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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힘> 겉그림
ⓒ 역사비평사	관련사진보기

조선시대 왕에게는 '종(宗)' 또는 '조(祖)'라는 묘호가 붙여졌다. 임금이 돌아가면 종묘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 종묘에 봉안된 위패를 부르는 이름이 곧 묘호다. 당연히 '세종'이니 '정종'이니 하는 이름 등은 재위 기간에는 쓰지 않았던 호칭이다.

한편 왕자에게는 '군(君)'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왕의 적처 즉 왕비에게서 난 왕자는 '대군'이었고 빈(嬪)에게서 난 왕자는 '군'을 붙여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금에게 '종'이나 '조'가 아닌 '군'이 붙은 경우가 있었는데, 노산군과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폐위된 임금이라는 것이다. 결국 임금에서 폐위되면 곧장 '군'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인데, 그것도 왜 '대군'이 아닌 '군'이었을까? 말대로 하면 임금이 폐위되면 곧장 '서자 왕자'가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비논리적이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조선의 힘>(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을 읽으면 이 의문이 해소된다. 폐왕에게 묘호를 올리지 않고 폄칭해서 '~군'이라고 한 것은 그들을 '서자 왕자'로 격하시킨 것이 아니라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범례에는 왕을 참칭한 경우 그저 '아무개 군'이라는 식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폐위된 왕은 '왕 같지도 않은 왕'이요, 나아가 '왕을 참칭한 경우'와 크게 다를 바 없으므로 그저 '~군'이라고 하여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으로 격하해 불렀다는 것이다(이 중 노산군은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대통령 같지도 않은 대통령'은 뭐라 불러야 하나

주지하듯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는 전직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 있으며 현직 이명박을 추가해서 무려 10명이나 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대통령 같지도 않은 대통령'은 누구일까?

필자의 단견으로는 불행히도 대부분이 '대통령 같지도 않은 대통령'에 해당된다. 그래서 접근 방법을 달리 해 차라리 '대통령다운 대통령은 누구일까'로 묻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필자의 생각으로 '대통령다운 대통령'은 두 명 혹은 많아야 세 명 정도인데 독자 제위의 생각은 어떠신지.

<조선의 힘>의 저자 생각도 필자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사상사가 전공인 저자 오항녕은 '대통령 같지도 않은 대통령'으로 먼저 전두환과 노태우를 들고 있다. 두 사람은 대통령직을 얻을 때에 군사반란이라는 불법을 저질렀고 임기 중에도 불법을 저질러 퇴임 후 유배되기도 하고 법정에 서기도 하여 최고형을 받았으니 '대통령을 참칭한 자' 또는 '폐위된 대통령'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공식 직함을 뭐라고 해야 할까? 폐왕을 '~군'이라고 격하해 불렀던 조선시대에 견주어 볼 때, 그들에게 '전(前)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주는 것은 부당하지 않겠는가?

실로 오랜 만에 만나본 역저, <조선의 힘>

사람들은 조선이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일부만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조선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명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를 자신들의 미래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설정하지도 않은 목표나 결과에 어찌 실패와 성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길 가다 강도를 만나 상해를 당하면 그 사람에게 운이 없다고 하지 실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근대는 보편적이지 않은 목표를 보편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에는 당연히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폭력성이 포함된다. 이 폭력성을 내면화하면서 사람들은 성립할 수 없는 명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폭력성을 분석하고 그것에 저항해야 할 노고와 정열은 실패자에 대한 모멸과 분노로 바뀌었다.
- <조선의 힘> '프롤로그' 중에서

저자는 근대주의를 식민주의와 '한통속'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식민주의와 근대주의를 합쳐 '범식민주의'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거침없는 주장은 필자의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필자는 정약용,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파들에서 태동한 근대화지상주의는 박규수, 유길준, 김옥균을 거쳐 이광수, 장덕수, 이승만으로, 그리고 박정희와 이명박으로 이어져 오면서 우리 사회에 병폐를 양산했다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조선 500년 문명, 그 역동성의 요체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조선왕조는 518년 동안이나 존속한 세계 최장수 왕조다. 또한 조선은 이 기나긴 세월 중에 상당히 오랜 기간 선진일류국가를 유지했다. 저자에 의하면, 난세란 '인간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견딜 수 없이 병적으로 벌어져 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난세의 반대는 '치세'가 된다. 역사를 당대의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조선이 난세였던 것은 16, 17세기에 걸친 50년, 그리고 말기의 50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400년은 치세였다고 보아야 한다.

명 태조(홍무제, 1328~1398)는 그의 유훈에서 "주변에 정복할 수 없는 16국이 있는데, 첫째가 고려(실은 조선)이고 그 다음이 안남(베트남)"이라고 했다. 동아시아에서 한민족과 베트남 민족을 1, 2위로 꼽은 명 태조의 평가는 탁견이었다고 생각한다. 한민족은 비록 미·소 강대국의 협잡으로 분단되었지만 남한은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위업을 이루었고 북한은 북한대로 군사강국으로서 초강대국 미국과 맞서고 있다. 또한 베트남은 프랑스와 일본 그리고 미국을 차례로 몰아내고 통일독립국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의 힘>의 저자는 조선문명을 역동하게 만든 힘의 요소로서 여섯 가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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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 노준형	관련사진보기

치자(治者)인 왕과 왕자에게 끝없이 수학(修學)을 요구했던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으로 대표되는 문치주의(저자는 문치주의를 '무력을 자기 국민에게 사용하지 않는 이념'이라고 규정한다), 돌덩이 같은 저력을 가지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예치와 법치를 지향한 <경국대전> 등의 헌법과 강상, 200년의 긴 여정 동안 추진된 복지혁신 시스템인 대동법,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성리학,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단종과 사육신을 위해 무려 243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이루어진 '역사바로세우기' 작업 등을 들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 같이 감동적이고 자랑스러운 조상들의 자취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필자는 243년 동안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끝에 강원도 오지 영월에서 한을 품고 죽어간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원되는 순간을 읽을 때에는 가슴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고 눈가의 물기를 주저 없이 닦아야 했다.

이 밖에도 <조선의 힘>은 광해군에 대한 선의적 오해를 불식시킨다. 저자는 임기 내내 토목공사에만 매달려 재정을 고갈시킨 광해군을 은근히 이명박 대통령과 비슷한 수준으로 치부하고 있다.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선뜻 들어주지 않은 것도 진행 중인 대궐 건축공사에 차질을 빚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효(孝)'는 부모 아닌 자식을 위한 것

평소 필자는 우리 조상들의 효(孝)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느끼기에 그것은 가히 마력적(?)인 수준이었다. 조선시대의 효는 일종의 '매혹적인 로맨티시즘'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조상들은 효에 온 생애를 걸다시피 했다. 우리 조상들은 왜 그렇게도 효를 중시했는지 가끔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필자는 <조선의 힘 >을 통해 조선의 '효(孝)'가 가지는 마력을 이성적으로 깨우치는 행운을 건질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몇 번 혼자서 울었다. "아버지, 미안해, 미안해...." 이게 내가 울면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해 추석에 차례를 마치고 모두 돌아간 오후, 계단에 앉아서 허한 마음으로 맑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었다. 그 무렵에 뒤늦게 '효孝'가 뭔지를 알았다. 효는 부모가 돌아간 뒤에 자식 마음 편하라고 가르치는 덕목이라는 것을.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살아 있는 자식을 위한 장치라는 것을. 그랬다. 가능하면 돌아가신 뒤 덜 후회하고 덜 마음 아프라고 그렇게 효를 강조했던 것이다.(<조선의 힘> 104쪽)

전두환과 노태우의 공식직함, 그리고 이명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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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 65주년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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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앞서 말했듯이 전두환과 노태우는 조선시대 폐위된 왕이나 진배 없는 위인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재산을 은닉한 채 추징금마저 미납함으로써 최소한의 속죄조차도 거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전(前) 대통령'이라는 공식 직함을 줄 수 없지 않은가.

평범하게 '씨'를 붙이는 것은 불공정하다. 왜냐하면 '씨'는 건강한 보통 국민들에게 통용되는 범칭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힘>의 저자는 고심 끝에 대통령 직함을 강등시켜서, 한 사람에게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9사단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전두환 전 합수부장', '노태우 전 9사단장'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저자는 같은 이치로 '박정희 전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라는 호칭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한편 필자는 아예 조상들의 호칭을 본떠서 전두환에게는 '일해군' 노태우에게는 '용당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독자 제위의 생각은 어떠신지. 마지막으로 장차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직함은 무엇이 될까? '이명박 서울시장'이나 '청계군'이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