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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님.

 

당신 가신 지 1주년입니다. 세월의 무상함과 속절없음을 다시 일깨웁니다. 생자필멸, 일생일사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당신 떠나신 빈 자리가 너무 크고 넓습니다. 이 헛헛함, 이 씁쓸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칼 끝에 심장을 난도질 당하는 아픔을 견디면서 살아오신 긴 세월, 이제는 모두 잊고 저 세상에서 편안한 영면을 누리십니까? 그러지 못하시겠지요. 그토록 영민하셨던 당신이 어찌 오늘의 세태를 보고 편안하실 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서민경제· 남북화해 퇴행

 

당신께서 평생을 바치고 유언으로 남기셨던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화해가 모두 퇴행, 파탄에 빠지고, 남북관계는 날로 무력대결의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국정을 맡은 사람들은 도덕관념이 남김없이 증발돼 버린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새로 임명·지명된 장차관급의 면면을 볼 때 불법·비리의 전시장을 방불케 합니다.

 

반세기 전의 냉전의식에서 사고가 화석화된 사람들이 국정을 오로지 하면서 민족사의 비극이 재현되어가고 있습니다. 6월항쟁의 결실이었던 '87년 체제'의 세 가지 흐름 곧 민주화·경제적 자유·남북의 접근이 모두 퇴행하거나 막히고 있습니다.

 

완장 찬 바리새인들이 곳곳에서 설쳐댑니다. 방송을 권력자의 입맛에 사유화하고, 경찰총수로 내정된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차마 하지 못할 부관참시를 서슴지 않습니다. 권력은 바야흐로 민간인 사찰에 이르고, 이를 보고받은 실세는 건재하고 하수인들만 법망에 걸려듭니다.

 

후목난조(朽木難彫),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만들기 어렵다는 옛말대로 정녕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는 가능이 없는 것일까요. 이제 국치 100년을 맞는데 그날의 매국노·친일파 잔재들이 '식민지근대화론'을 내걸고 우리 공동체를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체제로 이끌고 있는데, 겨레의 진로를 밝히는 횃불은 보이지 않습니다.

 

족벌신문들에게 종합편성채널을 안겨주는 작업이 가시화되고, 국민의 여론은 도처에서 '마사지'되고, 의로운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몰상식이 상식으로 굳어져도 제어할 길이 없습니다. 당신이 살아계셨다면 어찌 방관하셨겠습니까.

 

말만 앞세우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기세도명(欺世盜名)의 자들이 대통령님의 정신을 잇겠다고 자리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돌파하셨던 당신의 철학과 실천이 그립습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외상으로 당신의 유산을 차지하겠다는 자들에게 준엄한 죽비를 쳐주십시오.

 

당신 유산 차지하겠다는 자들에게 준엄한 죽비를

 

김대중 대통령님.


당신은 세속적이되 속물적이지 않았고, 정치인이면서도 정치 이상에서 활동하셨지요. 철저한 의회주의자이면서도 민주주의가 사경에 빠질 때면 몸을 던질 줄 알았고, 언론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타락·불의한 언론기관과는 정치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원칙을 지키면서 타협을 소중히 여겼고, 반대를 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당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면서 북녘 동포들을 포용하고, 겨레의 소중함을 알아 통일의 가치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미국과는 의존적 동맹 안에서 자율성을 찾으려 하고, 그래서 '1동맹 3우호체제'의 외교철학을 제시하고 실천했지요. 지금 '1·5예속 2적대'의 서투른 '무당 정책'이 겨레의 앞날을 불안하게 합니다.

 

저 세상에 계시는 김대중 대통령님.

 

국민이 당신을 버릴 때도 늘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 불렀지요. 그리고 3·1운동, 4·19혁명, 6월항쟁,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위대한 국민을 존경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국민이 지금 희망을 잃고, 전쟁의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지방선거의 표심이 보궐선거에서 바뀌어 버리고 있습니다. 대안세력의 부재 탓일까요, 변덕일까요.

 

당신 떠나신 오늘, 눈물겹게 가슴 저리는 국민이 많을 것입니다. 오롯이 숙연해진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 기자는 전 독립기념관 관장입니다. 


태그:#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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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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