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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40년. 1970년 11월13일, 스물 두 살의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온몸을 불살라 반공 정신병동의 철벽같은 감옥에 갇혀 있던 한국 노동운동을 깨어나게 한 지 40년이 지났다.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고 사람임을 선언한 지 벌써 반세기 가깝게 지난 것이다.

전태일 40주년, 변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

그 다리에는 전태일 열사의 흉상과 그를 기리는 동판이 있다.
 그 다리에는 전태일 열사의 흉상과 그를 기리는 동판이 있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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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가고 세상은 늘 변한다. 그 사이 40년 동안 한국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바뀌었다.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은 이제 역사상 최대의 풍요를 마음껏 누리는 선진 공업국가로 탈바꿈하였다. 많은 가정이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어느 때보다도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풍요를 마음껏 누리는 대한민국으로 변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40년 전과 전혀 다름없이 여전히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화 한 통화로 해고되는 불안정 계급 비정규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인 8백만 명이 넘는다. 4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금속노조 케이이씨지회 노동조합의 김준일씨는 경찰과 회사의 탄압에 저항하다 전태일과 똑같이 분신을 기도해 생명이 위독하다. 이런 분신이 벌써 올해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로, 현재 비정규 노동자들의 처지와 형편은 극단의 선택 앞에 몰려 있다. 아니 불평등과 노예 같은 삶의 강요는 오히려 40년 전보다 더 비정하고 악랄해졌으며 더 집요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 죽음에 대한 반응은 40년 전과 전혀 다르다. 경찰도 청와대도 그리고 일반 시민들과 심지어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까지도 흔히 있는 일상의 일인 양 심드렁하게 한 번 쳐다보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일부 간부들과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분노에 몸을 치떨고 투쟁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40년 전의 엄청난 충격에 견주면 정말 세상이 원망스럽고 속상할 정도로 울림이 적다. 다윗 노동자로 8년 동안의 해고 생활을 견디고 복직한 현대미포조선의 정규직 김석진씨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동참한 뒤부터 회사의 탄압과 함께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 철저하게 왕따 당하는 현실이 달라진 세상을 보여준다(하어영, "서러워 울지 마라, 골리앗 노동자", [한겨레21], 2010. 10. 29).

낡은 구태 반복하며, 열정 잃은 한국 노동운동

실제로 대기업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은 말로는 비정규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소리 높여 외치지만, 현장 노동자들의 행동은 대부분 철저히 비정규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배제한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대기업 노조의 이런 모습은 이제는 아예 보수언론의 단골 조롱거리로 거론될 정도이다. 거기다 기업별 노조의 우물 안에 갇혀 '자판기 노조'라는 자탄이 나올 만큼 임금·단체협약 위주의 투쟁이 조합 활동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한국 노동운동은 위기를 넘어 돌이킬 수 없는 변질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한국 노동운동은 안타깝게도 스물 두 살의 청년 전태일을 환갑이 넘는 노인 전태일로 만들어 버렸다.

민주노총의 주축은 20대 청년들에서 40대, 50대 장년과 노인들로 변했다. 게다가 그 운동 방식은 '뻥 파업'이라는 용어가 단골로 등장할 정도로, 늙고 낡은 구태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한때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노동운동가들이 한국 노동운동의 역동성과 피 끓는 젊은 열정을 배우고자 줄이어 현장 견학을 오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급속하게 노쇠해 생동감이 고갈된, 꿈과 열정을 잃어버린 한국 노동운동에서 무엇인가 배우고자 찾아오는 방문자들은 거의 없다. 어쩌다 한국 노동운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전태일 40년. 오늘 우리는 진실로 겸허하게 근본에서부터 다시 한국 노동운동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왜 노동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의 궁극 목표가 무엇인지 곰곰이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임금이 오르기만 하면 노동자의 해방이 실현되는 것인지 되물어야 한다. 너무나 자주 들어 이제는 아무런 감흥조차 나지 않는 상투어, '노동자가 해방되는 세상'이란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전태일 40년, 한국 노동운동은 다시 부활하기 위해 기존의 껍데기를 철저히 깨부수어야 하며, 다시 스물 두 살의 전태일로 젊어져야 한다.

노동공동체 실천했던 '전태일 노동운동'으로 돌아가야

7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10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노동법 개정하라'는 구호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7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10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노동법 개정하라'는 구호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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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노동자 숫자가 많아지고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에 고통 받고 있다고 해서 이를 뜯어 고치고자 하는 노동운동이 즉각 발생하지는 않는다. 노동운동의 전개 양상은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자각과 인식체계의 혁명과도 같은 전환을 전제로 꽃피는 것이며, 그 배경이 되는 시대의 역사·문화 토양에 따라 품종의 변이를 보인다.

누구나 알고 있듯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1970년은 그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재탄생의 해였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 노동운동의 역사는 오늘날 분단시대의 노동운동과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함께 이전 시대의 노동운동과는 족보가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노동운동이 탄생되었다. 분명히 지금의 한국 노동운동 '생일'은 1970년 11월13일이다.

청년 전태일에게는 꿈과 바보같은 열정이 있었다. 노동자가 사람 대접을 받는 사회, 정의가 살아 숨쉬고 평화와 평등이 넘치는 공동체라는 꿈, 그리고 이를 동료들과 함께 '바보회'를 결성해 싸워 쟁취하고자 하는, 그야말로 바보같은 열정이 있었다.

청년 전태일의 꿈과 열정이 형성된 계기는 다름 아닌 '신대륙' 발견에 있었다. 왜 사회는 불평등하며 왜 노동자는 뼈 빠지게 일하는데도 늘 못살게 되는지, 당연하고도 순수한 근본적인 의문과 고민에 휩싸인 청년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이란 그야말로 번개처럼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는 이 신천지를 발견하고는 곧장 행동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우리는 늘 근본과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청년 전태일이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돌아갔듯이 한국 노동운동은 청년 전태일의 꿈과 열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집합체이며 노예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의 새로운 공동체임을 실천했던 1970~80년대 '전태일 노동운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의와 불평등 세력에 맞서 싸워 이기는 것이 평등과 평화, 우애와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자유인들의 연합체이자 노동공동체인 노동조합이 모든 노동자들을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시켰을 때 가능하다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다운 삶의 길을 안내했던 '자유인들의 생활공동체운동'

1970년대 민주노동조합은 명백하게 새로운 인간관계의 집이자 새로운 생활공동체였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퇴근하기가 무섭게 노조로 달려갔고, 열 서너 시간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서울 도봉구 창동 이소선 어머니 집으로 몰려가 밤을 꼬박 새우며 함께 웃고, 함께 떠들고, 함께 토론하곤 했다.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속에서 새로운 인간다운 삶의 길을 발견했고, 지배와 대립과 착취의 인간관계가 아닌, 서로 돕고 신뢰와 사랑과 협력을 아끼지 않는 새로운 대안의 인간관계, 대안의 사회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단순한 근로조건 개선에 머무르지 않고 그처럼 목숨을 걸고 격렬하게 민주노동조합을 지켜내려 했던 것이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핵심은 '공동체운동'이었다. 우리는 절실하게 다시 1970~80년대 '전태일 노동운동'을 호명해 불러내야 한다. 농촌에서 올라와 그야말로 파편화된 기계 부속품으로 홀로 공장에 내팽개쳐졌던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인임을 자각하고 노동공동체를 형성하는 순간 역사는 바뀐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몇 천 명에 지나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강한 인간관계와 연대로 뭉치는 것을 넘어서 공동체를 조직했던 순간, 철벽처럼 거대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막강한 자본의 힘에 맞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결합이야말로 그 어떤 총칼과 권력, 돈의 힘보다도 강하다. 전태일은 이를 실천했다. 1970~80년대 민주노동조합의 전태일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 이후 노동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공동체운동과 생활 속의 민주주의 운동, 지역자치운동, 여성운동과 소수자 인권보호운동 등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깊은 강물처럼 저류로서 흐르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공동체 사회운동이다. 한국 노동운동은 이제 새롭게 초심으로 돌아가 전태일 노동운동으로 부활해야 하며, 그 핵심은 노동조합이 공동체운동이라는 점을, '자유인들의 생활공동체운동'이라는 점을 되찾는 것이다.

'전태일 정신',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향한 꿈과 열정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대우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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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본주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공동체를 해체해야만 가능한 제도였다. 자본주의 임노동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땅에 뿌리박은 농민공동체, 마을공동체를 가차 없이 때려 부수고 공장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모래알 같은 임금노동자들을 강제로 만들어 내야만 한다.

서구에서는 지주들의 울타리치기 운동(인클로저 운동)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해서 양떼에 쫓겨 농토에서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농토에서 '해방'되어 공장으로, '자유'로운 노동자로 취업하였다. 물론 이것은 '임금노예'의 길이었다.

실제로 초기 영국 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생활 모습은 끔찍하고도 비참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채 열 살 남짓한 아동들이 탄광과 면방공장에서 하루 17~18시간씩 혹사당하고 있는 실태를 기술하면서 자본주의를 분석한 분노의 책이었다. 1970년대 한국의 공장들이 꼭 그러했고 전태일은 책을 쓰는 대신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꿈꾸며 횃불을 들었다. 마르크스는 국가 대신 자유인들의 연합체인 공동체(코뮨) 사회, 공산주의라고 번역을 잘못해서 늘 혼란을 가져오는 공동체주의(코뮤니즘)를 추구했다.

물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또한 자원 착취의 지속불가능한 생산력주의로서, 자본주의와 똑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념이었다. 또한 마르크스와 전혀 다르게 철저한 국가주의자들이었던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혁명'이란 이름 아래 공동체를 강제로 해체한 전체주의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결국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전태일의 사상과 실천은 마르크스의 서구 중심 근대 사상과 전혀 달리 한국이라는 땅에서 피어난 청년의 사상과 실천이었다. 전태일의 꿈과 열정, 사상과 실천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인간 선언이었고, 늘 푸릇푸릇하게 재생하는 지속가능한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 사상과 그 실천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낡은 이념으로 늙어갔지만, 전태일의 사상과 실천은 늘 청년으로 새롭게 부활한다.

초기 서구 노동운동 속에서도 살아 숨쉬던 '공동체정신'

서구 자본주의 초기에도 노동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조직과 공동체를 만들어 지옥같은 현실을 고치는 길 뿐이었다. 그것이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 조직들과 노동조합으로 나타났고, 하루 10시간에서 나아가 하루 8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자는 노동시간 단축 운동, 노동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미 산업혁명 이전부터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 조직을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수공업 장인들이 만들었던 중세 크래프트 길드, 즉 직인조합·동업조합의 계승자로서 '크래프트 유니온'이 직업별 조합을 결성해 활동을 벌였다. 영국 노동조합에 직업별 노조 전통이 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는 조금 달리 독일에서는 미숙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신조합주의(new unionism)에 입각한 산업별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독일 노동자들이 직종과 직업의 동료라는 의식보다 노동자계급이라는 의식을 더 강하게 갖고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역사가 작용했다.

직업별·직능별 조합뿐만이 아니다. 길드 해체 이후 직인들의 모임이기도 했던 우애협회, 우애조합을 비롯해 통신협회, 비밀공제조합 등 노동자 조직들이 수도 없이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이들 조직들은 노동조합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는 교육학습 활동뿐만 아니라 파업도 벌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함께 처음부터 협동조합운동도 강력하게 벌여나갔으며, 통신협회와 같은 정치단체도 만들어 투쟁하기도 했다.

1539년 프랑스 리옹 인쇄공들은 우애협회의 주도 아래 5개월 동안이나 파업을 벌였고, 프랑스 정부는 우애조합을 금지시키는 포고령(프랑스 최초의 노동법)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1801년 우애협회와 공제조합은 영국에서만 7200여 개나 되었다. 프랑스의 우애협회(우애조합)와 비밀공제조합은 말 그대로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었지만 또한 노동자들의 투쟁조직이기도 하였다. 이들 조직들은 초기에는 사실상 노동조합과 그리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예컨대 1790년대 미국 노동자들의 조직은 대부분 우애조합이었다.

이렇듯 일찍부터 노동자들은 노동조합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우애조합·공제조합·협동조합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 조직들은 노동조건을 바로 잡아 개선하고, 정치·사회 권리 향상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들 조직들도 하나의 사회제도로서 노동조합이 정착되었을 때처럼 임금협상과 단체협상 등과 같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 조직들이 노동자들의 강한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은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이들 조직들은 바로 노동자들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우애협회에서 노동형제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공제조합을 통해 가장 믿을 수 있는 강력한 사회안전망을 경험할 수 있었다. 또 노동조합에서 동일한 처지에,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노동조건 개선 이전에 노동자들이 서로 우애를 나누고 단결할 수 있는 공동체 정신이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새로운 공동체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서구에서도 노동조합의 본성은 공동체였고, 노동운동은 공동체운동으로서 출발했던 것이다.

노동공동체 사라진 폐허 위, 배부른 노예들의 노동운동

노동공동체가 전제되지 않는 노동조합은 사실 어쩌면 물거품과도 같은 한시 조직으로 그치기 십상이다. 오늘날 서구의 노동조합 대부분은 사회주의 지향을 지닌 조직들도 자본주의의 개혁을 추구할 뿐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목표로 내걸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노동공동체 이념 또한 거의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심지어 미국의 노동조합은 말 그대로 일종의 사업, 자본과 거래를 하는 비즈니스 유니언이즘(business unionism), 곧 '사업 노동조합주의'를 자신들의 주요 이념으로 삼고 있는 지경이다. 노동공동체는 사라진 폐허 위에 돈다발만 오고가는 순전한 이익단체로 전락해버린 것이 미국의 노동조합들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한국 노동조합이 이 길을 그대로 밟아가, 마침내 한국노동운동 또한 사멸해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노동공동체가 퇴색되거나 사라져버린 서구의 노동조합은 그야말로 노동운동의 무덤일 뿐이다. 노동조합이 새로운 공동체로서 자유로운 인간들의 상호부조 사회로 바꾸는 근거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사회구조를 배우고 사회를 바꾸기 위한 학교가 되지 못한다면,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누리고 또 평등과 사회정의가 확립되는 새로운 사회의 맹아가 되지 못한다면 그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은 결국 노예의 노동조합과 노예 노동자일 뿐이다. 초기 노동조합 공동체운동의 이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서구의 노동조합은 그저 운동경기팀처럼 하나의 사업체, 눈앞의 임금과 노동조건만 챙기는 이익단체로 전락했다.

1968년 유럽을 휩쓴 '68혁명' 당시 혁명에 참여한 학생들과 풀뿌리 노동자들이 유럽 노동조합과 공산당에 대해 "권력의 부스러기에 취해 이미 제도화된 기득권자"로, "노동귀족들"로, 심지어 "흡혈귀들"로 격렬하게 비판하고 조롱했던 것은 유럽 노동운동의 몰락을 말해주는 슬픈 삽화였다. 그 뒤 환경생태운동을 비롯한 수많은 서구 신사회운동 조직들은 철저히 노동조합을 무시하거나 경멸했다.

자본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동체' 속에서 즐겁고 찬란한 삶을 살자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대우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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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19세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자유노동자들이 농촌공동체에 존재하던 전래의 '계'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부산에서는 부두 노동자들이 이 계를 중심으로 파업을 벌여 임금인상을 쟁취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와 함께 서구에서처럼 노동조합과 공제조합을 조직해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 나서게 된다. 한국의 노동자들도 노동조합과 함께 초기에는 계나 공제조합 등 공동체를 조직해 자신들의 처지를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전국 단위 노동조직도 1920년 조직된 조선노동공제회였다.

다시 강조하건데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을 관통하고 있던 가장 주요한 노동운동 이념은 그 근본 바탕이 '공동체' 이념이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마당이자 새로운 공동체였다. 산업선교와 가톨릭청년회의 소모임은 그 자체가 강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소공동체 운동체였다. 소모임은 그 어떤 거창한 이념 학습의 조직이 아니었다. 그냥 일상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자신이 하나의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인정을 하고 인정을 받는 기초 공동체였다.

그에 바탕을 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 발돋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청계피복, 원풍모방, 동일방직,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등 대부분의 1970년대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가장 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공동체 정신과 경험이다. 1987년 이후 울산의 현대 노동자들이 경험한 것도 이 같은 노동공동체였다.(김준, 2006) 산업선교회와 가톨릭청년노동자회에 노동자들이 그렇게 몰려들었던 것도 이처럼 소모임이라는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한 사람의 노동노예를 자유인으로 변혁시켰던 인간해방의 운동이었다. 억압과 착취의 인간관계를 사랑과 평화의 평등한 인간관계로 바꾸는 사회해방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해체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애와 협동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던 공동체운동이었다.

자본은 절대로 단순하거나 무력하지 않다. 자본은 국가도 무력화시킬 만큼 엄청나고도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괴물,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변신해 있다.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자 조직을, 새로운 공동체의 싹을 무자비하게 잘라버린다. 아마존 밀림의 소수 부족조차도 이를 비껴갈 수가 없다. 지구상의 모든 공동체는 이미 해체되었거나 해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자본에 대항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작업은 사실 고통스럽고 지난한 일일 수 있으나, 또한 진실로 즐겁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1970~80년대 민주노조의 노동자들은 그런 지난하고 고통스런 일을 너무나 큰 기쁨과 각성으로 가득 차서 시작했고, 자랑스럽고 행복한 삶의 시절로 늘 새롭게 지금 현실의 실천 속에서 되새김질하고자 한다. 공동체 속에서 노동자는 비로소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물 둘 전태일의 바보 같은 열정에 스스로를 비춰보라

그런데 한국의 노동운동뿐만이 아니라 민주화운동, 시민사회운동도 어느새 이런 공동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래 87년 민주화운동 20주년의 현실을 돌아보는 기사는 그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김 몬시뇰은 명동성당에서 열린 민주항쟁 20년 기념 미사 강론에서 가슴 속에 담아온 것들을 터뜨렸다. 먼저 분노는 청와대와 정부, 국회와 각종 사회단체에서 지도적 자리를 차지한 운동권 출신 인사들을 향했다. 그는 이들을 "제도권 민주주의 인사"라고 불렀다. 이들은 도덕적 정당성을 잃었다. 과거의 희생과 경력들을 박물관의 전시품이나 박제품처럼 언제까지나 자랑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 시민은 희망과 전망을 잃었다. 독재자의 억압에서 벗어났지만, 시장의 지배를 받고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김 몬시뇰을 불안케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어깨를 걸고 서로를 돕던 연대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공동체가 사라졌다. '우리'의 실종은 연대의 정신을 잃고 동반침몰하고 있는 노동운동에서도 드러난다. 주봉희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6월 항쟁 때는 사무직 넥타이 부대들이 거리로 나와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어깨 걸고 싸웠는데, 지금은 노동자끼리도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계급이 갈렸다"면서 "비정규직 보호에 앞장서야 할 민주노총이 정규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은 조직이 됐다"고 말했다.

6월 항쟁 당시 현대해상화재보험 노조 부위원장으로 '넥타이 부대'를 이끌었던 홍순계 현대해상 전략채널본부장은 "무조건 임금을 올리면 그 피해는 협력업체의 노동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을 알면서도 내 몫만을 늘리려는 풍토가 서글프다"고 말했다.

- 한국일보, "민주화 20년 공동체의 가치는 어디로 숨었을까"(2007. 6. 9)

역사가 우리의 삶을 좀 더 성찰하게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라면, 우리는 전태일의 꿈과 열정이라는 거울을 다시 꺼내들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1970~8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공동체운동이라는 거울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한국 노동조합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노동운동 조직으로서 거듭나려면 무엇보다도 전태일의 사상과 실천을 배우고, 1970~8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공동체운동을 새롭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생활공동체 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으로 전환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의 새로운 인간관계와 새로운 공동체로서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풀뿌리 키우는 협동조합운동, 지역노조운동 활성화 돼야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생산협동조합을 비롯해 다양한 협동조합과 공제조합 등등 수많은 노동자 공동체 조직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자본에 대항한 반대와 저항의 투쟁을 넘어서서, 새로운 생산조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노동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에너지-자원 고갈-기후변화의 위기 앞에서 지속 불가능한 삼성 같은 재벌 기업을 넘어서서 지속가능한 생산 협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이 "자본은 노동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펼쳤던 협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은 서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흔치 않은 유산이다.

우리는 임금 단협 위주의, 심하게 말하면 노예의 조건 개선 운동에서 한 걸음 나아가, 자유인들의 소통과 교류, 한국 사회를 풀뿌리에서부터 바꾸고 한국 정치를 밑동에서부터 바꾸는,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자유인들의 공동체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전태일 40년, 우리가 다시 기억하고 호명해서 불러내야 하는 것은 전태일의 그 맑고 순수했던 청년의 꿈과 바보 같은 열정이다. 공동체운동으로의 일대 각성과 전환을 불러 올 수 있는 노동운동의 이념과 실천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한국 노동조합은 박제화 된 법정기구의 늪과 관료주의의 수렁으로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어 가고 있다. 과거의 화석화된 영광을 카세트 안의 낡은 테이프처럼 반복해서 틀고 있거나, 약간의 치매 증상까지 보이는 환갑이 넘은 중늙은이의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고 하면 너무 가혹한 평가일까?

산별로의 전환은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고지선의 목표로 삼는 것은 어쩌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물통 열쇠를 가지고 와야 할 때 자동차 키를 가지고 오는, 본말이 전도된 구호일 수 있다. 사실 기업별 노조 체계가 뼛속까지 뿌리내려 개별 기업의 종업원의식이 강고하게 작용하고 있는 한국에서, 산별 노조로의 전환이란 아이가 엄마를 낳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일이다. 비정규직을 포괄하는 조직 형태는 오히려 지역공동체운동으로서의 지역노조이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은 이미 여성노조나 지역일반노조들의 실천으로서 검증이 되고 있다.

노동운동, 청년의 꿈과 열정을 부활시키라

전태일이 오늘의 노동운동, 나아가 개인의 삶과 이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전태일과 1970~80년대 민주노동운동의 역사가 오늘에 던지는 절절한 호소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청년의 꿈과 열정을 부활시키라는 호소이다. 노동운동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생활공동체운동이라는 노동운동의 뿌리에 대한 호소이다. 노동자들은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라는 각성과 선언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체 사회, 새로운 공동체 국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거대한 전환에 대한 호소이다. 노예의 운동에서 자유인들의 공동체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정언명령이다.


태그:#전태일,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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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민주적 대안언론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역사와 노동과 생태 문제에 관심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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