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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분 영상] 벼논과 바람 함안 가야읍 백산마을. 늦은 호우 시원한 바람이 뙤약볕 아래 부지런히 제 살을 불리고 있는 곡식들을 응원합니다. (길 위의 생생한 풍경을 '1분 영상'으로 전합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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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 들었나요? 뙤약볕 아래 여물어가는 논의 벼들도 보았나요? 저는 경남 함안 도항리에 있습니다. 본래는 진주로 가던 길이었으나 마음이 동해 이곳에 내렸습니다. 지명이야 여러 번 들었지만 어렴풋한 기억 한 조각 없는 낯선 동네입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이곳의 풍경은 어릴 적 뛰어놀던 시골마을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기차역 근처 정겨운 모습의 야식가게
 기차역 근처 정겨운 모습의 야식가게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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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에 글 문양을 붙인 듯 소박하기 짝이 없는 볼링센터 간판과 길건너 '역전 이발관', 박물관처럼 생긴 '기아오트바이센타'와 정겨운 모습의 야식가게. 기차역 주변 모든 건물들이 마치 드라마 세트장 안의 모조품 같습니다. 당장이라도 복고풍 의상의 배우들이 등장하고 감독의 큐 사인이 들려오면 그제야 '그럼 그렇지'하는 맘이 들 듯했습니다.

기차역에서 나와 좌측 도로변에서 만난 '기아오트바이센타'.
 기차역에서 나와 좌측 도로변에서 만난 '기아오트바이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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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구하러 함안군청으로 가던 길에 가야시장을 봤습니다. 한낮이라 그런 건지 촌동네까지 꾸역꾸역 들어선 대형마트들 때문인지 재래시장 안은 한산했습니다. 그래도 시장 구경이 좋은지라 골목으로 들어서니 국밥집 앞에 커다란 무언가가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물이 가득한 대야 안에 허여멀건한 그것은 금방이라도 눈을 뜰 듯한 소의 머리였습니다. 언뜻 사색에 빠진 사람의 얼굴 같기도 했습니다. 이미 숨과 피를 빼앗긴 소의 표정이 너무나 생생해서 어딘가 어색했습니다.  

부위별로 먹기좋게 가공한 고기와 이렇듯 원초적인 모습의 짐승의 사체를 보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도시민 대부분이 전자만을 취하기 때문에 우리가 씹어 삼키는 음식이 한때 살아있는 생명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도, 감사히 여기는 마음도 점점 옅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시장골목 국밥 집 앞에 놓인 허연 소 머리.
 시장골목 국밥 집 앞에 놓인 허연 소 머리.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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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청에서 지도를 얻고 인터넷으로 주변 지리를 파악한 뒤 제일 먼저 함안도항·말산리 고분군을 찾았습니다. 군청에서 나와 우측 도로를 타면 금방입니다. 아라공원 표지석 뒤의 나무계단 끝에서 공주의 무녕왕릉 규모와 비슷한 고분을 봤습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산 능선을 타고 여러 기가 있었는데요. 안내글에 따르면 이 고분들은 1500여 년 전 이곳에 살았던 가야의 아라가야국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고분이 아니라도 아름답고 넓은 초원이 다른 계절의 풍경도 보고싶게 했습니다. 무덤이라기보다 푸른 언덕 같은 고분을 따라 걷다보면 함안박물관에 닿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지레 거부감을 느껴 외면하겠지만 여행은 익숙한 것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이 있지요. 입장료 500원을 내고 2층의 전시관으로 들어가니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 함안에 살았던 사람살이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양의 아라가야국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말산리 고분.
 가양의 아라가야국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말산리 고분.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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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그릇과 색바랜 장신구들, 부서진 갑옷과 녹슨 장검 등 오래 전에 주인을 잃은 물건들이 용케도 오늘까지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 번을 살아도 모자란 시간으로부터 온 물건들을 보고 있으니 애틋함과 허망함이 같이 밀려 왔습니다. 지금 우리와 같이 숨쉬던 누군가가 흙을 빚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갑옷을 입고 긴 칼을 들었던 장수는 누리지 못한 삶을 아쉬워하며 눈을 감았겠지요…. 우리의 삶이란 게 이렇습니다. 

조선시대 조삼이란 인물이 남은 여생을 보내며 후진 양성을 겸하기 위해 지었다는 정자 '무진정'
 조선시대 조삼이란 인물이 남은 여생을 보내며 후진 양성을 겸하기 위해 지었다는 정자 '무진정'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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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에서 내려와 왔던 방향으로 계속 달렸습니다. 함안역에 내릴 때 이미 점심을 훌쩍 지난터라 늦은 오후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자전거 열풍'은 이곳도 예외가 아닌지 도로 옆으로 자전거도로가 있어 달리기도 편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무진정'이란 호수 위 정자가 나왔습니다. 정자 아래 바닥이 풀인가 했는데 물이끼였습니다. 그 풍광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조선시대 조삼이란 사람이 남은 여생을 보내며 후진 양성을 하기 위해 직접 지은 정자라 했습니다.

오래된 마을 한 가운데 놓인 함안 대산리 석불.
 오래된 마을 한 가운데 놓인 함안 대산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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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주변을 거닐고 나와 우측 다리를 넘어가면 함안 대산리 석불이 있습니다. 지도의 관광지 목록에서 봤을 뿐, 다리에서 만난 그곳이 고향이란 여인도 이 석불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래된 마을 한가운데 나무 아래 석불들은 이곳 사람들에겐 그저 무뎌진 일상의 한 조각 같은가 봅니다. 세 구의 석불 중 가운데 것은 광배의 절반과 얼굴을 잃었는데 어찌된 사연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함안에서의 첫날, 여기까지 둘러보고 날이 저물었습니다. 숙소는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잡았습니다. 먹는 것과 이동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숙박비 부담이 상당합니다. 각지에 편한 벗 하나씩 있음 더없이 좋을 텐데요.

서두에서 보여드린 1분 영상은 숙소를 찾아 읍내로 들어오던 길, 백산마을에서 찍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 훈훈한 사람 풍경, 때로 함께 고민하고픈 삶의 장면들 담아 올리겠습니다. 제 편지 잘 읽고 계시지요?


태그:#국내여행, #대산리석불, #함안, #말산리고분군, #무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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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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