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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기행 여섯째 날(8월 17일)은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는 흑룡강성(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시작했다.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오전 7시 50분 하얼빈역에 도착한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현장에서 잠시 묵념을 올렸다.

기차역 광장에서 바라본 하얼빈 시가지. 서울보다 화려한 지역도 있고, 낙후된 지역도 많았습니다.
 기차역 광장에서 바라본 하얼빈 시가지. 서울보다 화려한 지역도 있고, 낙후된 지역도 많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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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은 1천만 인구도시답게 복잡했는데, 광활한 대지의 정기와 끈덕지고 질긴 삶의 터전을 상기시켰고, 길가 잡상인과 고층빌딩이 많아 서울과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러시아와 중국 문화가 뒤섞인 도시여서 그런지 조금 색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다.

환영 피켓을 들고 기다리던 가이드는 10분 거리에 있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낡은 건물들은 일제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군산의 적산가옥들을 떠오르게 했다. 흑백사진을 통해 봤던 식민지 시대의 가슴 아픈 장면들이 스쳐갔다. 

가이드는 식당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흑룡강성에서 가장 큰 도시 하얼빈은 인구가 약 1천만 명으로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에는 송화강 주변에서 얼음축제(빙등제)가 열리고, 여름에는 최고 섭씨 38도까지 올라가지만,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륙지대여서 그늘이나 물가에 가면 시원하다고 소개했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 택시가 한가롭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 택시가 한가롭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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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게 내걸린 중국 상점 간판이 즐비한 복잡한 도로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와 눈에 익은 유럽식 둥근 지붕 건물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중국에서 가장 동북쪽에 위치한 하얼빈이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침 식사는 특유의 차이나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중국 음식을 먹었다. 뷔페식이었는데, 음식들이 고소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아서 좋았다. 우리 음식처럼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입맛을 잡아당겼는데, 새우가 들어간 야채 무침은 별미였다.

'731부대' 방문

아침을 맛있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니까 오전 9시 10분이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노닥거릴 시간도 없이 버스에 올랐는데 4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하얼빈시 평방구에 위치한 '731부대' 기념관이었다.

중국인들이 학교로 사용하다가 2002년부터 일제가 자행한 생체실험 자료를 전시해오고 있다는 731부대 기념관 전경.
 중국인들이 학교로 사용하다가 2002년부터 일제가 자행한 생체실험 자료를 전시해오고 있다는 731부대 기념관 전경.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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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는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하얼빈에 세워진 세계 최대 규모의 비밀조직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 관동군이 만주지배를 발판으로 세균전을 연구하던 부대라고 하는데 겉으로 보기엔 학교 건물 같았다. 실제로 중국은 한때 학교로 사용했었다고.

1932년 설립 초기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 '동향부대'로 불리다가 1939년 극비리에 세균 실험 기지를 만들어 한국인을 비롯한 중국 소련 영국 등 여러 나라 포로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의 수가 무려 4000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운동장 정면으로 본부 건물이 보였다. 건물 옆 비석에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생화학 무기와 생체실험을 위해 조선, 중국, 소련, 몽골인 등 300명 이상의 무고한 생명을 독가스, 동사, 세균 등의 실험 '마루타'(통나무)로 사용했다는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루타를 해부하는 장면. 인형이지만 차마 눈뜨고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마루타를 해부하는 장면. 인형이지만 차마 눈뜨고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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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내부에는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재현한 모형과 익명으로 남은 '마루타'들에 대한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나 처참해서 짧은 생각으로는 희생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으며 죽어갔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생체실험에 이용된 사람을 '마루타'라고 부르게 된 데는 731부대를 제재소라고 불렀기 때문에 농담에서 유래했단다. 생체실험에는 영아, 노인, 임산부를 가리지 않았는데, 실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마취 없이 해부가 이뤄지기도 했다는 설명은 학생들과 함께 듣기 민망할 정도였다.

독가스 실험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실을 확장공사 하고 있다는 한쪽 건물 통로. 한여름인데도 으스스 했습니다
 독가스 실험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실을 확장공사 하고 있다는 한쪽 건물 통로. 한여름인데도 으스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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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침한 왼편 건물 통로는 독립군을 고문하던 일제 때 지은 경찰서 지하실을 떠오르게 했다.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물어봤더니 그동안 발견된 731부대 자료 전시관 확장공사를 하고 있다며 공사가 완료되면 일제 잔악상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날 거라고 했다.

사람을 거꾸로 메달은 다음 얼마나 견디는지, 임신부에게 매독균을 주입해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공기를 빼내고 압력을 낮추면서 인체가 얼마나 견디는지, 사람을 물속에 담그고 얼마나 견디는지, 사람과 말의 피를 교환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 등 설명을 듣는 순간마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731부대에서는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 지휘 아래 생체해부, 동상실험, 무기시험, 전염병 및 외과 시술 등으로 수백 수천의 '마루타'를 살해했는데, 팔다리 절단과 성전환 수술, 살아 있는 마루타 소각처리 등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악하여 당시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  

오래된 흑백사진과 가이드 설명이 전부였지만, 얼마나 처참하게 비쳐졌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731부대' 설립되기 이전부터 왜놈들이 조선 백성을 개돼지 취급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조정래 소설 <아리랑> 한 대목을 읊어본다.

"의병을 한 사람이라도 잡으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개처형을 하는 것은 으레 하는 짓이었고, 원주에서는 의병을 발가벗겨 나무에 묶어놓고 얼굴에서부터 가죽을 벗겨가며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박수를 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평산에서는 남녀 수십 명을 잡아다가 얼음을 깨고 강물에 밀어 넣어 얼려 죽였고, 홍천에서는 장날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의병 시체를 펄펄 끓여대며 장꾼들을 줄 세워 구경시켰고, 순창에서는 의병 둘에게 억지로 물을 먹여 배를 팽팽하게 부풀린 다음 배 위에 널빤지를 놓고 일본군 여러 명이 올라가 마구 발을 굴러대 물을 뿜어대는 모양을 장꾼들에게 구경시켰고, 임실에서는 의병을 잡지 못하자 한마을 사람들을 전부 땅에다 가슴까지 묻어놓고 마치 풀을 베듯이 목을 쳐죽였다는 것이었다···." <아리랑> 2권 127쪽에서

을사늑약(1905년) 3년 후인 1908년 봄날 조선 청년이 일제 앞잡이 스티븐스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했다는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의병이 궐기했다. 이에 밀정을 앞세워 의병 소탕작전에 나선 왜놈 헌병과 순사들이 무고한 양민까지 잡아다 처참하게 학살했음을 알리는 대목인데, 731부대 이전에 이미 생체실험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가이드 설명과 빛바랜 사진을 통해 일제의 생체실험 현장을 확인하고 나오니까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한편 의사 출신이면서도 가족과 형제를 생체실험장으로 데려다 살면서 마루타를 공급하는 직책을 맡겼다는 731부대 사령관 '이시이 시로'의 뇌 구조에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국제 전범자와 거래한 미국

1945년 8월 일왕의 항복 선언과 함께 왜놈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조선 땅을 떠났다. 그러나 그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다시 오겠다고 벼르는 앙심의 눈물이었다. 이렇다 할 사죄 한마디 없이 역사를 왜곡, 날조하면서 강탈해간 문화제를 쥐새끼 오줌 싸듯 찔끔찔끔 반환하는 행위만으로도 그들의 사악한 속셈이 들여다 보인다.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지휘한 이시이 시로 중장. 국제 전범자임에도 전쟁이 끝나고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누가 봐줬을까요?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지휘한 이시이 시로 중장. 국제 전범자임에도 전쟁이 끝나고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누가 봐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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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극동 국제 군사재판 때 일본의 생체실험 문제가 언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는 실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미국에 제공하는 대가로 처벌을 피해 갔고 범죄자들이 석방되었다고 하니 실질적으로 처벌을 막은 것은 미국이 되겠다. 

건장한 젊은이들부터 노인, 임신부, 아이들까지 개돼지 다루듯 했던 731부대 대원들은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전범자로 처벌받기는커녕 대학교수, 병원 원장, 군의관 등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은 자국민 몇 사람이 일본에서 생체실험을 당해 살해됐을 때는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처벌하였단다. 그러나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에 가담한 범죄자들은 처벌하지 않고 보호해주었다니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봐야 할지 지금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생체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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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종안

덧붙이는 글 | 현지 가이드와 박영희 시인의 설명, ‘2010만주기행’ 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태그:#731부대, #생체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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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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