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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 고개를 넘어 해남 땅으로

 

 

다산초당을 보고 마을로 내려오니 벌써 저녁 7시가 넘었다. 시간이 늦어 다산 유물전시관은 볼 수가 없다. 답사를 하다 보면 가외로 얻는 것도 있지만, 이처럼 보지 못하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도암면 소재지로 나와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이곳은 시골인지라 저녁에 문을 열어놓은 식당이 많지 않다. 상을 받아보니 문어도 나오고 토하젓도 나오고 꽤나 정성을 기울인 눈치다.

 

저녁식사 후 우리는 내일의 해남 답사를 위해 55번 지방도를 타고 계라리 쪽으로 나간다. 이 도로는 계라리에서 18번 국도를 만난다. 오늘의 숙소는 계라리에 있는 아미산 모텔이다. 아미산은 원래 중국 도교와 불교의 성지이자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미산을 모텔 앞에 붙이니, 어색한 듯하면서도 어감이 좋은 편이다. 이 모텔은 백련사와 다산초당 근처의 추천 숙박지로 나와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전망이 참 좋다. 앞에 운동장도 넓고, 정원도 잘 조성되어 있으며 도로도 아주 가깝다. 우리는 이제 18번 국도를 타고 해남군 옥천면을 지나 해남읍으로 들어간다. 해남읍은 북쪽의 금강산(481m)을 주산으로 남쪽이 틔어있는 지세다. 그리 남쪽의 삼산들 너머로는 해남의 조산이라고 할 수 있는 두륜산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오늘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녹우당을 보고, 삼산면 구림리에 있는 대흥사로 갈 예정이다. 녹우당에서는 유교적인 삶을 살다간 해남 윤씨의 자취를 찾아보고, 대흥사에서는 불교적인 삶을 살아간 스님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려고 한다. 대흥사를 거쳐간 스님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서산대사와 초의선사이다.

 

초의선사는 1800년대 대흥사를 중심으로 차문화를 중흥시킨 스님이다. 그 때문에 전라도 해남 땅은 차문화의 성지가 되었다. 이번 해남 답사의 주제는 유교와 불교문화 탐구지만, 불교문화에서 파생된 차문화도 역시 중요한 주제다. 차문화를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 오늘 저녁에는 대흥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초의선사가 말년을 보낸 대흥사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  

 

녹우당 유물전시관의 시·서·화 삼절

 

고산 윤선도 유적지인 녹우당(사적 제167호)은 덕음산(320m)을 배경으로 서향하고 있는 해남윤씨 세거지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바로 앞에 연지가 보인다. 이곳에는 한여름에 하얀 연꽃이 핀다고 하는데 꽃이 피려면 아직 멀었다. 연지에는 대나무를 엮은 다리가 있어, 가운데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섬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초입에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 뒤로는 기존의 고산유물관이 있다. 유물관 뒤 산 아래에는 어초은 사당과 고산 사당이 있다. 그리고 유물관과 사당의 북쪽으로 생활공간인 녹우당과 추원당이 있다.

 

 

우리는 먼저 유물관으로 간다. 철근 콘크리트식 기와집으로 1991년 3월에 개관했다. 이곳에는 국보 제240호인 공재 윤두서(1668-1715) 자화상과 보물들인 화첩, 지도, 고산 윤선도(1587-1671)의 고문서 등 46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윤선도의 '漁어父부四사時시詞사'다. 이곳에는 1연이 펼쳐져 있지만, 학교 때 배웠던 春츈 중 3연이 생각난다.

 

동풍(東風)이 건듣 부니 믉결이 고이 닌다

돋다라라 돋다라라

동호(東胡)를 도라보며 셔호(西湖)로 가쟈스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압뫼히 디나가고 뒷뫼히 나아온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보물 제482호인 '산중신곡(山中新曲)'이다. '산중신곡'은 고산이 56세인 1640년 현산면 금쇄동에 은거하면서 지은 시조집이다. 여기에는 그의 시조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오우가 등 시조 19수가 실려 있다. 오우가는 모두 6편인데,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다섯 친구 외에 서문이 있다.

 

 

내 버디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머엇 하리.

 

그리고 '금쇄동집'이 있고, 입안문서가 있고, 은사첩이 있다. 그 외에 고산의 시호 교지도 보이고, 목판도 보인다. 이들 고산 윤선도 유물은 공재 윤두서의 그림과 함께 이곳 유물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공재 윤두서의 그림으로는 '자화상'이 가장 유명하다.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자다. 그는 소과에 합격하였으나 남인계열이었기 때문에 벼슬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후 서예, 그림, 지리, 금석학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해남윤씨 가전화첩뿐 아니라 조선지도와 일본지도를 남겼다.

 

그림에서 느낀 아쉬움과 실망감

 

 

그런데 이곳에 있는 '자화상'과 '가전화첩'(보물 제481호)이 모두 복제본이어서 그림을 보는 맛이 별로 나지 않는다. 소위 그림이라는 것은 원본을 통해 화가와 교감하는 것인데, 색감이 떨어질 뿐 아니라 지질까지 형편없는 그림을 보게 되니 실망스럽다. 4차원(시간)까지 언급되는 세상에서 3차원(입체감)도 아닌 2차원(평면성)적인 작품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나기까지 한다.

 

공재의 '자화상'은 인물을 그린 그림 중에서는 유일하게 국보에 지정된 대단한 작품이다. 우선 눈동자와 눈썹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눈썹은 끝이 치켜 올려졌고, 눈은 상대를 응시하고 있다. 수염에 가린 붉은 입술은 작으면서도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 그림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수염이다. 표현이 극사실적이어서 살아있는 듯하다.

 

전체적으로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지식인의 반골의식이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망건과 탕건이다. 상단부 1/5정도를 검은색으로 진하게 표현했는데, 이것이 작가의 의도를 좀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얼굴을 중심으로 위 아래에 있는 머리와 수염을 다르게 표현해 변화를 꾀하고 있다.

 

또 하나 공재 윤두서의 손자인 청고 윤용(1708-1740)이 그린 '미인도'가 또 눈에 띈다. 이 그림을 보면 먼저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생각난다. 틀어 올린 머리와 치마저고리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용의 미인도에서 여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매만지고 있다기보다는 무거워서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또 머리를 약간 숙여 겸손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발을 치마 속에 가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양반가의 여인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에 비해 신윤복의 미인도는 색감의 대비가 뛰어나고 구도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신윤복이 그린 미인은 손으로 머리가 아닌 노리개를 매만지고 있다.    

 

음악과 지도까지 모르는 게 없네

 

이들 그림 옆으로는 거문고가 세워져 있다. 줄은 훼손되어 없고, 판만 있지만 그 아래 책자가 있어 그 제조법과 연주방법을 알 수 있다. 이들 책의 이름은 <회명정측>(悔暝霆側)과<낭옹신보>(浪翁新譜)이다. <회명정측>은 고산 윤선도가 쓴 책으로 거문고의 제작과 사용 방법을 기록해 놓았다. 내용을 보니 거문고를 겉(面)과 속(腹)으로 나눈 다음, 이것을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낭옹신보>는 이설 등이 1728년에 간행한 책으로, 이곳에 있는 것은 이설의 책을 해남윤씨 가에서 필사한 것이다. 낭옹은 조선 숙종, 영조 때의 가인으로 이름은 김성기(金聖基)다. 그는 거문고의 제작과 연주에 뛰어난 장인으로 서호(西湖) 주변에 살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고 한다.

 

이곳에 <회명정측>과 <낭옹신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해남윤씨는 고산 윤선도 이래 시·서·화뿐 아니라 악에도 큰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녹우당을 지켜온 사람들은 선한 사람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고산 유물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와 일본여도(日本輿圖)이다. 설명을 보니 이들 지도를 그린 사람이 공재 윤두서라고 한다. 글쎄, 공재가 지도까지 만들었을까? 이때 만들었다는 것은 실제 제작에 참여했다는 것을 말한다. 지도를 만들려면 답사를 해야 하고 실측을 해야 하고 그려야 하는데, 그림에 능한 공재가 그리는 것은 가능했을 테지만 답사와 실측까지 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심지어 일본여도 설명문에 보면, '공재 윤두서 선생이 48명의 첩자를 일본에 보내 일본의 지형과 거리는 물론 각 지방 부호들의 집까지도 상세히 파악해 표시하고 있다'고 했는데 한 마디로 넌센스다.

 

조선 후기 통신사 등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일본에 관한 자료들이 많이 들어왔을 테고, 이를 토대로 공재가 일본여도를 그렸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일본여도와 같은 지도는 일본의 박물관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거의 인물이나 문화유산을 설명하면서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이상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분명한 기록이 없을 경우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고, 기록이 있을 경우 이를 객관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 아무리 현재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옳고 그름 그리고 진실과 거짓은 분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태그:#해남, #녹우당,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시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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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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