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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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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셋째 날, 날씨 맑음. 2011년 3월 12일.

양양에서 구룡령 고개를 넘어 홍천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번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홍천에서 양양으로 넘어오는 버스도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안 것은 구룡령 가는 버스 안에서였다. 양양에서 구룡령을 넘어서 홍천으로 가는 버스는 양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8시 20분에 출발한다. 그 버스를 탔다.

혼자 떠난 여행이지만 일행이 둘로 늘었다. 지난밤에 남편이 야간버스를 타고 양양으로 왔기 때문이다. 오후 9시 반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를 탄 남편은 12시 반쯤 양양 읍내에 도착했다. 간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양양 읍내로 들어온 남편은 택시비를 삼천 원이나 줬다면서 툴툴거렸다. 이렇게 가까울 줄 알았으면 걸었을 것이라는 게다. 걸으면 십 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지만, 초행길인 남편은 택시를 선택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7번 국도를 따라 걷는 건 위험하지.

나는 양양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의 모텔에 방을 잡고, 남편을 기다렸다. 이건 완전히 모텔에 방 잡아놓고 남자를 기다리는 형국이로군, 하면서. 낙산사에서 하조대까지 걸은 뒤, 버스를 타고 양양 읍내로 다시 돌아왔다.

하조대 가는 길
 하조대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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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따뜻했던 기온이 뚝 떨어져 얇은 방풍 웃옷에 오리털 점퍼에 바람막이 점퍼까지 끼어 입고도 덜덜 떨어야 했다. 일교차가 예상보다 심했던 것이다. 역시 강원도는 강원도구나. 오리털 점퍼가 없었다면 꽁꽁 얼어붙었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양양 읍내에 도착했을 때는 따끈한 국물을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 방에 추위를 확 풀어줄 수 있는 얼큰하면서 따끈한 국물 음식이라면 짬뽕밖에 더 있겠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가 짬뽕을 주문했다. 이 짬뽕, 맛은 그저 그랬는데 국물 하나는 기가 막히게 뜨끈했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한기가 일시에 확 풀릴 정도로. 덕분에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을 때, 내 볼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나하게 막걸리를 마신 사람처럼.

저녁을 먹었으니 어딘가로 들어가 짐을 풀어놓을 차례다. 시외버스터미널 근처를 배회하면서 숙소를 물색했다. 가장 건물이 크고 그럴싸해 뵈는 모텔로 가려다가 주춤했다. 룸이 있는 술집 간판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텔이나 여관의 지하나 1층에 노래방 기기가 설치된 술집이나 노래방이 있으면, 잠자기가 참으로 괴롭다. 아래층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방 전체까지 울려 단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여행하면서 그런 경우를 한두 번 당한 게 아니다. 새벽까지 방바닥이 울려서 잠이 들기는커녕 누웠다가 벌떡벌떡 일어난 적도 몇 번인가 있다. 그런 경우, 침대방이거나 온돌방이거나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래서 그곳은 제외, 터미널에 가까운 3층짜리 건물에 있는 모텔로 들어갔다. 1층에는 식당과 분식점이 있는 건물이다. 숙박비가 예상보다 싸다 했더니, 시설이 기대 이하다. 특히 욕실이 좁고 옹색하다. 욕조가 없고, 세면대가 유아용처럼 작다. 그래도 씻는 데 지장이 없으니, 패스. 여기도 별 세 개,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숙박비가 싼 것을 감안해서 별을 매긴다. 물론 순전히 내 입장에서다.

방은 따뜻했고 더운물도 틀자마자 펑펑 쏟아지니 이 정도면 만족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보다 못한 숙박시설을 만날 때도 잦다. 산장에서도 자고, 대피소에서 자봤는데 어딘들 못 자겠나. 숙박시설을 탓하다가는 여행을 망치기 십상이다. 어차피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했다. 그거 싫으면 집에 콕 처박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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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구룡령 옛길을 걸을 예정이었다. 아홉 마리 용이 갈천에서 목을 축이고 넘어갔던 고개라 구룡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고개. 구룡령 옛길은 홍천군 명개리와 양양군 갈천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지금이야 자동차도로가 뚫렸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걸어서 넘던 길이었다. 자동차도로가 뚫리면서 이 길을 걸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었지만, 드물게나마 옛길을 찾아 걷는 사람들 덕분에 일부가 남아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걸으려는 구룡령 옛길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던가. 용도 폐기가 된 것 같은 길을 이제는 사람들이 일삼아 찾아와 걷게 되었으니 말이다. 명품 옛길이라는 소문이 자자해졌으니, 길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게 되나 보다.

갈천리에서 구룡령을 지나 명개리로 넘어가야 그 길을 온전하게 다 걷는 것이지만, 구룡령 정상에서 갈천리까지 내려간 뒤, 다시 양양 방향으로 해질 때까지 걸을 작정이었다.걷다가 해가 기울면 버스를 타고 양양 읍내로 돌아간다는 것이 내 계획. 그러면 아무리 못 걸어도 한 20km는 걷지 않겠나, 했다. 한데 이 계획이 아주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꿈이 야무졌지.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구룡령 정상에 아직 눈이 많이 있을 텐데요. 그래서 못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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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기사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다. 아차차, 산에 눈이 있을 수도 있지만, 5월 15일까지는 입산금지 기간인데, 하는 생각이 난 것이다.

버스는 구불거리는 고갯길을 달린다. 양양 읍내에서 구룡령으로 가는 길은 굽이치는 고갯길이 이어져 있었다. 지금이야 자동차도로가 뚫려서 실감이 나지 않지만, 예전에는 골이 깊은 오지였겠다, 싶은 곳이 바로 양양이었다.

산을 뚫고 난 길은 사방이 산으로 덮여 있었다. 골이 깊고 또 깊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후렴처럼 되풀이된다. 그뿐인가. 산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도로 옆에는 녹지 않은 눈이 잔뜩 쌓여 있다. 족히 20cm가 넘어 보이는 높이다.

버스에 탄 채로 그 눈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심란해진다. 눈이, 아무리 강원도라도, 구룡령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잔뜩 쌓여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봄이 온다는데 이래도 되는 거야? 구룡령 부근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나, 지금 겨울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버스기사는 홍천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딱 한 대, 오는 버스도 딱 한 대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만일 구룡령 옛길로 못 들어가게 되면 홍천에서 나오는 버스를 타라, 면서 우리를 구룡령 정상에서 내려주었다. 버스가 금방 올 것이라면서. 그 금방이 대체 언제인지 모르지만.

눈으로 덮인 구룡령 옛길로 가는 계단.
 눈으로 덮인 구룡령 옛길로 가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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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우리만 남겨둔 사라져 버렸고, 길 위에 선 나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세상에나, 웬 눈이 이렇게 많이 쌓인 것이여.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도가 눈 속에 푹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구룡령 옛길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에도 눈이 잔뜩 쌓여 계단은 보이지 않고 난간만 두드러진다.

이 일을 어쩐다? 남편은 나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못 간다. 하루 먼저 서울을 떠난 나는 배낭 안에 아이젠을 챙겼지만 남편은 가져오지 않았다고 했다. 옛길을 걷는다고 했지 눈길을 걷는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 챙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젠 없이 저렇게 쌓인 눈 속으로 들어갈 수야 없지. 입산금지 기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이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다.

홍천에서 나오는 버스를 타고 다시 양양 읍내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면 2차선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던가. 남편은 버스를 타고 다시 양양 읍내로 돌아가자고 한다. 하는 수 없지, 그렇게 해야지.

이곳 구룡령 정상에는 산림박물관이 있다. 입구는 막혀 있었지만 그 앞에 차량 2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이곳에도 산불감시원이 근무하는 게 분명했다. 남편은 밖에 남고, 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근무 중인 산불감시원이 있었다. 외부 출입은 막지만 영하 30도가 넘는 한겨울에도 근무를 한단다. 눈이 펑펑 쏟아져도 그건 마찬가지란다.

눈이 많이 내리면 이 고갯길을 차로 올라오기가 어려울 텐데, 싶어서 물었더니 이 아저씨 딱 잘라 말씀하신다.

"어떠한 경우에도 국도가 막히는 법은 없어요. 눈이 오면 가장 먼저 제설작업을 하지요. 강원도는 제설작업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산림박물관
 산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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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루에 한 번밖에 다니지 않는 노선버스도 눈 때문에 끊기는 일은 없다고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감시원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양양 읍내로 들어가는 버스가 가 버렸다. 내가 없으니 홀로 남은 남편은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멀거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단다. 결국 남편은 나를 찾아 산림박물관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그런 남편을 보고 산불감시원 아저씨가 한마디 한다.

"버스를 탈 거면 세워야지, 그냥 보내면 어떡해요? 여기서는 세우면 서서 기다려주거든요. 하루에 한 대밖에 안 다니니까."

버스를 놓칠 운명이었구나, 해야지 어쩌겠나. 여기서부터 걸으라는 얘기로구나, 했다. 어차피 걸으러 온 길이니 어디서 걷든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므로.

산불감시원 아저씨는 입산금지 기간이라 5월 15일까지는 구룡령 옛길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아저씨, 우리가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구룡령 정상에 왔으며 버스까지 놓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구룡령 옛길로 가고 싶다면 가라, 고 했다. 말하자면 특별대우였다.

구룡령 옛길로 가면 갈천 마을까지 거리는 5km. 2시간 반쯤 걸린다고 했다. 그 길이 아니라면 자동차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야 하는데 그 거리는 12km. 두 길 중 선택은 우리 몫이라고 했다.

눈 덮인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판
 눈 덮인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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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5km를 걷느냐, 자동차도로 12km를 걷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걷고 싶은 길이야 당연히 눈길인 구룡령 옛길이지만 아이젠이 없는 남편은 초행길, 그것도 눈이 덮인 길을 걷는 건 무리라면서 구룡령 옛길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따로따로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우리는 자동차도로 12km를 걸어서 내려가기로 했다. 구룡령 옛길은 입산금지기간이 풀리는 5월에 갈천부터 명개리까지 걷기로 하고.

아침에 모텔 1층에 있는 분식집에서 아침식사 대용으로 김밥을 살 생각이었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금일 휴업'이라고 써 붙여 놨다. 그래서 아침을 거른 참이라,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라면을 끓여 먹고 가기로 했다. 12km를 걷는다면 아무리 내리막길이라고 하더라도 2시간 반 이상은 족히 걸릴 텐데 중간에 식당이 있을 리 없으니 자칫하다가는 쫄쫄 굶을 판이었던 것이다.

구룡령 도로
 구룡령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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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를 구하고, 남편이 한쪽에서 버너와 코펠을 꺼내 라면을 끓였다. 바깥은 바람이 엄청나게 사정없이 몰아쳐서 불을 피울 형편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이 더 좋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 먹어야지.

뱃속도 든든하게 채웠다, 이제는 걸을 일만 남았다. 산불감시원 아저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산림박물관을 나섰다. 미천골휴양림 17km, 라고 쓰인 표지판이 보인다.

자, 걷자구요. 내가 말했다.


태그:#도보여행, #강원도, #양양, #구룡령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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