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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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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1900년대 초 상해 항구 풍경
 1900년대 초 상해 항구 풍경
ⓒ 미상(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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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한 건 1920년 12월 8일. 도착하자마자 중국대륙에 먼저 와 있는 박용만을 애타게 찾는다. 1918년 3월 호놀룰루의 법정에서 이승만은 박용만파를 '군단사람'이라고 지칭하며 "소위 군단사람이 일본 군함을 치고자 했다"고 헐뜯는 증언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박용만이 "누구든지 함부로 말해 우리의 원수를 도와주는 것이 불가한 줄 아노라"면서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이른바 '빙탄(氷炭, 얼음과 숯)의 관계'임을 세상이 다 아는데, 사랑하는 동생(愛弟)이라고 부르면서 '구구히 보고 싶다'느니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자'고 하는 걸 보면 인간적 판단이었는지 정치적 판단이었는지 이승만의 속내를 알 수 없다.  

1921년 1월 8일 이승만이 쓴 편지 : 우성(又醒) 현제(賢弟) 친전(親展)

내가 상해에 도착하면서부터 땅은 가까워졌으나 사람은 멀어졌다는 느낌을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네. 그러기에 누차 배군(주 - 배병헌은 네브래스카 주립 사범대학을 다녔고 유일한과 함께 소년병학교 생도였음. 1916년 상해로 건너가 사진관을 운영하던 중 이승만이 찾은 듯. 박용만의 사촌동생 박용철의 매형이었음)에게 부탁하여 이 구구히 보고 싶은 마음을 대신 전하게 하였고, 아울러 이우 희경(李友喜儆)에게 부탁하여 군을 만나면 나의 미충(微衷-작은 속마음)을 힘써 여쭈게 하였다네. 바라건대 애제(愛弟)는 평범히 여기지 말게나.

생각건대 우리 두 사람의 옛날 정의는 사실 어떠했으며 동포들이 우리 두 사람에게서 기대했던 바는 또 어떠했던가. 하물며 내지의 국민들이 우리 두 사람에게 무거운 소임을 맡겨 주었으니 어찌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 충성을 극히 다하여 중인들의 두터운 소망에 보답하고 평소의 지극한 뜻을 이루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한번 문호를 달리 하고 각각 따로 기치를 세워 마침내 둘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형세를 이룬다면 국가에나 일신으로나 도움됨이 없을 것이네.
 간절히 바라건대 현제는 특별히 여러 번 생각을 더하여 한번 만나보세나. 군이 만일 이곳에 올 의향이 있다면 즉시 여비를 마련하여 왕래의 편의를 보아주겠네.

이 서신을 보는 즉시 답장을 바라네. 덧붙여 여안(旅安)을 비네.

민국 3년 1월 8일 우남(雩南) 우형(愚兄) 근(謹) 

상해 임시정부가 마련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1920년 12월 28일)
 상해 임시정부가 마련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1920년 12월 28일)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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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반년도 못된 다음 해 5월 20일 하와이로 돌아가고 만다. 군무총장으로 임명돼 그 해 2월 2일 상해에 도착한 노백린은 이승만에게 사임을 권유한다.

"전자에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외면하여 성토한다고 떠든 즉 그냥 대통령 위에 앉았다가는 좋지 않은 광경을 당하고 축출하여 정국이 와해하고 아령(我領-러시아 령)과는 영원히 결렬하게 될 것이요. 당신이 자발적으로 사직원을 제출하고 다시 이동휘와 악수하여 독립운동을 계속 진행케 합시다."라고 노백린이 말하자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오이다."라고 대답한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사임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통령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노백린과 김규식이 사임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다시 찾아가자 사임의사를 번복했다.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는 1921년 4월 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다루었으나 안창호의 중재로 일단 철회됐다. 이승만이 의정원의 의결로 탄핵되고 대통령의 직위에서 면직된 건 그로부터 4년 후인 1925년의 일이다. 이승만은 1921년 11월 11일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열강의 군축회의를 준비한다는 구실로 일찌감치 상해를 떠나고 만다. 그리고 다시 복귀하지 않았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호놀룰루의 국제장터
 태극기가 걸려 있는 호놀룰루의 국제장터
ⓒ J G Klein(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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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하와이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8월 박용만파의 '대조선독립단'에서 발행하는 <태평양시사>가 이승만파에 의해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태평양시사>가 '이승만의 행방불명'이라는 기사를 실었기 때문이다. 내용인즉슨  임시대통령의 직무로 갔다가 내부의 분열을 일으켰고 시국의 난관을 감당치 못해 아무도 모르게 도망 왔다는 거였다.

8월 2일 이승만파의 부인네들이 <태평양시사> 편집인을 찾아가 임시대통령에 대한 불경 기사를 정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편집인은 그 기사가 상해에서 보내온 소식에 의한 것이므로 정정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부인네들은 그 증거를 요구했다. 편집인은 상해의 한국적십자회 사무원이 하와이 지부장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승만씨가 다사하고 다난한 이때에 임시정부에 왔다가 내부의 분열을 일으켰으며 시국을 정돈하지 못해서 민중에게 실망을 주고, 간다는 말도 없이 없어진 까닭에 민중의 의혹이 더 심합니다. 이런 사람을 어찌 영도자로 믿을 수 있습니까. 이제는 민중의 뜻을 따라서 상당한 인도자를 구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이었다.

부인들은 증거를 보여주었는데도 순순히 물러가지 않았다. 신문사 직원들이 그들을 건물 밖으로 밀어냈을 때 뒤늦게 쫓아온 남편들이 나타났다. 부인들이 하소연 하자 그들은 신문사에 난입해서 직원들을 구타하고 기물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은 현장에서 10 명을 체포하고 부상자들을 구급차에 실어 보냈다. 오후 5시경 그 난동이 있었는데 저녁 8시쯤 이승만파 사람들이 다시 들이닥쳐 사람을 만나는 대로 행패를 하고 쇠뭉치와 다른 무기로 사람을 구타하여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다 때려눕히고 신문사 기계들을 파괴했다.

두 번째 습격 때는 23명이 체포돼 구치소에 구속됐고 재판에 넘겨졌다. 위 내용은 하와이 영자신문 <퍼시픽 애드버타이저>와 <호놀룰루 스타 블리틴>에 보도된 것들이다. <퍼시픽 애드버타이저> 8월 3일자 기사를 다시 읽어보자.

"재작일 저녁 양차 습격에 '태평양시사' 사무소는 파괴를 당하고 5인은 중상했는데 한인 10명은 습격과 구타에 걸리어 보석금을 걸고 보방됐고 그 밖의 23인은 구류를 당해 순검에게 조사를 당하는 중이더라.

제1차 습격의 정형 - 순검의 보도를 의한 즉 <태평양시사>에서 한국부인 자선회의 어떤 회원을 공박하는 글을 게재했는데 작일 하오에 그 회의 회원 10명이 신문사에 와서 신문사원과 쟁론을 시작한지라. 그 여인들의 순검에게 고하는 말을 의지하건대 그들이 그 사무소에 들어갔다가 학대를 받고 거리로 쫓겨 나왔다 하더라. 그런 후에 그들은 신문사로 작대해 오던 그들의 남편에게 그 사실을 고하였더라.

그리하여 그 사건이 속히 발생됐는데 그 신문사원 조셉 김은 설명하되 그 사람들이 갑자기 그 집에 달려 들어와 간사원 에스 와이함 기자 호영과 기타 사원들에게 달려들어 사람을 치며 사무소를 파괴하는데 방안 모든 즙물을 파상한지라. 경관이 와서 소요를 진압하고 한인 10명을 체포하고 피상한 사람들은 구급병원으로 보내였더라.

제2차 습격의 정형 - 그 소요가 5 점쯤에 됐는데 김은 말하되 자기가 그날 저녁에 모든 파상하고 어지러운 것을 청소하기 위해 사무소에 가 일을 시작하려는 중 8시가 조금 넘어 제2차 난당이 갑자기 그 신문사로 들어와 사람을 만나는 대로 행패를 주며 쇠몽둥이와 기타 다른 무기로 사람을 구타해 그 곳에서 일하던 사람을 다 때려눕힌 후 신문사 기계 파괴하기를 시작했는 바 김의 말을 의지하건대 라이노타입 활판기계를 쇠망치로 쳐 파상했더라. 그 일을 순검에게 알리어 소요를 진압시킨 후에 한인을 3개 경무청 수레에 실어다가 경찰서로 보냈더라. 탐보원(기자를 뜻하는 것 같음) 엠 스위프트는 엎어진 책상 아래 넘어져 있는 두 사람을 찾아내 병원에 보내였더라. 그 후에 순검들은 그 인근에 있는 해동여관에 침입했으니 탐보원의 말이 피투성이 한 한인 여러 사람들이 숨은 것을 찾았더라.(하략) "

호놀룰루 시청
 호놀룰루 시청
ⓒ J. Bradshaw(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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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자 <스타 블리틴>의 논평은 이랬다.

어제 밤에 난당의 양차 습격으로 태평양시사 신문사 사무소와 출판기계를 파괴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무법 패악한 행동이다. 이는 한인들의 자제력 부족을 드러낸 것이다. 정치상 의견대립으로 이곳에서 무법한 난동을 일으키는 것은 한인사회에 반사(飯事, 밥 먹는 일)'가 됐다. 이곳에 거류하는 한인 중 책임을 가진 이는 관리와 합력해 그 습격을 행한 자들을 속히 알아내어 법의 심판을 받기를 원한다. 호놀룰루는 난당들이나 난당의 폭행을 원치 아니한다.

<스타 블리틴>이 논평한 대로 '무법한 난동을 일으키는 것은 한인사회에 반사가 됐다. 그만큼 박용만파의 독립단원과 이승만파의 동지회원들은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개인적인 교류는 곧 적과의 내통으로 처벌대상이었다. 반대파 사람과 말을 하면 5원 벌금, 손잡고 인사하면 10월 벌금, 무슨 물건을 매매하면 백원 벌금에 처했다는 것이다. 이는 남한의 국가보안법에서 사전 승인 없이 북한동포와 접촉할 경우 형사처벌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리처드 알렌(Richard C. Allen)은 1960년 발간된  '한국의 이승만(Korea's Syngman Rhee)'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하와이에 있는 망명결사(亡命結社) 내부의 혹심한 파쟁을 통해서, 이승만은 음모와 암살을 무기로 하는 정치집단 사이에서의 생존경쟁 수단을 체득했다."

하와이는 물론 귀국 후 한국에서 벌인 파쟁과 이승만의 대응 노하우는 이미 구한말 가두투쟁과 고문과 투옥을 통해 체득되지 않았을까. 필자의 견해다.

11월 11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열강의 군축회의에서 로비활동을 하기 위해 가던  이승만은 8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 다음 날 저녁 국민회가 마련한 환영만찬회에서 그가 한 연설의 일부를 옮긴다.

1906년 대지진으로부터 완전 복구된 1920년대 샌프란시스코 거리(Market St.)
 1906년 대지진으로부터 완전 복구된 1920년대 샌프란시스코 거리(Market St.)
ⓒ 미상(저작권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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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는 내지에서 붙잡고 있소. 북경에서 처음부터 무정부주의의 행동을 하는 박용만 일파의 소수는 입족(立足)할 땅이 없으니 상해와 원동 한인들이 이 정부를 원하며 국민대회를 하는 것은 백성의 원하는 바가 아니요 바라는 바도 아니외다." 

이 연설에서 박용만을 언급했다. 상해에 도착해서 어리석은 형(愚兄) 이승만이 어진 동생(賢弟) 박용만에게 보낸 편지의 애틋한 호칭 즉 '사랑하는 동생(愛弟)' 대신 제거 대상의 정적으로 호칭하고 있다.

북경에서 군사통일회의(국민대회가 아님)를 열게 된 건 '간도참변' 때문이었다. 청산리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해 일본군은 수만 명의 동포들을 살상했고 독립군들은 시베리아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됐다. 여러 소수부대로 분산된 독립군의 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또 임시정부는 만주의 무력 항쟁을 지원할 능력이 없기에 그 존재를 부정하게 됐던 것이다.   

이승만은 연설 말미에 이런 말도 했다.   

"그런고로 나는 국민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은 전에도 그랬지만은 지금은 더욱 정부를 받들어야 하겠소. 지금 소수배들이 감히 정부가 없나니 소수인의 정부니 하는 행동이 있소. 나는 이전에 등뼈 없는 사람의 모양으로 모든 무리한 행동을 다 받았고 다만 그들을 무마하여 그들이 양심을 발하기를 바란 까닭이외다. 그러나 지금 형편은 어떠하오? 상해와 북경 한인의 행동이 심히 악하여 그대로 버려둘 수 없는 형편이라 그러므로 나는 책임으로 말하는 바 백성은 충의를 다하여 정부를 옹호하기로 나서라 하는 것이요."

이전에 등뼈 없는 사람의 모양으로 모든 무리한 행동을 다 받았다고 말하는데 하와이 경무청이 고개를 흔들 정도로 걸핏하면 고소를 일삼던 장본인이 누구였던가. 또 '더욱 정부를 받들어야 하겠소'는 어디서나 받들림을 받겠다는 그의 제왕적 사고가 아닌가.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태그:#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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