 카다피를 응징할 것을 결의한 '독수리 오형제'들의 헬멧은 결국 비열한 '석유 탐욕 동맹'의 브랜드 마크가 아닐까 싶다.

BBC마저 균형 잡힌 보도를 하는 데 한계 노출

그렇다면,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로 정평이 난 BBC는 어땠는가? BBC 월드뉴스는 일본 재난의 경우 현지인들의 일상, 피해 지역 주민들에 대한 외상적 치료 문제 등과 같은 인간 중심적 이슈를 계속 중점적으로 다룬다. 또한 원전 사고 소식에서도 여러 견해를 고루 대변하는 과학자 및 전문가를 인터뷰해 비교적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보도를 하려는 노력을 보여줬다.

또한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반군의 핵심 지역인 벵가지에도 특파원을 파견하여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리포트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불편부당성과 진실성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있는 BBC 월드뉴스라 하더라도 이 같은 위험상황에서 공정성을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번 일본 재난 보도의 경우, BBC도 비판을 비켜가지 못했다. 우선 지진과 쓰나미라는 자연재해와 관련된 인간 중심 리포트의 비중이 원전 사고 리포트에 비해 갈수록 부족해진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잠재적 파급력이 훨씬 큰 원전 사고와 관련해서 '불확실성'을 중심에 둔 '공포주의적 생명 정치' 담론(여기서 '생명 정치'란 권력이 국민의 안전, 건강, 공중보건을 담보로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이 더 근본적 문제인 원전 개발과 에너지 개발 논란을 일시에 제압해 버렸다는 점이다.

영국에는 언론 보도에 대한 과학적 자문을 위해 설립된 SMC(Social Media Centre)라는 민간 독립기관이 있다. 이곳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은 사건이 발생하면 신속히 과학적 브리핑·분석·예측작업을 진행하므로 영국 언론에서도 가장 신뢰하는 정보 소스이다.

하지만 이번에 BBC 내부 블로그에도 소개된 것처럼, SMC 소속 원전 관련 과학자들은 기존의 후쿠시마식 원전 개발 방식이 아닌 자신들만의 새 방식으로 원전을 개발할 것을 연구하는 이들이었다. 즉 크게 보면 SMC 구성원 전원이 원전 개발 옹호론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SMC 과학자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 즉 후쿠시마와 같은 구식 원전의 위험성을 과대포장하면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방식의 원전을 전면 도입할 것을 옹호하는 접근 방식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BBC 보도 역시 이런 사실을 감안하지 못했고, 그 결과 여러 견해를 균형 있게 보도하지는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리비아 전쟁 보도 역시 마찬가지로 영국이 참여하는 군사작전이라는 점에서 애국주의와 이상적 저널리즘 사이의 충돌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정작 뉴스의 핵심인 리비아 주민들의 생생한 견해에 대한 보도는 거의 찾을 수가 없고 대부분이 정치 지도자, 군사 관계자, 전쟁 상황에 대한 리포트라는 비판이 있다.

3월 22일 BBC '컬리지 오브 저널리즘' 블로그에 올라온 SMC 디렉터의 글. 원전 관련 보도에서 SMC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드러난 영국 언론의 편향성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3월 22일 BBC '컬리지 오브 저널리즘' 블로그에 올라온 SMC 디렉터의 글. 원전 관련 보도에서 SMC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드러난 영국 언론의 편향성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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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C 홈페이지.
 SMC 홈페이지.
ⓒ S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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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보도 자문한 과학자들, 알고 보니 원전 옹호론자들

이와 관련해서 분쟁·갈등 지역 보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표적 전선기자인 BBC뉴스 유럽 에디터 가빈 휴잇(Gavin Hewitt)을 20일(현지 시각) 만나보았다.

휴잇은 다양한 위험 상황에서 뉴스 보도가 공정성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봤다. 휴잇은 "전장에서 특정한 군과 동행 취재할 때의 힘든 점은 기자가 자신의 안전을 그 부대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라며 "그로 인해 그 부대와 기자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형성된다"고 토로했다.

또한 휴잇은 "정확한 사실을 보도하는 것은 직업정신을 가진 기자로서 자존심이기도 하지만, 아군의 작전에 방해가 되는 보도를 하고 싶지는 않다"며 "저널리스트들 중에도 자국 군인을 편들어야 한다고 믿고 주장하는 이가 가장 많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휴잇은 "현실적으로 공정함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그 노력을 포기하면 저널리즘의 가치도 없어진다"면서 "소셜 미디어 등 여러 방식으로 시청자들이 감시하고 참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태의 본질을 못 보게 하는 언론 보도

이번 일본의 자연재난과 원전 사태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하는 것은 고위험-고효율의 원전 개발을 통한 에너지 획득에 대한 근원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미국, 영국, 프랑스의 '리비아 석유 이권 전쟁'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가장 유용할 '현존하는 최고의 연료 에너지 석유'에 대한 고위험-고효율 획득의 또 다른 무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과 리비아 문제가 작금의 뉴스 국제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이러한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일조한다. 이렇게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제국주의적 침략 욕망과 자연 파괴 욕망 가운데에서도 묵묵히 자기희생적 존재인 '벌거벗은 몸'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바로 말없는 리비아 민중과 일본인들의 축 처진 어깨가 아닐까?

4월 18일 BBC 뉴스 홈페이지의 일본 지진 특집 화면.
 4월 18일 BBC 뉴스 홈페이지의 일본 지진 특집 화면.
ⓒ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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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언론, #일본 대지진, #리비아, #석유,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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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문화연구자. 지역의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함. 10여년 전 유학시절 <오마이뉴스> 영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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