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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펑의 개구쟁이 1·2 (라트 글·그림+박인하·홍윤표 옮김,꿈틀 펴냄/2008.8.10./8800원씩)

 

한가위날에는 보름달이 아닌 비구름을 보았습니다. 이튿날 날씨는 몹시 맑아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이튿날 밤에는 보름달이 매우 밝아 집안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느끼며 잠자리에 듭니다. 새벽에도 달은 아직 넘어가지 않아 하얗고 밝은 빛을 듬뿍 느끼지만 깊은 밤만큼은 아닙니다.

 

우리 살림집이 멧부리에 깃들어 있기에 환하고 하얀 달빛을 느낄 수 있다고 새삼 깨닫습니다. 밤나절, 아이를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하고 이야기할 수 있고, 밝디밝은 달빛에 비치는 저녁하늘 구름이 또렷해 아이는 '구름!'하고 외칩니다.

 

지난해나 지지난해에 인천 골목동네에 살면서도 달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우리 살림으로는 아파트에 깃들 수 없기도 하지만, 돈이 있다 해도 아파트에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이 나라에서는 집이 아닌 재산이고 마는 아파트를 보금자리로 삼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더군다나 아파트에 살면서 무슨 하늘과 땅과 풀과 나무를 벗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골목집에 깃든다 하여도 하늘이든 땅이든 풀이든 나무이든 가까이하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골목집에 깃든 숱한 이웃들 또한 아파트사람과 마찬가지로 돈벌이에 바쁘고 텔레비전에 매여 있거든요.

 

그래도 우리 식구는 인천 골목동네에 깃들며 언제나 달을 보았습니다. 아파트숲과 견주면 훨씬 적은 밤거리 등불이기에 골목동네에서는 '썩 안 밝아'도 보름달을 볼 수 있고, 밤거리 등불이 거의 없는 후미진 골목길에서는 '꽤 밝은'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시골 살림집에서 지내며 햇볕을 더욱 따사롭게 느낍니다. 아니, 더욱 따사로울 수밖에 없고, 한결 따사롭기 마련입니다. 집 안쪽에만 머물면 도시이든 시골이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집 바깥쪽에서 일하고 놀 때에는 도시와 시골은 사뭇 다릅니다. 해가 쨍쨍 날 때에는 쨍쨍 나는 햇볕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고 이불과 빨래를 말리면서 '따뜻하다'고 느낍니다. 비가 펑펑 쏟아질 때에는 골짝과 도랑을 따라 콸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빨래는 언제 마를까. 곰팡이가 걱정스러운 걸'하고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밤거리 등불 때문에 밤에도 깜깜하다고 느끼기 어려웠으나, 시골에서는 밤이면 아주 깜깜합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깜깜한 길이 눈에 익습니다. 밤에는 별을 보고 새벽에는 안개를 봅니다. 가을로 접어들고 겨울 문턱이 가까우니까 새벽마다 안개가 자욱합니다. 국민학생이던 1980년대에는 인천에서도 봄가을 새벽에는 늘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이제는 인천이든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이든 이 나라 큰도시에서는 안개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큰도시 하얀 물방울 무리는 안개라 할 수 없고 '스모그'라 해야 어울립니다. 영어로는 'smog'이고 우리 말로 하자면 '먼지구름'이나 '먼지안개'인 셈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시에 안개가 사라지고 스모그만 가득한 줄 뻔히 압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신문과 방송에 나옵니다. 그런데 뻔히 스모그인 줄 알면서 스모그가 왜 생기는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모그가 사라지고 안개가 돌아오도록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모그가 누구 때문에 생기는지를, 스모그가 언제 생기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안개가 없지만 이슬도 없고 성에도 없습니다. 아마 그림책에는 있겠지요. 그림책에는 논도 있고 밭도 있습니다. 그림책에는 개구리도 있고 맹꽁이도 있습니다. 그림책에는 여우도 있고 곰도 있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애틋하게 즐깁니다만, 참말 아침이슬을 맑고 싱그럽게 마주하지 못하는 채 즐기는 노래 <아침이슬>인 요즈음입니다.

 

정부가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은 생명이 꿈틀거리는 물줄기를 죽이는 끔찍한 짓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면 4대강 아닌 다른 물줄기는 어떠하지요. 4대강을 젖줄로 삼아 수도물을 끌어들이는 도시 터전은 어떠한가요. 4대강 사업을 막을 수 있으면 우리 터전은 살아나는가요. 4대강 사업이라도 막아내야 우리 삶터가 그나마 낫다 할 만한지요. 4대강 사업을 몰아낼 우리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좋을까요.

 

만화와 같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엮은 <캄펑의 개구쟁이> 1권과 2권을 넘깁니다. 말레이지아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을 벗삼으며 살다가 도시로 떠나 온 한 아이 삶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책(또는 만화책)입니다. <캄펑의 개구쟁이>에 담긴 이야기는 머리로 지어낸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그림책으로만 바라보는 해와 달과 별이 아닌, 온몸으로 부대끼며 받아들인 해와 달과 별 이야기를 담습니다. 텔레비전 방송이나 다큐멘터리로만 배우는 풀과 꽃과 나무와 짐승이 아닌, 온삶으로 복닥이며 맞아들인 풀과 꽃과 나무와 짐승 이야기를 싣습니다.

 

지난 2006년에 숨을 거둔 만화쟁이 신영식 님은 '짱뚱이' 이야기를 꾸준히 그렸습니다. 당신이 살아온 어린 나날을 떠올리며 당신 옆지기와 함께 '한국땅 1960년대 시골 어린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60년대에도 냉장고를 쓰고 자가용을 모는 한국사람이 있었습니다만, 훨씬 많은 한국사람은 자연에 터를 내리고 살았습니다. 만화쟁이 길창덕 님은 '꺼벙이'를 내세워 '한국땅 1970년대 골목동네 어린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만화쟁이 김수정 님은 '둘리'와 '소금자'와 '오달자'와 '막순이'와 '동동' 들을 내세워 '한국땅 1980년대 여느 어린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가 되고 2000년대가 되며 2010년대가 되는 동안 이 나라 이 땅 여느 어린이 삶이 묻어나는 살가운 그림이나 만화는 도무지 만나지 못합니다. 어쩌면 '여느'라 이름붙일 만한 삶을 찾을 수 없기도 할 텐데, '여느'라는 이름이 붙는 삶은 하나같이 입시지옥에 얽매이면서 온통 아파트와 자가용과 텔레비전에 사로잡힌 나날이라, 굳이 만화나 그림으로 담아 널리 선보일 만한 이야기로 엮을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자연과 어깨동무하는 삶에서 몸으로 헤아리며 받아들이는 흐름은 어느덧 사라졌습니다. 자연을 따로 배워 지식으로 삼는 흐름만 넘실거립니다. 학교는 아름다운 배움터가 아닌 입시지옥 싸움터입니다. 동네는 좋은 일터이자 놀이터가 아닌 그저 잠자는 곳인데다가, 두 다리로 동네를 거닐 일이 없습니다. 시골마을이나 골목동네는 집집마다 생김새와 모양새와 삶이 달라 언제나 즐거이 쏘다니며 이웃집 마실을 할 만한 터전이지만, 아파트숲은 두 다리로 거닐 만하지 않을 뿐더러 온통 똑같은 삶에 자동차 없이는 움직이기 까다로운 터전입니다. 아파트 툇간에 황조롱이가 둥지를 틀기도 한다지만, '모든 아파트 툇간'에 들새가 둥지를 틀지는 않습니다.

 

어떤 눈길로는 <캄펑의 개구쟁이>나 "짱뚱이 만화"는 옛이야기를 떠올리도록 이끄는 그림이나 만화입니다. <캄펑의 개구쟁이>를 그린 라트 님이나 "짱뚱이 만화"를 그린 신영식 님은 오늘 우리 삶보다는 옛이야기(추억)를 남기거나 나누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짱뚱이 만화"에 나오는 듯한 시골마을 삶이나 놀이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골마을은 예나 이제나 있습니다. "꺼벙이 만화"나 "김수정 만화"에 나오는 도시 골목동네 터전을 쉽사리 못 찾는다 말할 분이 있으나, 가난하면서 씩씩하고 오붓하게 살림을 꾸리는 자그마한 골목동네 터전은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있습니다.

 

그저 한 가지가 다를 뿐입니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달빛과 햇빛과 물빛과 풀빛을 부대끼며 삶빛을 저마다 다 달리 선보일 수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누구도 달빛과 햇빛과 물빛과 풀빛을 부대끼지 않습니다. 달과 해가 아닌 돈을 바라보는 오늘날입니다. 물과 풀이 아닌 이름값을 찾아나서는 오늘날입니다. 오늘날 삶자리는 조금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말레이지아도 한국도 오늘날 삶자리는 그예 슬프며 고단합니다. <캄펑의 개구쟁이>와 "짱뚱이 만화"는 아주 까마득하게 먼 옛날 옛적 범아비 담배 피던 나날 이야기가 되고 마는 이 나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캄펑의 개구쟁이 1

라트 글.그림, 박인하.홍윤표 옮김, 꿈틀(2008)


태그:#그림책, #책읽기, #삶읽기, #만화책, #어린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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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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