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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나와 후쿠오카 공항 가는 길
 숙소에서 나와 후쿠오카 공항 가는 길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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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후쿠오카 공항에서 하루를 보낼 작정이다. 여행 전 알랭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읽었는데 마침 지척에 공항이 있어 며칠 전부터 별러왔다. 누군가 내게도 숙소와 공항내 식당 이용권을 주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제안한다면, 일주일이 아니라 1년이라도 수락할 용의가 있다. 

국내선(Domestic Flight)

국내선 출발구 앞으로 맞춘 듯 검정 양복에 서류 가방을 든 남성들이 대기하고 있다.
 국내선 출발구 앞으로 맞춘 듯 검정 양복에 서류 가방을 든 남성들이 대기하고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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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7시 54분] 도착한 지 5분여 만에 맞춘 듯 검정색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남성들이 국내선 출발구 앞에 줄을 선다. 말하는 순간 우측 에스컬레이터에서 20대 중반인 듯한 청년과 오른쪽 다리를 저는 중년 남성이 걸어온다. 청사 안에 나지막이 흐르는 곡은 아주 익숙한 올드팝인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앉은 자리에서 정면으로 네 동의 면세점이 있다. 판매상품은 주로 술과 명란젓 선물세트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 카디건과 바지를 입고, 연회색 앞치마를 맨 직원들은 거의가 초로의 여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잠시 머물고 미련없이 떠나는 공항이 또 어떤 이들에겐 하루 온종일, 1년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임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이른 오전이고 국내선 청사라 그런지 면세점엔 눈길조차 주는 이가 없다. 손님이 없을 땐 책을 보거나 쉴 수 있게 의자를 마련해주면 좋겠다. 그럼 일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속이 편할 텐데 사람이 만든 시스템 안에 원칙만 있고 사람이 없다. 

다수의 사람들이 잠깐 머물다 미련없이 떠나는 공항이 또 어떤 이들에겐 하루 온종일, 1년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잠깐 머물다 미련없이 떠나는 공항이 또 어떤 이들에겐 하루 온종일, 1년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이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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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9시 5분] 3층에 있는 실외 환송데크(Obsevation Deck)로 자리를 옮겼다. 이착륙하는 비행기 소음에 머리가 아프다. 아까부터 두 명의 안전요원이 일장기를 형상화한 JAL 여객기의 앞바퀴를 점검 중이다. 저들 한 명 한 명의 손에 탑승객 전원의 생사가 달려 있다. 잠시 후 이 막중한 책임의 바통을 이어받을 조종사는 자신의 자리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저들 한 명 한 명의 손에 탑승객들의 생사가 달려 있다!
 저들 한 명 한 명의 손에 탑승객들의 생사가 달려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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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JAL 여객기 한 대가 이륙을 시도한다. 누군가 가슴을 졸이며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푸른 가로띠를 두른 AIR NIPPON 한 대도 비행을 위해 서서히 대열을 벗어나고 있다. 마치 출발 직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경주마들을 보고 있는 듯하다. 의외로 긴장감이 넘친다.

바로 한 층 위에 '경주마'들의 모습을 실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망실(Observation Room)이 있다. 여러 개의 원탁 테이블과 음료 자판기가 있고 소음이 덜해 실용적이다. 하지만 멀어져가는 비행기를 홀로 바라보는 일 따윈 전혀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도시락과 책 한 권 들고와서 반나절쯤 쉬어가면 좋을 곳이다. 꼬리에 별을 단 SKY(SKTMARK AIRLINES) 여객기가 사뿐히 착륙한다. WELCOME!

Observation room(전망실). 도시락과 책 한 권 들고 가서 반나절쯤 쉬었다 와도 좋을 공간이다.
 Observation room(전망실). 도시락과 책 한 권 들고 가서 반나절쯤 쉬었다 와도 좋을 공간이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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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0시 47분] 1층의 국내선 도착구다. 출발구보다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다. 이별이 아닌 만남의 장소고, 목적이 무엇이건 일단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공간이기 때문일까. 

대학교 농구팀인 듯한 훤칠한 청년들이 실내를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들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다. 벤치에는 제법 멋을 낸 노년의 여인과 편한 점퍼 차림의 중년 남자, 양복을 차려 입은 역시 중년 남자 세 명이 앉아 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나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지구 자원을 재생시키기 위한 소중한 작업.
 지구 자원을 재생시키기 위한 소중한 작업.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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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미화원이 분리수거함을 정리하고 있다. 이들의 임무는 공항 청결은 물론, 더 넓고 중차대한 관점에서 지구 자원을 재생시키는 일과 연결된다.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로 작용하고, 사소해 보이는 어떤 일이 결국에 큰 재앙을 낳기도 한다. 분명 한 사람의 손 끝에서 이뤄진 행위들이 모여 긴 세월 지구를 어떻게 파괴시켰나 돌아보자.   

[AM 11시 14분] 관리직원이 다가와 공항 내부벽면 콘센트에 노트북 플러그를 꽂으면 안 된다고 일러준다. 손으로 엑스(X)를 그리면서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여러번 "스미마셍(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인다. 규정에 따라 제지를 가하지만 예의를 지켜 배려해주는 그의 태도에 기꺼이 지시를 따르게 된다. 이런 일본인의 모습은 이제 '익숙한 감동'이다.

젊은 연인 한 쌍이 포옹 대신 코믹한 포즈와 사진 찍기로 재회를 기념하고 있다.
 젊은 연인 한 쌍이 포옹 대신 코믹한 포즈와 사진 찍기로 재회를 기념하고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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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격한 재회 장면이 없어 실망하던 차에 '주연급' 남녀 커플이 나타났다. 아까부터 도착구 앞에서 미동도 않고 있던 분홍색 티셔츠 청년이 드디어 목표대상을 발견했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하늘색 미니스커츠의 여성, 생각할 틈도 없이 왼손을 번쩍 들어올려 '브이(V)'를 그리고 남자는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린 아주머니의 표정이 궁금하다.

국제선(International Flight)

국내선에서 국제선 청사로 이동하는 무료 셔틀버스 안
 국내선에서 국제선 청사로 이동하는 무료 셔틀버스 안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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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3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국제선 청사로 이동했다. 나흘 전 어머니를 배웅한 길이라 익숙하다. 안내방송에서 서울발 대한항공 789기의 도착을 알린다. 여기서 밤까지 있으면 아는 사람 한명쯤은 만날 수 있을까?

[PM 3시 43분] 대한항공과 재팬 에어라인이 동시에 도착하면서 승객들이 쏟아져 나온다. 두터운 책을 든 잘생긴 청년이 선두다. 다음은 카터에 짐을 잔뜩 실은 일본 아줌마 부대. 출발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치이즈" 한국인 단체여행객이다! 여행사 직원이 인원을 파악해 공항 밖으로 인솔한다. 괜스레 반갑고 서운하다.

가장 먼저 나와 있던 남녀 일행도 기다리던 이들을 만났다. 아무래도 국제결혼을 한 커플이 여자 어머니와 함께 남자의 부모를 마중나온 듯하다.  

반가움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역시 서양식 인사가 효과적이다. 일본 며느리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 시어머니와 포옹을 한다. 안사돈보다 한참 키가 작은 여자의 어머니도 쑥쓰러워 하며 스킨십을 한다. 반면 아들과 아버지는 데면데면하다. "아들아, 잘 있었냐" "네, 아버지는요?" "그렇지 뭐" "하여간 여자들이란…" "(미소)" 이런 류의 부자 대화를 상상해본다.

훈훈한 재회 장면에 매점과 안내소에 앉은 직원들 얼굴에도 미소가 번져 있다. 그 와중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럴 것까지야…' 싶은데도 주체가 안 된다. 최근 1년새 이런 증세가 잦는데 전문의와의 상담이 필요한지 궁금하다. 감정을 가라앉히려 자리를 옮긴다.

아마도 국제커플인 듯한 남녀가 오랜 기다림 끝에 가족을 만났다.
 아마도 국제커플인 듯한 남녀가 오랜 기다림 끝에 가족을 만났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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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4시 33분] 국제선 출발구가 보이는 2층 벤치에 앉았다. '화성인과 함께 인간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로 가야한다면 당연히 공항의 출발·도착 라운지'라고 했던 보통씨의 표현이 일면 공감이 간다. 한계를 거스르는 동시에 자연파괴적인 기술력과 미적감각의 결합, 만남과 이별을 대하는 인간적인 면모까지 공항에서 느끼는 감흥은 상상 이상으로 다채롭다. 

[PM 5시 15분] 근처서 익숙한 사투리가 들려 돌아보니 부산에서 온 노부부다. 왕년에 '인물 좋다' 소리 꽤 들었을 법한 할아버지와 뽀글뽀글 파마에 애교 많은 할머니다. 어쩐 일로 오셨냐 하니 미국에 사는 딸이 관광시켜줘서 좋은 데 많이 보고 가는 길이라고 했다. "혼자왔나", "안 힘드나" 고향 말투로 이것저것 걱정해주시는데 마음이 또 울렁울렁하다. 사진 찍어도 되겠냐 여쭈니 할아버지가 과감하게 할머니 어깨를 감싸 안는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그저 건강하게, 오래도록 저희들 곁에 계셔 주십시오.' 

'부모님, 감사합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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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6시 35분] 서울과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 탑승수속이 모두 끝나고 공항 안이 급작스레 고요해졌다. 하루종일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을 지켜봐서일까. 오늘따라 적적함에 힘이 부친다. 공항 안에서 무선랜이 연결돼 멀리 있는 지인들과 대화를 나눠보지만 닿지 못하는 절박함이 커질 뿐이다.

이 하늘빛에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다.
 이 하늘빛에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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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7시 25분]  '아…, 이 하늘 어쩔거냐.'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노을이 번지는 하늘을 바라보니 심장이 몇 cm쯤 내려앉을 것만 같다. 숙소에 돌아가도 말벗할 이가 없으니 영 막막하다. 누구라도 붙들고 "말동무 좀 해주세요" 사정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고독해질 줄이야.

PM 8:00 귀가
 PM 8:00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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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8시] 12시간 동안 '공항 투어'를 마치고 셔틀버스에 올랐다. 퇴근하는 공항 직원들과 근처 주민들도 버스에 함께 탔다. 양복입은 회사원들은 피곤함이 역력하고 한국을 여행하고 온 현지 여성 네 명이 친숙한 백화점의 쇼핑백을 놓고 수다가 한창이다. 어딘가 심심한 표정의 여행자가 없을까 둘러보지만 혼자 있는 건 나뿐이다. 아, 내일은 기필코 사람 많은 시내관광을 해야지.

멈춰서서 보기

이국의 낯선 동네를 걷다가 '이곳에도 일상이 있구나' 자각할 때가 있다. 지친 표정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어린 아이 뒤를 쫓는 엄마, 아파트 베란다에 널린 색바랜 이불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두고 온 내 삶의 풍경도 다른 색채를 띤다. 익숙해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일상의 의미가 새롭게 와닿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공항에서 보낸 건, 오가는 사람들 틈에 멈춰서서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쏜살 같이 흐르는 시간 안에 잠시 '정지'하는 것, 그것은 자유로운 여행자의 특권이지만 실은 균형 있는 삶을 위해 꼭 필요한 행위이기도 하다.


태그:#일본여행, #후쿠오카공항, #하카타, #알랭드보통, #생활의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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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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