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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면서

<거꾸로 보는 고대사>
 <거꾸로 보는 고대사>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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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자주 불렀던 응원가 가운데 <막걸리찬가>가 있었다. "만주 땅은 우리 것, 태평양도 양보 못한다!"로 끝나는 노래. 거나하게 취해서 부를라치면 광활한 대륙의 웅혼한 기상과 드넓은 대양의 포효가 온몸으로 느껴졌던 노래.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이란 가사를 담은 운동권가요 <광야에서> 역시 같은 부류의 노래다.

고구려사를 배우거나, 신라의 '불완전한' 통일을 생각하거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불현듯 만주의 광활한 땅덩어리를 연상한다. '그때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이런 문제를 던지지 않은 한국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잃어 버린 제국' 고구려를 향한 우리의 애끓는 사랑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왜 그런가!

오슬로 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의 신간 <거꾸로 보는 고대사>가 출간됐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귀화한 박노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한국인이되, 한국인이 아니며, 한국학 전공자이되, 한국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박노자. 타자이면서 우리의 자아를 아프게 돌아보게 하는 문제적인 인물 박노자.

4부로 구성된 <거꾸로 보는 고대사>에서 박노자는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환상 혹은 편견 내지 희망사항을 낱낱이 파괴한다. 파괴하면서 동시에 그는 21세기 동북아질서의 재편을 염두에 두면서 다가올 날을 기획한다. 이 글에서 나는 박노자의 신간에 담긴 통렬하고도 예리한 시각을 따라가면서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만주의 주인이었는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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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를 말할 때 일차적으로 드는 생각은 고구려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대표되는 영토 확장과 강성대군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자못 통쾌해지는 것이다. 박노자에 따르면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작용하는 '강성한 우리민족' 담론은 개화기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신채호와 박은식 같은 항일투사뿐만 아니라, 일제에 부역한 최남선도 같은 길을 걸었다.

"<독사신론>에서 신채호는 단군이란 정복자가 심양과 요동의 영토를 두루 평정한 덕에 만주가 우리 민족의 발상지가 됐다고 주장했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한국과 만주>라는 논설에서 그는 '한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한민족이 강성하고, 다른 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한민족이 쇠약해진다'는 역사의 법칙을 밝혔다." (30쪽)

이런 역사이해와 서술방식은 세계 각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의 공통점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대사는 '우리의 위대성' 위주로, 현대사는 '우리의 피해'를 중심으로 서술한다는 것이다. 고대사에서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고고학과 무관하게 실제역사로 받아들이고, 현대사에서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강조하는 이스라엘 교과서를 떠올려보시라.   

역사서술은 당면한 현재적 선택의 문제다. 강성대국의 이미지를 강조할 수도 있고, 다른 종족이나 국가들과 어울리면서 교류함으로써 국경을 넘나드는 지역 공동체의 면모를 부각시킬 수도 있다. 박노자는 후자의 관점에서 고구려사를 중국과 벌인 항쟁의 역사로 보는 시각(신채호와 함석헌)과 고구려의 '만주지배' 같은 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구려는 독자적인 문화권역을 가진 제국이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공간에 있던 독자성 강한 구성원이었을 뿐이다. 강력했던 고구려의 '힘'을 사실 이상으로 과장하면서 흠모하는 것보다는 보덕의 <열반경> 이해나 담징의 화풍에 반영된 고구려 문화를 중요시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62-64쪽)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

서기 660년 백제군과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 재현 공연. 과연 신라는 민족의 반역자였을까.
 서기 660년 백제군과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 재현 공연. 과연 신라는 민족의 반역자였을까.
ⓒ 충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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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를 자랑스러워 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대조영 지휘 아래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족과 연대하여 '발해'를 건국한 후에도 교류와 선린에 힘쓰지 않은 신라의 모습에 동조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의 남북한 시대와 비견할 만한 '남북조시대'가 있었는지 물으면서 지은이는 우리의 통념을 반박한다.

"신라인들은 발해 건국에서 말갈족이 했던 구실과 아울러 발해와 고구려의 계승관계를 잘 인식하긴 했지만, 발해인들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적대감을 넘어 문화적인 이질성까지 느꼈다. 근대 민족주의 사학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신라, 고구려, 발해가 모두 한민족 계통이라는 생각은 7-9세기 고대인들의 머릿속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77-78쪽)

'통일신라론'의 폐기가 제기된 까닭을 박노자는 '좌파 민족주의' 득세와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찾는다. 신라가 반민족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여 만주를 상실하게 됐다는 비판이 고조되면서 김유신과 김춘추가 입길에 올랐다는 말이다. 반면에 을지문덕, 연개소문, 대조영에 대한 찬양에는 남북한 모두 같은 의견이라고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처럼 동질화된 한국인의 종족적 집단형상을 1500년 전 과거에 투영하여 삼국의 싸움을 동족상잔으로, 대당연합을 꾀한 신라의 행동을 형제에 대한 배신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삼국은 지배층 사이의 신화나 제례는 물론 언어와 행정체계도 서로 달랐고, 누적된 적대감까지 더해져 동족이 아닌 경쟁세력이었을 뿐이다." (98-102쪽)

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

한일 '역사문제'가 제기되면 반드시 등장하는 대립적인 견해가 있다. '한반도 전파론'과 '임나일본부설'이다. 전자는 삼국이 일본의 고대문화와 국가형성에 지대하게 공헌했다는 주장이며, 후자는 일본이 한반도의 특정지역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전자에 동조하면서 일본의 후진성을 조롱하고, <일본서기>(720)의 황당함을 비웃는다.

<삼국사기>(1145)에 따르면, 신라는 미사흔 왕자를 왜국에 볼모로 보냈고, 백제 전지왕은 왜국에 인질로 갔다가 왜인 친위대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즉위했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기해년 (399), 경자년 (400), 갑진년 (404) 세 차례에 걸쳐 신라, 임나가라 (가야지역), 대방(황해도지역)에서 왜인을 무찔렀다고 '광개토대왕비'에 수록되어 있다.

"경주평야와 낙동강 유역은 물론 한반도 중부지방에서도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고, 신라와 백제 왕자들을 인질로 데려가고, 백제왕 즉위에 군사지원을 해주었던 왜인들이 단순한 후진적 오랑캐였을까? 그들이 임나일본부를 세워 한반도 남반부를 다스렸다는 것은 낭설이지만, 왜국은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미친 주요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154-155쪽)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지은이의 설명을 들어보자. 

"일찍이 신라에 병합된 가야에 대해 신라와 고려 학자들이 태무심하여 한국의 사료가 부족한 것이 일차적인 책임이다. 가야만큼 일찍부터 대왜관계를 개척한 나라는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아라가야에 '대왜교역관리기관'이 부설됐는데, <일본서기>에서 이 기관에 대한 전승이 대대적으로 윤색되어 '임나일본부'라는 가상현실을 낳았던 것이다." (168쪽) 
  
고대국가, 억압과 저항의 이중주

오늘날 '조공'이라는 말은 굴욕적인 대외관계나 불평등한 국제관계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지난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재협상하면서 미국이 원하는 결과가 나온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현대판 조공외교'라는 말이 나돌았다. 불과 사흘 만에 자동차부문을 포함하여 4조 3천억 원 상당의 '미국 퍼주기'를 감행한 협상 당사자들을 비난하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고대사회에서 조공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공은 종속이 아니라, 무역과 문화 같은 분야에서 선진권역과의 교류가능성과 일정한 지역적 지위를 의미했을 뿐이었다. 고대사에서 중원과 중원 바깥의 나라들 사이에는 경제와 문화 같은 영역에서 현저한 수준차이가 있었기에 조공국에게 조공은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조공외교는 5-6세기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정통성 인정절차였다." (255-257쪽)

지은이는 조공외교의 실례를 고구려와 수나라 관계에서 지적한다. 중원제국과 전쟁을 할 때에도 전투기간을 빼면 조공을 계속하는 상황이 곧잘 발생했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598년 수나라의 첫 번째 침입을 격퇴한 다음 두 번째 침입이 일어난 611년까지 수나라에 몇 차례나 조공사절을 보냈는데, 당시에 조공은 필수적인 국제예절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박노자는 고대사회에서 조공관계가 가져온 긍정적인 면을 부각한다.

"동아시아에서 세계질서의 다른 이름인 조공질서는 역동적인 서로의 섞임, 즉 경제와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국가주도의 활발한 교류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와 함께 8세기 중반부터 10세기까지 당과 신라, 발해, 일본 사이에 전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은 평화유지 장치로써 조공·교린외교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61쪽)

글을 마치면서

'재일한국인 2세'이자 와세다 대학 문학부 교수인 이성시가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추천하는 글'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인용한다.

"과거는 고정불변이 아니며, 현재인식과 추구하는 바에 따라 과거사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바뀔 수밖에 없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연맹의 주민을 동일한 언어와 습속을 가진 민족으로 보는 것은 국제적인 이해를 얻기 힘들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학계를 비판하기 전에 고대라는 타자와 냉정하게 마주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5-9쪽)

이런 면에서 박노자는 심심찮게 되풀이되는 동북아시아 삼국의 '역사전쟁'을 종식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근대적인 민족주의를 고대사에 자의적으로 투영하지 않는 일이다. 거기서 출발하여 그는 다양성과 상호연관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새로운 고대사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고구려와 만주벌판을 말하기 전에 곱씹어 볼만한 대목이 아닌가 한다.

언젠가 연길에서 장춘에 이르는 300여 킬로미터를 열차로 여덟 시간 걸려 가본 일이 있다. 한여름 밤에 연길을 출발한 열차는 이튿날 아침 나절에야 비로소 장춘에 도착했다. 새벽녘에 잠을 깬 나는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드넓은 만주의 대지를 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 밭의 기나긴 행렬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래, 저 땅이 우리 것이라 치자. 저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아파트와 공장을 짓겠는가, 아니면 농사를 짓겠는가? 농사라면 누가 농사를 짓는단 말인가? 고구려와 만주를 목청껏 외치는 나와 당신인가? 당신 애인인가? 그도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인가!"

덧붙이는 글 | <거꾸로 보는 고대사>,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2010.



태그:#고대사, #박노자, #통일신라, #고구려, #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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