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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 기자 말

 

 

"타탓탓탓 타탓탓 ---"

 

장갑차에서 쏴대는 기관총소리였다. 총알들이 우박처럼 쩨야강 위로 떨어졌다. 물방울 대신 핏방울들이 수면 위로 튕겨 올랐다. 쩨야강을 넘으면 북만주 벌판. 그러나 돌아갈 수 없었다. 물 위로 넝마 같은 시신들이 떠내려갔다. 연해주에서 그리고 만주에서 스보보드니시(자유시)로 집결했던 독립군 시신들이었다.

 

장갑차 2대, 기관총 30문, 기마병 600여 명이 동원됐다. 러시아 적군(赤軍)과 오하묵의 자유대대는 공격에 나섰다. 연해주와 만주 밀산을 거쳐 자유시로 이동한 1500명의 독립군들은 그 공격에 무너졌다.

 

만주벌판으로 탈출하려면 쩨야강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사살 200여 명, 익사 30여 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00여 명이 그날의 전과였다. 그렇게 해서 박일리아가 지휘하던 연해주 부대와 만주에서 이동한 독립군 1500명의 무력은 벌건 대낮에 작살나고 말았다. 1921년 6월 27일 일어난 이른바 '자유시참변'이었다.

 

'자유시참변'에 대해서는 '소련군 개입설'과 '소련군의 단독공격설' 등이 있다. 그러나 각기 다른 부대 한인 지휘관들 사이에 군 지휘권을 놓고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게 치명적이었다. 오하묵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줄을 댔고 박일리아는 러시아의 원동정부에 줄을 대고 세력을 겨뤘다.

 

'자유시참변'의 후유증은 컸다. 외부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소련군 개입설'을 믿게 돼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감이 싹텄다. 내전이 끝나고 시베리아에서 일군이 철수하자 소련은 모든 한인부대의 무장을 해제했다. 그 역시 배신행위였다. 해서 1922년 이후 러시아와 중국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오랜 수면기에 들어갔다.   

 

'자유시참변'에 대해 들은 박용만의 낙담은 컸다. '러시아령의 독립군'은 훗날 본국으로의 '대진공'을 감행하기 위해 실력을 양성하기로 '군사통일주비회'에서 결의하지 않았던가. 두 달 만에 그런 꿈이 여지없이 박살났으니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자유시로 집결한 부대들은 독립군 전체 병력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더 절망적이었다. 박용만은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해 솟구치는 적개심을 누를 길이 없었다. '자유시 참변'은 그를 반공주의자가 되게 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결국 믿을 수 있고 또 힘을 빌리기 위해 접근이 가능한 나라는 그가 15년 가까이 익숙해진 미국 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됐다.

 

러시아와 북경을 떠도는 동안 박용만은 하와이의 대조선독립단으로부터 독립운동 후원금을 받았다. 송금은 북경 주재 미국 대사관을 통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종종 대사관을 들락거렸다.

 

"헤이, 케니스. 어떻게 당신이 이곳에?"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에서 알고 지내던 케니스를 만난 것은 미국 대사관에서였다.

 

"헤이, 용만. 만나서 반갑소. 그런데 북경엔 웬일이요?"

네이비블루 군복을 단정히 입고 있는 케니스는 해군 무관이었다.

 

"조선에 가까운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지요."

박용만은 미 육군수송함 토머스호를 타고 약 2년 전 하와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고, 거기서 미국의 시베리아 파견군 사령관에게 현지 정보를 취합해서 보고했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그러면서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언제고 일본에 관한 첩보가 필요하다면 내가 도울 준비가 돼 있소."

 

제1차 세계대전만 해도 일본과 미국은 독일에 함께 대항하는 동맹의 관계였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지 않은가. 오직 정글의 법칙만이 통용되는 것 아닌가.

 

박용만은 만주로 계속 세력을 확대하는 일본이 언젠가 미국과 충돌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꺼냈다. 설사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감시의 눈을 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해군 무관 케니스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케니스는 해군이어서인지 일본의 군항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조선의 진해항을 군항으로 요새화하고 대륙진출을 위해 함경북도에 있는 나진항의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 사실을 이미 주목하고 있었다.

 

박용만은 첩보원으로 임무를 받으면 한국으로 잠입해서 두 군항들을 살피고 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케니스는 천진에서 마닐라를 왕래하는 군함이 서울의 미국 영사관에 업무연락 차 인천에 기항하는데 그 편에 박용만을 승선시킬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필요하면 독립운동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에 잠입했다. 신채호도 결혼하는 조카딸을 만나기 위해 충청도에 있는 고향을 다녀가지 않았던가. 북경에서 조선에 잠입할 경우 안동(단둥)까지만 기차로 이동한다. 안동에 내려서는 압록강 철교를 걸어서 넘거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그 다음 신의주에서 서울 오는 기차를 타면 된다.

 

중국 내에서 기차를 타면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의 객차가 달랐다. 불결한 중국인들과 같이 타지 않게 돼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중국옷을 입고 중국인들 속에 섞이면 안전했다. 조선에 들어오면 변장을 잘하고 눈치껏 행동하면 되는 거였다.

 

1912년 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이회영도 여러 번 조선에 잠입했다. 1910년 12월 40명의 가솔들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했던 그는 4년 만에 자금이 떨어지자 혼자 모험에 나섰다. 역시 단둥을 거쳐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은 이상재 등 동지들을 몰래 만나 자금문제를 의논했다.

 

이회영의 조선 잠입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1917년 아들이 고종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할 때도 잠입해서 고종과 비밀리에 접촉하는데 성공했다. 다음해에도 자금을 구하려고 몰래 들어갔다. 그때 고종의 중국 망명을 추진했으나 고종의 사망으로 실패했다. 몇 번의 잠입에도 그가 잡히지 않은 것은 극비리에 움직인 탓도 있었지만 일본 정보망이 구석구석 미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박용만은 미국 군함을 타고 1921년 늦은 여름 인천에 하륙했다. 함장이 발행한 신분증을 갖고 미국 영사관으로 향하는 미국인들 틈에 섞여 내린 것이다.

 

신분증에는 중국인이며 함 내의 보일러에 석탄을 집어넣는 화부(火夫)로 일하고 있다는 게 적혀 있었다.

 

서울에서 그는 허름한 노동자로 변장하고 검문이 가장 허술한 열차의 3등칸을 타고 진해로 내려갔다.

 

진해는 일본 해군을 위해 병영기지로 설계된 도시였다. 3개의 로터리를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거리가 뻗어 있었다. 하지만 진해시에서는 군항을 볼 수 없었다.

 

진해시에 있는 장복산의 정상에서도 군항이 보이지 않는 것은 민간용인 속천항의 오른쪽에 있는 산이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복산 밑 남쪽으로 내려오면 속천항이 나오는데 거기서 배를 타고 외항으로 빠질 때도 군항은 보이지 않았다.

 

 

군항은 북쪽으로는 산들이 막고 바다 쪽에는 작은 섬들이 막아 엄폐가 잘되기 때문에 천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군항에 접근할 수 있는 평지에 있는 부대 건물들은 높은 담과 철조망으로 둘러쳐 있고 무장병들이 요소마다 경계를 서고 있었다.

 

굳이 잠입을 시도하려면 군항의 노무자로 들어가는 것이 방법이 있긴 한데 그럴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현지 노무자를 매수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가진 돈도 많지 않고 자칫 신분이 탄로될 위험도 있었다. 박용만은 군항이 가장 잘 보이는 산등성이에 올라 군항이 어떻게 요새화되고 있으며 정박 중인 군함들의 종류와 숫자를 살핀 다음 서울로 돌아갔다.

 

다음 임무는 나진항의 정찰이었다. 함경북도 소재 나진은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를 지척에 둔 길목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대륙침략 거점이었다. 일본의 서부지역에서 대륙으로 들어가는 최단거리의 항구가 되기 때문에 일본은 전략적인 항만으로 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박용만은 장사꾼으로 변장해서 경원선 열차에 올랐다. 나진까지 철로가 개통됐기 때문에 원산에서 기차를 바꿔 타고 북상하기로 했다.

 

나진항은 큰 배가 여럿 드나들 수 있도록 만이 넓고 수심이 깊은 항구다. 배후에는 큰 도시를 건설할 수 있는 평지도 있어 일본은 전략적인 항만으로 개발했다. 배후의 산들도 높지 않고 평지가 넓어 철도와 도로 건설도 용이했다. 도시계획에 의해 거리는 바둑판처럼 뻗고 있었다. 박용만은 사흘을 머물면서 부두 시설과 정박 중인 선박이나 군함들을 살폈다. 그리고 부두 주위는 물론 나진항에 어떤 군사 시설들이 있고 군부대들의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도 상세히 정탐했다.

 

 

인천으로 무사히 돌아온 박용만이 승선하자 미국 군함은 천진항을 향해 떠났다. 박용만이 진해와 나진을 정찰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은 김현구가 쓴 '우성, 박용만 약전'에 나온다. 약전엔 그것 말고 중국 군벌 풍옥상의 밀사가 돼 서울에 가서 총독부 관리들과 만났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현구는 "박용만은 자신을 무인(武人)으로 자인했으며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로부터 도망하는 짓을 결코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박용만이 극동으로 떠나기 전 하와이에 조직한 대조선독립단의 총단장을 맡았던 정두옥도 "박용만의 미국인 동창생 한 사람이 북경공사관에 수군장관(해군무관이었던 것 같음)으로 있었고 미 함대가 종종 조선 바다를 순행하는데 박용만이 그 군함을 타고 조선에 두 번이나 갔었다"고 회고했다.

 

정두옥은 1969년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를 펴냈다.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는 파인애플 노동일에서 손을 뗀 다음 호놀룰루에 양복점을 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관한 일이라면 양복점이고 뭐고 뛰쳐나갔다. 그의 아들에겐 이해가 안 되는 정신 나간 짓이었다.  

 

두 사람 다 박용만의 측근들이었다. 박용만은 안심하고 그들에게 지난 일들을 털어놓지 않았을까.*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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