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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500만 원 받은 사실을 공개한 이씨를 '환불남'으로 지목한 언론 기사들
 삼성에서 500만 원 받은 사실을 공개한 이씨를 '환불남'으로 지목한 언론 기사들

2년 전 식품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블랙 컨슈머(악덕 소비자)' 논쟁이 최근 IT업계로 번졌다. 지난 5월 삼성 휴대폰(매직홀폰)이 충전 도중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탔다고 밝혔던 이진영(28)씨가 당시 삼성전자에서 합의금 500만 원을 받고 제품을 넘긴 사실을 뒤늦게 폭로한 것이다.

곧바로 '반격'이 이어졌다. 일부 언론에서 삼성전자 관계자 등의 입을 빌려 이씨가 삼성-LG전자 양쪽에서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상습적으로 교환/환불 받아온 '환불남'이라고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에 이씨가 적극 반박하고 나선 상황이다.(관련기사: "블랙 컨슈머? 삼성에 당당하게 맞서겠다")  

기업-소비자단체, '블랙 컨슈머' 언급 자체 꺼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업들의 '블랙 컨슈머' 관리 실태도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블랙 컨슈머'란 '고의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를 뜻하는 기업계 용어다. 거꾸로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고 제품에 하자가 분명한 이상 단지 민원이 잦았다는 이유로 '블랙 컨슈머'로 단정하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삼성이나 LG쪽에서도 이씨 문제뿐 아니라 '블랙 컨슈머' 문제에 대한 공식적 언급은 자제하고 있다.

다른 업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블랙 컨슈머' 문제에 대한 현장 목소리를 들으려고 기업 고객관리(CS) 담당자들 단체인 기업소비자전문가협회(회장 유경모 CJ제일제당 상무)에 인터뷰와 취재를 요청했지만 모두 고사했다. 12일 내부 논의 결과 자신들의 얘기가 보도될 경우 고객이나 소비자 단체들과 자칫 대립각을 세울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한국소비자원이나 소비자 단체 역시 '블랙 컨슈머' 문제를 조심스러워 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정의가 애매할뿐더러 다양한 소비자들의 민원을 받아 기업과 중재하는 입장에서 부적절한 용어라는 것이다. 학계에선 소비자들의 억지 주장, 무례한 언행, 부당한 요구, 협박/위협, 업무방해 등을 묶은 '소비자 문제행동'의 한 유형 정도로 보고 있었다. 

기업소비자전문가협회 홈페이지. 기업 고객관리 담당자들이 모인 단체로 기업 관점에서 다양한 소비자 문제 해결을 위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기업소비자전문가협회 홈페이지. 기업 고객관리 담당자들이 모인 단체로 기업 관점에서 다양한 소비자 문제 해결을 위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기업 열 중 여덟 "소비자 무리한 요구 수용 경험"

'소비자 문제행동'을 다룬 논문 가운데 지난해 10월 한국소비자원에서 발표한 '소비자 불평행동 과정에서 나타나는 소비자의 문제행동에 관한 탐색적 연구'(<소비자문제연구> 36호)란 보고서가 눈길을 끈다.

백병성 소비자원 정책개발팀장과 박현주 차장이 직접 기업과 소비자원, 소비자단체 등 소비자문제 담당자 73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소비자 문제행동에 기업이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기업들은 ▲보상에 대한 소비자의 높은 기대 수준, ▲확인되지 않은 사실 공개로 회사에 부담 주는 것, ▲소비자단체 등 제3의 기관까지 문제를 확대시키는 것 등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소비자 문제 행동에 대한 기업의 대응 역시 무리한 보상 요구나 허위사실 유포를 지속할 경우 법무팀과 연계해 소송 등 법적 대응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조사 대상 기업의 77.8%가 기업의 이미지 훼손을 막으려고 무리한 요구를 수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3월 국내기업 300개사를 대상으로 한 대한상공회의소 실태 조사에서도 기업 87.1%가 과도한 보상 요구나 규정에 없는 환불/교체 요구 등 고객의 부당한 요구를 경험했고, 75.8%는 부당한 요구를 수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기업들은 인터넷/언론 유포 위협, 폭언, 고소/고발 위협 등을 당했고, 실제 54.1%는 직간접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서 '블랙리스트' 공유하고 가족까지 관리

이에 맞서 기업들도 악성 클레임 전담팀 운영, '블랙리스트' 공유 등을 통해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원 조사 결과 기업들은 악성고객 대응 매뉴얼을 만들고 주의 고객을 별도 관리하거나 악성 클레임 전담팀을 배치하고 보상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고객센터에 상습적으로 전화하거나 민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면 별도 코드로 등록해 상담원들에게 주의를 주는가 하면,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까지 전산 시스템에 등록해 계약을 거부하는 업체도 있었다.  

백병성 팀장은 "기업에서는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지만 업계에서 공유하는 악성소비자 리스트(블랙리스트)가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밝혔다.

한국소비자원 논문에 나온 기업과 소비자 단체의 '소비자 문제 행동' 대응법(일부 발췌)
 한국소비자원 논문에 나온 기업과 소비자 단체의 '소비자 문제 행동' 대응법(일부 발췌)
ⓒ 한국소비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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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컨슈머는 기업 브랜드 이미지 형성에 '필요악'"

이에 전응휘 녹색소비자연대 이사는 "기업들이 소비자 선택을 유도하려고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블랙 컨슈머가 등장해 '묻지마 지원'의 빈틈을 향유하는 것"이라면서 "성공적인 블랙 컨슈머는 결국 사업자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인데, 기업들이 그 빈틈을 메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고 밝혔다. 결국 사업자 입장에선 브랜드 이미지 형성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치르는 비용'이라는 것이다.

전 이사는 "기업들이 블랙 컨슈머를 탓하기 전에 소비자 기본 요구를 얼마나 무시해 왔는지 되돌아봐야 한다"면서 "정당한 문제 제기를 했다 무시당한 소비자가 권리를 찾는 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은 블랙 컨슈머로 인한 기업 피해보다 크다"고 밝혔다.

백병성 팀장은 역시 "기업들의 고객 만족 마케팅이 소비자 기대치를 높인 데다 정보 확산 속도가 빨라지고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서 극소수 소비자들이 극단적인 행동이 증가하고 있다"면서도 "반대로 정당한 권리 주장을 귀찮아하거나 잘 몰라서 손해 보고 그냥 넘어가는 소극적인 소비자들이 더 많은 것도 문제"라며 자칫 '블랙 컨슈머' 문제가 소비자의 정당한 민원까지 움츠리게 만들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태그:#블랙컨슈머, #소비자고발, #블랙리스트, #소비자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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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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