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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논에 서 있는 허수아비. 들녘이 황금색으로 변하고 참새 떼가 갑자기 불어난 것을 보면서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마을 앞 논에 서 있는 허수아비. 들녘이 황금색으로 변하고 참새 떼가 갑자기 불어난 것을 보면서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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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아저씨들이 바빠지는 계절. 들녘에서 익어가는 벼들은 누렇다 못 해 붉은 빛깔을 띱니다. 열대성 폭우가 자주 쏟아졌던 올해는 작황이 예상보다 훨씬 줄어들 거라는 게 농민들 견해여서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쌀값이 내려도 수확은 많이 해놓고 봐야 하는데.

여우비처럼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필자가 사는 마을은 그제도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요즘은 비가 조금만 내려도 벼에 치명타라고 합니다. 비를 맞으면 수확량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이미 여물어 자빠진 벼에 새싹이 돋아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가을에는 햇볕이 쨍쨍 쬐어야 알곡이 제대로 영급니다. 그런데 무엇을 심었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답니다. 이때쯤 벼는 가물어야 좋고 배추는 비가 내려야 잘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걸 보면 세상에 다 좋은 것은 없는 모양입니다.

어제(4일)는 동네결혼을 해서 예순이 다 되도록 농사만 지었다는 이웃마을 하씨 아주머니(58)가 도로변 배추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귀한 보물이라도 숨겨놓은 사람처럼 밭고랑 사이를 오가면서 배춧속을 들여다보고 있더군요. 궁금해서 다가가도 일에만 열중이었습니다.

배추벌레 잡는 하씨 아주머니. 벌레로 인한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배추벌레 잡는 하씨 아주머니. 벌레로 인한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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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하이고, 지가 밭에 나온 걸 어치게 알고 나오셨댜. 아저씨 참 오랜만이네유."(웃음)

- 비 오는 날 아주머니가 일하시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요. 오늘 같은 날도 배추밭에서 할 일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비가 내려도 헐 일이 많쥬. 저기 이랑 위에 시컴시컴 헌 것들이 저번에 뿌려준 거름유, 그런디 하나도 녹지 않고 그대로 있잖유. 그려서 땅에다 묻어 주니라고 나왔어유. 땅이 촉촉헐 때 흙도 좀 골라주고."

- 조금 전 하얀 가루를 뿌리시던데 혹시 농약인가요?
"농약이 아니라 비료 조까 줬어유. 힘없어서 못 일어나는 놈허고, 못 생긴 놈들만 골라서 쪼꼼씩 줬지유. 그나저나 비를 흠씬 맞어야 비료랑 거름이 잘 녹아가꼬 배추가 쑥쑥 클 튼디 걱정이네유."

- 배추는 언제 심었는데요.  
"한 달이나 되얐나? 처서(處暑) 며칠 지나서 심었쥬, 앞으로 한 달 남짓은 지나야 뽑아먹을 틴디 이렇게 벌레가 먹었네. 요새는 농약을 안 허고는 농사를 지어 먹들 못 혀유. 우리 아자씨가 아까 집으로 가질러 갔으니까 약은 좀 있다가 뿌려야쥬."

벌레들이 파먹은 배추. 그냥 놔두면 배추를 한 포기도 먹지 못한답니다.
 벌레들이 파먹은 배추. 그냥 놔두면 배추를 한 포기도 먹지 못한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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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고랑의 배추벌레들. 한 포기에 벌레가 4-5마리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밭고랑의 배추벌레들. 한 포기에 벌레가 4-5마리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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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배추벌레들이 속에서 새로 돋아나오는 연한 배춧잎을 파먹는다고 투덜거리면서 한 포기에서 2-3마리씩 잡아냈습니다. 파란 벌레를 보니까 호기심이 동하더군요. 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구멍이 뽕뽕 뚫린 배춧잎이 많았습니다. 장난이 아니더군요.

논농사도 지으면서 고모네 밭을 빌려 여름에는 고추, 가을에는 김장용 양배추와 경종 배추, 무 등을 심었다는 아주머니는 벌레가 뜯어 먹으니까 약을 안 할 수가 없다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먹을 채손디도 약을 뿌려야 혀유"라며 하소연도 덧붙였습니다.

배추벌레 약을 살포하는 아저씨. 왼편은 양배추, 오른쪽 앞에는 경종배추, 뒤쪽엔 무를 심었더군요.
 배추벌레 약을 살포하는 아저씨. 왼편은 양배추, 오른쪽 앞에는 경종배추, 뒤쪽엔 무를 심었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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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아주머니는 배추 심어서 돈 버셨네요. 요즘 한 포기에 만 원씩 한다는데.
"하이고 아자씨도. 밭에서 크는 어린 배추를 팔어먹을 것도 아니고, 나 같은 사람한티는 지금 비싸 봐야 아무 소용 없어유. 김장철 되믄 똥값 되니까유. 인자 보셔유 그렇게 되는가 안 되는가. 지금 사 먹는 사람만 죽어나쥬." 

- 아주머니는 올해 몇 포기 심었는데요? 아무리 똥값으로 떨어져도 올해는 배짱부리면서 팔겠던데요.
"몇 포기인지 자세히 모르겄네요. 저는 먹을 만치만 심었응게 상관없지만, 크게 허는 사람들은 만 원이 아니라 삼만 원이 간다고 혀도 소용없쥬. 밭떼기로 포기당 400-500원씩 펄써 팔어버렸응게. 하이간 심는 사람 허고 사 먹는 사람만 죽어난당게."

- 4대강 공사 때문에 배추 값이 올랐다고 하던데 아주머니도 들어보셨어요?
"그려서 올랐는지 자세헌 것은 몰로지만, 다들 말리는 그런 공사는 헐 일이 아니쥬. 허드라도 촌사람들 먹고살게 혀놓고 일을 벌이든가. 겉으로는 촌도 잘사는 것 같지만, 빚덩어리 안고 사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거든유. 그나저나 날도 좀 따땃허고 비가 좀 와야 헐틴디···."  

- 벼가 잘 영글려면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쬐어야 하는데 비를 기다리다니요?
"나락만 가지고 밥을 혀먹을 수 있간디요. 배추로 김치도 담가 먹어야지. 서로 공편허게. 그러고 봉게 서로 꼬였네. 비 오믄 배추가 웃고 나락은 울고, 비가 안 오믄 배추가 울고 나락이 웃는 식으로···" (웃음) 

- 그래도 벼농사도 짓고, 밭농사도 지으니까 날씨로 크게 가슴 아파할 일은 없겠네요.
"큰놈이 아프믄 막내가 걱정 되디끼, 고추밭에 병충해 생기믄 벼도 걱정돼유. 다들 자식 같어가꼬, 그러니 배추 한 포기, 무 하나라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유. 촌이서 살응게 다 그 재미쥬."

요즘 농민은 TV 일기예보에 관심이 많습니다. 농작물 피해를 예방하고 수확량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겠는데요.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 한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하씨 아주머니도 다를 게 없더군요.

배추농사 짓는 사람은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반갑고 기온이 내려갈 거라고 하면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벼농사 짓는 농민은 비가 내릴 거라는 뉴스를 들으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처서에 비 오면 십 리에 곡식 천 석을 감한다'는 속담이 꼭 처서만 두고 하는 말은 아닐 터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배추농사, #벼농사,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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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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