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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장애등급제 폐지와 보편적 복지 쟁취를 요구하는 장애인차별철폐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20일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장애등급제 폐지와 보편적 복지 쟁취를 요구하는 장애인차별철폐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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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서울까지 600킬로미터를 걸어온 이진섭씨와 이균도씨 부자는 이날 결의대회 참석하고 장애아동 복지지원법 제정을 요구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600킬로미터를 걸어온 이진섭씨와 이균도씨 부자는 이날 결의대회 참석하고 장애아동 복지지원법 제정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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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불던 20일 오후, 종로구 보신각 앞에 깃발이 나부꼈다. 깃발 아래에는 부산 성우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이균도(19)씨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악의라곤 찾을 수 없는 순박한 웃음의 아들에게 브라우니를 먹여주며 아버지는 말없이 웃었다. 봄의 따사로운 햇살이 균도씨 얼굴을 비추자 그는 손으로 눈만 겨우 가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600km를 아들 균도씨와 함께 걸어온 이진섭(47)씨의 검게 탄 얼굴에는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는 제31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등급제 폐지'와 '보편적 복지 쟁취'를 요구하는 '4·20 장애인차별철폐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결의대회에 참석한 수백 명의 장애인들과 집회참가자들은 정부의 장애인 정책을 비판하며 이들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했다.

이 결의대회에 참석한 이진섭씨는 "자폐증으로 인해 한 번도 세상에 나가보지 못한 아들에게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600km를 걸어왔다"면서 "우리 부자는 참 아름다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아동 복지지원법을 제정해달라고 아들 손을 잡고 여기까지 힘들게 걸어왔다"고  말했다.

600km의 대장정이 아들 이균도씨에게는 처음 만나는 부산 밖 세상이었고, 아버지 이진섭씨에게는 아들의 삶을 위한 힘겨운 싸움이었다. 장장 33일 동안 진섭씨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균도씨를 달래면서 밤에는 모텔에서 잠자고 서울까지 걸어왔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오면서 이씨 부자는 유명인이 되었다. 부산KBS에서 부자의 동행을 촬영했고,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나선 강재섭 한나라당 후보는 이씨 부자와 사진을 찍었다. 또한, 이들은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 VIP로 초대받았다. 하지만 이들 부자가 현 정부에 비판적인 말들을 하자 기념식 초대는 취소되었고,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과의 면담은 거부당했다.

비장애인도 하기 힘든 600km의 행군, 무엇이 이 부자로 하여금 그 먼 길을 나서게 했을까. '여정이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진섭씨는 "4대강 공사 주변에서 모래를 너무 마셔서 기관지가 나빠졌다"며 "4대강 예산의 5%만 장애아동을 위해 썼어도 제가 걸었겠습니까, 아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걷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답했다.

'마음의 창'보다 장애인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우선

장애인차별철투쟁 결의대회에 참가한 장애인들과 참가자들이 보건복지부를 향해 행진하고있다.
 장애인차별철투쟁 결의대회에 참가한 장애인들과 참가자들이 보건복지부를 향해 행진하고있다.
ⓒ 구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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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결의대회에선 정부의 장애인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18일 63차 라디오 연설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장애인을 위해 어떠한 제도와 지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창을 여는 것"이라 말했다. 이에 대해 박경석 전국장애인철폐연대 상임 공동대표는 "마음의 창을 열기 전에 제도적 지원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박 대표는 "노무현 정부는 장애인들을 위해 복지서비스를 주기 위해 등급제를 만들었다. 1급부터 6급까지 의학적으로 구분해서 복지를 해줬다. 이명박 정부는 가짜 장애인을 잡겠다고 장애등급 재심사를 했다. 1급 중증 장애인들이 3급으로 떨어져 복지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복지는 깡통복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현 정부에서 시행한 장애등급 재심사 이후 1급 중증 장애인들이 3급까지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했으며, 중증 장애인들에 대한 활동보조 서비스의 본인 부담금을 15%까지 인상했다. 활동보조 서비스 대상 또한 1급으로 한정해 장애등급 재심사에서 등급이 떨어진 1급 중증 장애인들은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석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오늘날 장애인들의 복지는 장애인들이 목숨을 걸고 스스로 권리를 요구하고 싸운 결과"라면서 "장애인 스스로가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 작은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다. 아직 국민기초생활법의 의무부양제, 장애아동 지원법 등 많은 제도적 과제들이 남아 있다. 장애인 차별철폐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함께 싸우겠다"고 지지의사를 밝혔다.

"장애인을 돌보지 않는 국가는 존재할 필요 없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 상임대표와 장애인들이 사다리와 쇠사슬을 목에 걸고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 상임대표와 장애인들이 사다리와 쇠사슬을 목에 걸고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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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차별철폐투쟁 결의대회 후 행진 과정에서 1차선 도로를 점거하려는 장애인들과 막으려는 경찰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장애인차별철폐투쟁 결의대회 후 행진 과정에서 1차선 도로를 점거하려는 장애인들과 막으려는 경찰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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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 중인 장애인들과 경찰이 마찰을 빚기도 했다.
▲ 장애인차별철폐투쟁 결의대회 행진 중인 장애인들과 경찰이 마찰을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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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의대회가 끝나기 전 장애인들은 '장애인 생존권 쟁취와 장애인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사다리와 쇠사슬을 목에 걸고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들은 이날 결의문을 통해 "현 정부의 예산에 짜맞춘 선별적 시혜적 복지구조를 거부하고, 보편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겠다"고 밝혔다.

또한, 이들은 ▲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 ▲ 장애인활동지원 권리보장 ▲ 장애아동복지지원법 제정 ▲ 발달장애성인의 자립생활 보장 ▲ 장애인의 탈시설권리 보장 ▲ 장애인 주거권 보장 등 12개 요구안을 발표했다.

결의대회를 마친 집회참가자들은 보건복지부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보신각 사거리 교통이 잠시 정체되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한 시민은 "평소 장애인의 목소리가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에 잠시 교통이 정체되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행진 과정에서 경찰과 마찰이 일기도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보건복지부 정문에 도착한 이들은 행진의 맨 끝에 있는 장애인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정리집회를 했다. 경찰 버스로 굳게 막힌 정문 앞에서 전동 휠체어를 탄 이들과 결의대회 참가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박김영희 인천 장애인부모연대 대표는 "장애아를 둔 부모는 아이들보다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 소원이다.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가 없어도 장애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와야 한다. 장애인들을 돌보지 않는 국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집회를 마무리했다.

이 말을 들으며 고개 숙인 이진섭씨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붉은 저녁노을이 장애인들 손에 들린 깃발을 비추었다.


태그:#장애인, #보건복지부,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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