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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다녀온 다음날, 밤새 보채던 큰 아이가 40도에 가깝게 열이 올라 새벽녘 잠을 깨었다. 해열제를 먹이고는 아이아빠와 함께 물찜질을 해주고 있던 참이었다. 불현듯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이런 시간의 전화는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살아온 경험을 통해 알고 있던 터라 전화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순간 궁금해졌다.

늦은 밤 휴대폰 벨소리, 사실이 아니길...

한때는 싱싱한 여고생이었던 그녀들이 아줌마로 늙어간다. 사진속의 건강한 모습들도 세월이 흐르며 하나둘씩 사라져갈테지...
▲ 여고동창들 한때는 싱싱한 여고생이었던 그녀들이 아줌마로 늙어간다. 사진속의 건강한 모습들도 세월이 흐르며 하나둘씩 사라져갈테지...
ⓒ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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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남편 친구의 결혼식 참석차 제주도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몇 년간 근무했던 남편의 친구가 제주도 여인과 늦은 나이에 혼인을 하기로 했다 하여 당시 입원 중이던 큰아이를 급히 퇴원시키고, 갓 백일을 넘긴 둘째아이까지 함께 무리해서 가족 모두가 제주도행을 결행하였다.

하필 기상상태까지 우리를 도와주지 않아서 몹시 몰아치던 비바람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그저 렌터카와 숙소에서 보낼 수밖에 없던 여행이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가깝게 지내는 여고동창 중 한 친구가 바로 그날 갑작스레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는,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매체를 통해 유명인의 암 소식을 접해보았을 뿐 위중한 암에 걸린 주변인의 소식은 처음이었다.

소위 초기·말기라 구분되는 암의 진행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수술 소식만 전해듣고 찝찝한 전화를 종료하고, 그다지 즐겁지 않았던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여행에서 돌아와 암에 걸린 친구와 전화통화를 통해 "'수술은 잘 끝났다, 이제 항암치료를 시작할 거다" 정도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평소 워낙 구체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친구가 아니었기에 담담한 목소리만을 듣고는 어떤 상태인지 도무지 짐작이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대장암 말기였고, 불행하게도 다른 부위로의 전이도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더라 하는 나쁜 소식을 다른 친구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항암치료를 시작할거라던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자연요법을 시작한다며 암환자를 위한 건강원에 입소한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져 왔다.

예상생존기간 '1년', 의사소견에 병원 떠난 친구

암이라는 병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말기암 환자의 경우 현대 의학으로 완치가 힘들다는 얘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대체요법이 어느 정도의 해답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친구에게 통화를 하며 기운을 북돋아주곤 했었다.

건강원에 다녀온 이후, 친구는 익힌 음식과 육식을 일체 금하고 생식과 풍욕, 관장요법 등자연요법으로 건강관리를 시작했다. 가끔 여고동창들끼리의 가족여행에서 만날 때마다 친구는 분홍빛 혈색과 맑은 미소로, 도무지 암투병 중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치 금기처럼 나누지 않던 본인의 투병생활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면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요법을 선택한 것에 대해 너무나 만족스러워 했다. 몸이 불편한 탓에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리는 나의 큰 아이와 당시 갑상샘암 수술을 마친 내 친정엄마에 대해서도 건강요법을 권하곤 했다.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자연요법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친구는 이렇게 말했었다.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신참내기 레지던트가 치료 전 환자 동의서에 항암치료 후 예상생존기간을 '1년'으로 표기한 것을 환자인 친구가 그만 봤더란다.

그것을 본 순간, 병원이 나에게 도움 줄 수 있는 것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들을 전하면서도 듣는 우리들은 눈물을 꾹꾹 참아가며 들어야 했는데, 정작 본인은 마음의 동요없이 늘 담담하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투병생활을 시작한 지 1년쯤 되던 무렵, 같이 여행갔던 친구가 갑작스레 통증을 호소하며 새벽녘 서울로 떠났다. 1년에 몇 차례씩 함께 여행을 다니곤 했지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아있던 친구와 가족들은 걱정이 되었지만 늘 그렇듯 잘 극복해내리라 믿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안타깝게도 친구는 통증이 조금씩 심해져 자연요법이 불가능하게 되자 결국 항암치료를 받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간간이 극심한 통증 때문에 응급실에 가야했고, 3일 정도의 치료를 위해 입원하였으나 원인모를 통증 때문에 5, 6일씩 병원에 머물기도 하고 2주씩 병원에 머물면서 각종 검사를 받는 등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점차 길어져갔다.

지난 5월, 분당에 사는 친구네에 잠깐 들러 친구의 모습을 보았을 때만 해도 두어번의 항암치료를 잘 견뎌내고 밝은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또 지난 7월 서울 다녀오는 길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를 잠깐 보러 갔었다. 몇 번의 항암치료와 극심한 통증들을 견뎌내다 보니 그 전의 밝고 건강한 모습은 아무래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맞아주었다.

같은 해에 결혼해 아이까지 같은 해에 낳았는데

ⓒ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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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친구의 살아있는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암이라는 병은 젊은 환자들에게 무자비하다더니, 빛의 속도로 친구를 공격했었는지, 믿을 수 없도록 건강한 모습으로 병을 이겨내던 친구가 8월 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심지어 떠나기 3일 전에 다른 친구들이 찾아갔을 때도 "괜찮다"고 하던 녀석이다.

친구와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고 여고동창이다. 나의 생애 첫 생일파티인 초등학교 2학년 생일 때 친구가 초대되어 우리집에 왔었는데, 사실 그때 그 친구가 어떤 경위로 우리집에 왔었는지, 내가 초대를 했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친구가 혹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물어보아도 대답해줄 친구가 없다.

20대를 마무리하던 스물아홉의 마지막날 밤에는 강남역 근처의 호프집에서 함께 하며 청승맞은 목소리로 <서른 즈음에>를 불러제꼈고, 힘들 거나 즐거운 일이 있을 때마다 홍대앞 클럽 같은 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몸을 흔들어대기도 하였다. 또한 늦은 나이에 배필을 만나 같은 해에 한 달 차이로 혼인을 하였고, 또 같은 해에 큰 아이를 낳았다.

투병기간 중에도 전화통화를 하다보면 늘 자신보다도 몸이 불편한 내 큰 아이를 걱정하던 친구였다. 자신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남은 자신의 피붙이-내 아이와 동갑내기인 네살배기 딸-가 짠하다고 이따금씩 말하곤 했다.

가까운 친구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일은 내게 처음이다. 삼십대 후반 이른 나이에 가버린 친구가 너무 아깝고 불쌍하고, 그래서 슬프고 가슴이 먹먹해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가만 있으면 그 친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오르고 남은 그 친구의 딸아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슬픔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정말 건강하게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또 아주 조금은 이렇게 열심히 살면 뭐하나 하는 정말 허망한 생각도 든다. 문득 남편에게 "친구가 우리들이 만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을까?"라고 물었더니 그런 걸 믿냐며 핀잔을 준다. 죽으면 그냥 끝이라고.

근데 자꾸만 친구가 어딘가에서 편안하고 담담한 옛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것만 같다. 늘 그래왔듯 여고동창들과 가을에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는데, 이번에는 친구가 있는 벽제에 들러 다같이 친구를 만나기로 하였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내겠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한번씩 돌아볼 때마다 친구가 몹시 그리울 것 같다.


태그:#여고동창, #친구의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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