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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사재기

 

TV 뉴스를 보던 아내가 대뜸 물었다.

 

"여보, 우리 라면이라도 사야 하는 거 아닌가?"

"? 라면은 왜? 일본 방사능 때문에?"

 

". 정부에서는 바람 방향 때문에 전혀 피해가 없을 거라고 하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정부하고 언론은 그냥 무작정 믿으라는 식이잖아. 혹시 바람 방향이라도 갑자기 바뀌면 어떻게 해? 한동안 집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라면하고 기저귀는 좀 사 놔야 하지 않겠어? 우리야 그렇다 치지만 아이가 걱정돼."

"에이, 설마 무슨 일 있겠어? 그냥 좀 더 지켜보자."

 

그러나 이런 나의 태연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바뀌었다. 여러 언론들이 인용한 바 있는, 영국 기상청 소속 화산재예보센터의 '한국을 포함해 10여 개 지역의 상공에 핵 비상경보를 발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마트를 가겠다고 일어난 아내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마트에서 라면을 한가득 샀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집안에 비상용 먹을거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일본발 방사성물질이 덮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재기만큼 무너진 시민의식도 없다는 생각에 창피하고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염려가 더 컸기에 주섬주섬 라면을 샀다. 비록 주위의 시선도 있고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도 있고 해서 15개밖에 사지 않았지만 사재기는 분명 사재기였다.

 

사재기의 책임은 개인의 몫인가?

 

물론 사재기가 옳은 행위는 아니다. 우선 나만 살고 보겠다는 이기심의 발로로서, 전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깨어 있는 시민이 절대 피해야 할 행위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사재기의 책임을 마냥 그 당사자에게만 물을 수 있을까?

 

사재기가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확실한 정보 때문이다. 각 개인이 앞으로 일어나는 일을 예측하지 못할 때 사재기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먹을 식량이요, 이것을 비축하는 것이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현재 도쿄에서는 정부가 법적 규제를 생각할 만큼 사재기가 문제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 침착한 일본인들도 대지진과 원자력 에너지 방사선 누출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정작 더 큰 문제는 그 일본인들마저 사재기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일본 정부의 믿지 못할 태도이다.

 

물론 정부는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선 끔찍한 소식을 오히려 감추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어정쩡한 정부의 태도는 일본인들의 의심을 사기 충분했고 그 결과가 사재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원전이 폭발해서 방사성물질이 유출되고 있다고 하는데, 정부는 마냥 괜찮다고 하고, 미국이며 다른 국가들은 자국민들을 귀국시키고 있고, 과연 어느 일본인이 정부의 말만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일본 도쿄에 거주하고 있는 지인의 말에 따르면 지진이 있었던 날에는 지진이 자기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지 잘 몰랐었다고 한다. 언론을 보면서 이번 대지진이 예전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 그러나 "원전사고", "계획정전" 보도가 시작되면서부터 도쿄의 사재기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전을 보도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가 미심쩍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제각기 살 궁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월드컵 때 서울처럼 도쿄의 밤거리가 한산하다고 이야기하는 그녀.

 

한반도는 이상 없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어떤가. 과연 우리 정부는 일본 대지진 이후 국민들에게 신뢰를 줄 만큼 행동했던가?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방사성물질이 유출되었지만 우리 정부의 발표는 한결같았다. "한반도는 이상 없다." 많은 일본인들이 섭섭하다고 지적할 만큼, 정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반도는 절대 괜찮다고만 되풀이하고 있는 중이다. 유사시에는 군용기까지 동원해 자국민을 수송하겠으니 우리만 믿으면 된다는 식의 일관된 주장.

 

물론 아직 우리 사회에서 사재기가 횡횡하지 않는 것은 정부가 내놓은 발표의 근거가 누가 봐도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편서풍 이야기는 우리가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때 배웠었던 상식 아니었던가.

 

문제는 정부가 그 이상에 대해 이야기를 않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의 피해가 어떻게 우리의 수산업과 농업 등 식량 생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리고 만에 하나 일본과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발생한다면 어찌해야 하는지 이야기는 않고 마냥 괜찮다고만 떠들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 일본도 저 지경이라면 우리 수준은 더 하지 않겠는가. 과연 국민 중 그 누가 일본 원전보다 한국 원전이 더 안전하다고 믿겠는가. 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을 맞은 이후 그 어느 국가보다도 핵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알고 대비했을, 그리고 워낙에 화산, 지진이 많은 터라 세계에서 재난 시스템은 최고인 일본 아니던가.

 

하물며 정부는 일본 대지진과 방사능 때문에 정신없는 이 시기, UAE 유전 개발을 크게 떠들었다. 전 세계가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겠노라고 천명하는 이때에, UAE 원전 수주를 조건으로 한 유전 개발을 자국민들에게 생색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정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다른 국가들은 원전을 재고한다는데, 우리만 혼자 원자력 에너지에 올인 하겠다는 것인가? 일본 대지진 때문에 뉴스 1면을 놓친 것이 마냥 아쉬운가?

 

TV만 켜면 걱정 없다는 정부의 사탕발림. 그러나 정부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들은 극소수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례들을 봤을 때, 정부는 언제나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왔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끝까지 남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도망갔던 이승만의 후예들을 우리가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부디 정부는 지금이라도 현 상황에 대해 좀 더 치밀하게 대처해주기를 바라며, 원자력이 녹색성장이니 어쩌느니, 되도 않는 홍보비에 국세를 낭비하지 말기를 바란다. 차라리 그 돈으로 유류세를 인하하여 서민들의 생활고를 덜어주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원자력,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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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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