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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이 1887년 <주홍색의 연구>에 '셜록 홈즈'를 등장시킨 후부터 '명탐정'은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특히 추리소설의 계절이라고 하는 여름이 다가올수록 그 아이콘은 더욱더 생기 있게 꿈틀거린다. 올해도 마찬가지. 2010년에도 명탐정들이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그 활약상의 속내가 올해는 좀 다른 건 같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건 제목에 '명탐정'이 들어간 두 권의 책이다. 우타노 쇼고의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문학동네 펴냄)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재인 펴냄)에 등장하는 명탐정들은, 셜록 홈즈 계열의 명탐정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그보다는 '아주' 슬프거나 '진짜' 웃기는 것이다.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로 잘 알려진 우타노 쇼고의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3개의 소설로 구성됐는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밀실트릭'을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집은 '밀실트릭 3부작'을 표방하며 허를 찌르는 반전을 보여주고 있는데 독특하게도 명탐정의 푸념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표제작의 명탐정은 의뢰비 없이는 움직이는 않는, 시니컬하면서도 구질구질한 명탐정이다. 이런 명탐정의 조수는 한숨을 쉬면서, 한편으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명탐정이 어찌 이럴 수 있냐고 투덜거린다. 그러자 명탐정의 푸념이 시작된다.

 

"나는 명탐정이야. 그러나 항상 그늘에 있을 수밖에 없어. 명탐정인데 어째서 양지로 나오면 안 되는 거지? 사람들의 칭송이나 존경과 선망을 모을 수 없는 거지? 모나코 만에 정박한 호화 크루저 선상에서 양 옆에 금발 미녀를 끼고 보졸레 와인을 즐겨야 하는데, 배상금 부담을 지고 경찰에서 쥐어주는 몇 푼 안 되는 협력비로 이케부쿠로 원룸에 사는 사십대 독신이 현실이야. 정말 속 터진다고. 욕구불만이야. 그러니까 스트레스로 이렇게 됐지."

-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中에서

 

어쩌다가 명탐정이 이런 푸념을 늘어놓게 된 걸까?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일까?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를 보면서 약간의 슬픔에 젖어드는 건 어쩌면 그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이 추리소설답지 않게 '아주' 슬프게 만드는 건 또 다른 소설 <관館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가 큰 이유다.

 

소설 속 중년의 남자들은 친구에게 초대장을 받는다. 어린 시절 함께 탐정소설을 읽었던 친구가 보낸 것이었다. 그들은 초대장을 받고 친구 집에 갔다가 깜짝 놀란다. 고전 추리소설에 나올 법한 저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뿐인가. 실내의 분위기도 추리소설의 그것이었다. 더욱이 그들을 초대한 친구는 밑도 끝도 없이 추리게임을 펼치자고 제안한다. 탐정소설을 재현해보자는 것이었다.

 

중년의 남자들은 그런 그를 비웃는다. 한때 탐정소설을 읽으며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현실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전 재산을 들여 이런 저택을 무리하게 만들었으니 한껏 비웃고 마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남자는 꿋꿋하게 추리게임을 펼친다. 그리고 말한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꿈을 이루고 싶다. 탐정소설의 세계 속에서 죽어가고 싶다. (…) 내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염치없는 부탁을 하지. 탐정소설을 편애하고 탐정소설에 목숨을 건 바보가 있었다고, 가끔씩이라도 좋으니 떠올려주게나. 그리고 자네들도 앞으로 탐정소설을 사랑해주었으면 하네."

- <관館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 中에서

 

이 소설이 슬픈 건, 소설을 읽는 '독자'가 탐정소설에 대한 변치 않는 애정을 보여주었던 남자가 아니라 그를 비웃던 입장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현실이니 어쩌니 하면서 가슴 속에서 탐정소설을 밀어두었기에, 탐정소설 읽는 사람들을 철없다고 비웃었기에 남자의 말에 슬퍼지는 것이 아닐까? 이상한 일이다. 명탐정은 사건 해결해야 멋져 보이는 건데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의 '명탐정'은 대단한 걸 하지도 못했는데 멋져 보인다. 그것이 심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반면에 <명탐정의 규칙>의 명탐정은 굉장히 유머러스하다. 그가 무슨 코믹한 행동이라도 해서그런가? 아니다. 그는 어느 추리소설의 명탐정들처럼 굉장히 진지하다. 그럼에도 웃긴 건 왜일까? 그것은 이 책의 노림수부터가 코믹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추리소설 팬이라면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는, 이제는 너무나도 식상해져버린 추리소설의 규칙들을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규칙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독자가 알고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경감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명탐정도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명탐정의 규칙>에 등장하는 명탐정은 그러한 규칙들을 밝히고 싶지 않다. 민망할 뿐만 아니라 비웃음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수수께끼 따위 풀고 싶지 않아요."
"이제 와서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모두들 기다리는데."
"그럼 범인이 누군지만 말할게요. 그러면 되지요?"
(…)
"저 사람들, 너무한 것 아닌가요. 제가 밀실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피식피식 웃어 대더군요. 제가 '밀실은 트릭의 왕'이라고 말했을 때는 순경 할아버지가 노골적으로 폭소를 터뜨리기까지 했어요."
"그랬던가."
"분명히 그랬어요."
'웃을 수밖에 없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 <명탐정의 규칙> 中에서

 

이 소설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패러디 정신과 블랙 유머로 가득한 초현실 자학 미스터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소설 속 명탐정과 경감은 기존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고루한 트릭들을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하면서 블랙 유머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렇기에 <명탐정의 규칙>은 특유의 유머러스함으로 '진짜' 웃긴 소설로 거듭나는 것이다.

 

2010년 여름, 아직도 '221b Baker Street'에서 살고 있는 명탐정과 그의 후예들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그 모습을 달리하는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와 <명탐정의 규칙>의 명탐정들은 어떤 대접을 받게 될까? 시간이 답이겠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들 모두 가슴 속 어딘가에 숨겨둔 추억을 일깨워준 것이다. '아주' 슬프거나 '진짜' 웃긴 방식으로 그들은 그렇게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문학동네(2010)


태그:#명탐정, #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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