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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탄 포르투갈 사람은?

 

 

문학을 아는 사람은 1998년 노벨문학상을 탄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 1922-2010)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름만 알지 작품 경향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원래 저널리스트이자 번역가였다. 그는 리스본에 있는 일간신문사인 <디아리오 데 노티시아스(Diário de Notícias)>의 기자로 일하면서 부편집인까지 되었다. 그러나 1975년 급진좌파가 일으킨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직장을 잃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공산주의자로 혁명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그 후 사마라마구는 번역가와 작가로 살았다. 그러나 작가로서 별 이름을 내지 못하다 1982년 발표한 네 번째 소설 <수도원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1700년대 바로크 시대 리스본의 종교재판소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부상병과 젊은 예언자, 그리고 가톨릭을 배반한 성직자의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로 인해 사라마구는 가톨릭계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된 작품은 1991년 발표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다. 여기서 사라마구는 예수의 삶을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그리고 있다. 예수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열적이고 의심하기도 하며 잘못도 저지르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사라마구는 가톨릭교회로부터 반종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 고소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사라마구는 포르투갈을 떠나 에스파냐령 카나리아제도의 란차로테로 이주했다.

 

 

그렇지만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철학적이며 도전적이고 호소력 있는 작품으로 평가했다. 그 후 사라마구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눈이 멀게 되는 우화 <눈먼 자들의 도시>(1995)를 발표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미지의 섬 이야기>를 발표했다. 1998년 노벨상 위원회는 이러한 일련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 사라마구의 소설은 대체적으로 상상력과 연민, 그리고 아이러니에 토대를 둔 비유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카몽이스

 

나는 리스본을 여행하면서 카몽이스를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카보 다 로카 표지석에서 또 한 번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카몽이스가 묻힌 것은 1880년이다. 그는 모로코를 여행했고, 인도와 베트남을 거쳐 마카우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고향인 포르투갈로 돌아오는 길에는 잠깐 모잠비크에 체류하기도 했다. 이처럼 풍부한 여행 경험이 그의 대표작 <루시아드인들(Os Luciadas)>을 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몽이스(1524-1580)는 어릴 때 도미니크 교단과 제수이트 교단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코임브라대학 사무총장이던 삼촌 덕에 코임브라대학에 다니면서 그리스, 로마, 이탈리아, 에스파냐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궁정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며,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나중에 왕비가 된 아타이드의 카타리나 그리고 주앙 3세의 누이인 마리아 공주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쓴 풍자극 <셀레우크 왕>이 주앙 3세의 비위를 거슬려 히바테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그는 1547년부터 전 세계를 편력하면서 경험을 쌓았고, 바스쿠 다 가마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 아프리카, 인도, 중국까지 여행했다. 그가 다시 리스본에 돌아온 것은 1570년이었다. 카몽이스는 이러한 경험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1572년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유명한 작품인 서사시 <루시아드인들>을 발표했다. 당시 이 서사시는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동 세바스티앙 국왕에게 헌정해 카몽이스는 연금을 받게 되었다.

 

    

1578년에는 포르투갈이 크사르 엘 케비르 전투에서 에스파냐에게 패배하고 세바스티앙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라메고 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고 한다. "나의 조국이 나에게 그렇게나 잘했기 때문에, 나는 내 나라에서 내 나라와 함께 기꺼이 죽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애국자고 이상주의자였다.

카몽이스는 이탈리아의 단테,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비견되는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서정시와 드라마를 썼지만, 서사시 <루시아드인들>로 해서 유명해졌다. 루시아드인은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에 사는 전설적인 종족으로 현재 포르투갈인의 조상이다. 카몽이스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항해 체험을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시켰다. 서사시는 총 10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8행시 1102편으로 구성되었다.

 

이 작품에는 동 마누엘, 알폰수 엔리케, 바스쿠 다 가마 형제 등 포르투갈의 영웅과 그리스 로마 신화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포르투갈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 보면 바스쿠 다 가마의 연인인 테티스가 포르투갈의 탐험과 정복의 미래를 예언한다. 그리고 다 가마를 산 정상으로 데리고 가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를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그녀는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에 참여한다. 

 

우리가 잘 아는 듯하면서도 너무 모르는 바스쿠 다 가마

 

 

바스쿠 다 가마(1460-1524)는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항해사이자 탐험가이다. 그는 1460년 리스본 남쪽에 있는 알렌테주의 시네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비제우 공작이었던 동 페르난도 휘하의 기사로 시네스의 집정관으로 일했다. 그러므로 바스쿠 다 가마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수학과 항해술, 그리고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92년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바스쿠 다 가마를 리스본 남쪽의 세투발로 보내 알가르브 지역까지 해상권을 장악하도록 만들었다. 왕으로부터 항해술과 지도력을 인정받은 다 가마는 1497년 7월 8일 인도를 향한 여행을 시작했다. 왕의 칙사로 4척의 배에 170명의 승무원을 이끌고 리스본 항을 출발한 것이다. 이중 한 척(사웅 가브리엘호)은 바스쿠 다 가마 자신이 이끌었고, 다른 한 척(사웅 라파엘호)은 형인 파울루 다 가마가 이끌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척은 범선 베리우와 화물선이었다.

 

 

이들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개척한 길을 따라 아프리카의 테네리파를 거쳐 희망봉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케냐의 몸바사를 거쳐 게절풍인 몬순을 타고 1498년 5월 20일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캘리컷의 왕 자모티리를 만나고 8월 29일 귀환길에 오른다. 그러나 몬순이 반대로 부는 것을 몰라 132일이나 걸려 몸바사 북쪽에 있는 말린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 선원들의 절반이 죽었고, 나머지 선원도 비타민 C 부족으로 괴혈병에 걸렸다. 다 가마의 선단은 두 척의 배를 잃고 1499년 8월 리스본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인도 여행에 꼭 1년이 걸린 셈이다. 그는 마누엘 1세의 환대를 받았고, '인도양의 제독', 귀족에게 주는 '동(Dom)'이라는 호칭을 하사받았다. 이어 다 가마는 1502년 두 번째 인도 항해를 했고, 1524년에는 인도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총독 자격으로 세 번째 인도 항해를 했다.

 

그러나 그는 고아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에 코친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은 코치항 성 프란시스 교회에 묻혔고, 1539년 포르투갈로 이송되어 비디게이라에 묻혔다. 그 후 리스본에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건설되었고, 1880년 이후 이 수도원으로 이장되어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유럽 축구의 대표주자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Cristiano Ronaldo: 1985-), 그는 현재 유럽 프로 축구에서 가장 잘 나가는 선수다. 현재 에스파냐 프리메라 리가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이며, 포르투갈 국가대표팀 주장이다. 그는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부터 에스파냐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했고, 현재 받는 연봉도 6년간 매년 1300만 유로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호나우두는 마데이라 섬의 산투 안토니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로날드 레이건에서 따 왔다고 한다. 호나우두의 축구인생은 처음 스포르팅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2002년 17세 이하 유럽챔피언전에 나갈 포르투갈 대표선수를 뽑는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2003년 여름 리스본의 주제 알바라데 경기장에서 있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인상적인 경기를 편다. 당시 맨유 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그를 주목했고, 1500만 유로에 계약하기에 이르렀다.

 

맨유에서 그는 유명한 선수들이 사용하던 등번호 7번을 받았고, 이후 맨유의 대표선수로 성장했다. 2004/05 시즌 이후 계속해서 30골 이상을 기록했으며, 2006/07 시즌에는 34골을 넣어 FIFA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 3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8/09년에도 33골을 기록, 맨유가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2009년 6월 에스파냐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등번호 9번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7월 6일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데뷔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에는 8만 명의 관중이 입장했다고 한다. 2009/10 시즌에 그는 29골을 기록했고, 2010/11 시즌 현재 19골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포르투갈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 선수 중 하나다.


태그:#주제 사라마구, #카몽이스, #바스쿠 다 가마,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 #제로니무스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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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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