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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꿈

서울에서 30년을 살았다. 바쁘고 복잡하고 정신없고 매연에, 사람에, 소음에 지쳤다. 내가 못 이기고 손들었다. 결국 평생을 살아온 서울을 떠나는 것이 내가 택한 길이었다. 다행히 처도 따라 내려 와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서울근교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내 능력과 비전으로는 도저히 집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변 사람 대부분이 부모님의 목돈에 빚을 내 집을 샀고 매달 대출금을 갚느라 수입의 상당 부분을 은행에 헌납하고 있었다. 난 싫었다. 집도 없이 눈치 보며 이곳저곳을 이사 다니는 것도 싫고 집 하나만을 위해서 뼈 빠지게 번 돈을 고스란히 빼앗긴 채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도 싫었다.

시 전체가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버리는 월요일 오전. 서울 어디에서도 자유롭게 도로를 질주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간이다. 뿐만 아니라 점점 요일과 시간에 관계없이 정체되는 구간이 늘어나고 있다. 도로는 점점 넓어지는 반면 걸을 수 있는 길이나 자전거로 다닐 만한 도로는 별로 없다. 거대한 소음과 매연의 배출공장이 되어버린 도로. 새와 곤충과 작은 짐승들이 떠나버린 공간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살아남아 층층이 쌓인 공간에 틀어박혀서는 쉰다고 표현한다.

서울은 정상적인 도시가 아니다. 규모가 지나치게 비대하다. 국내 대부분의 산업, 경제, 정치 모두를 흡수하고는 뒤뚱거리고 있다. 저러다가 폭발하는 것이 아닐까. 돈을 벌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하는 것도 옛말이다. 이젠 서울에 가서 산다고 해서 '먹고 살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고들 했다. 4년 동안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는 이와 지금의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변화를 꾀한다는 나머지 후보들이 맞섰다.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토론회를 두고 사람들은 잘생기고 말 잘하는 현시장의 재선을 돕는 일이었다고 했다. 작고 볼품없는 정당의 대표로 나온 후보는 생각도 좋고 말도 잘 했지만 그를 눈여겨 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무조건 진보는 '빨갱이', '공산주의자'의 색안경을 끼고 보는 어른들이 많았다.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입장은 듣지도 않고 덧씌워진 이미지만 보고 욕을 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선거는 끝났다. 재선에 성공한 시장은 대부분의 구청장과 의회의원들이 자신의 편이 아님을 알고 절망했다. 팔이 잘린 장수의 머리처럼 남아서 서울을 대표하는 자리를 지키려 한다. 과거 약속했던 공약과 시행사업들에도 큰 차질이 생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주변을 둘러봐도 자기편이 없다. 재선도 그간 가장 충실한 이익과 혜택을 주었던 강남3구에서 큰 지지를 업고 이루어진 것에 불과했다.

정책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공약은 무엇이었는지, 서로 어떤 가치를 공유하여 단일화를 이루려 하는지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저 지금 여당의 '막나감'을 견제하기 위해 야당단일화를 이뤄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론조사는 합해봐야 이길 수 없다고들 했다. 결론은 합쳤다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 작은 진보정당의 후보에게 화살이 날라들었다. 왜 소모품이 되지 않았느냐고, 3%로 잘먹고 잘살라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졌다.

빨강. 참 강열하다.
 빨강. 참 강열하다.
ⓒ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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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은 아니지만 평소 노회찬씨의 행보를 관심 있게 보아왔던 나는 서울시장 출마선언 때부터 지지를 선언했다(서울시민이 아니라 무척 아쉬웠다). 선거후, 공약집 <노회찬의 약속>을 보고 꿈을 꾸게 되었다. 실현가능한 꿈을 보게 되었다. '가능성'이 넘지 못하는 '현실'의 두터운 벽이 원망스러웠다.

좋다. 문제는 그런 정책을 실현할 대표자가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내용을 알릴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1%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회다. 이룰 수 있는 꿈이라고 믿는다. 가진자가 자기의 세력을 공고히하고 나머지를 견제하기 쉬운 시스템, 꿈은 그냥 꿈일 뿐이다. 허황된 꿈속에서 허우적대다 밥 굶는 지경의 가난함으로 떨어지는 것도 쉬운 곳이 대한민국이다. 일단 떨어지면 다시 일어서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끼니를 걱정하는 빈곤의 늪으로 빠진다.

복지를 이야기할 수 없다. 나눔과 연대, 좌파, 빨갱이, 사회주의는 위험하다고 경계한다. 정작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그곳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정작 그곳의 가치는 지금 현실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람 사는 세상'에 있다. 이루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은 채 '힘 있는 사람'을 대변하는 현재의 권력구조로는 도무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다.

육아를 위한 '아동수당'을 지금하고 의료비를 지원하며 산후조리서비스를 시에서 제공하는 일. 국공립 어린이집수를 늘리고 직장어린이집 설치시 시가 절반을 부담하는 일. 준비물 없는 학교. 공공 생활공간 실내공기질 개선하기 등 아이와 엄마가 행복한 도시를 지향한다.

일만 하는 도시가 아니라 쉼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노동시간 상한제를 도입하고, 모범기업을 선정해 휴가비를 지원하고 환경미화 노동자에게 샤워시설을 제공하고 판매노동자에게 의자를 지원하고 청소 노동자의 식사와 휴식을 위한 휴게 공간제공 등 기업이 나서서 하지 않는 일들을 시가 총대매고 시행하겠단다. 악기 하나씩 다룰 수 있는 시민으로 지원하고 동네 도서관을 지어 마을마다 편안하게 책을 읽고 빌릴 수 있는 문화공간을 확대한다.

공공임대주택 10만호 공급. 소득에 따른 반값전세주택, 보건소 확대 설치, 노인 주치의제도, 뉴타운 전면 재검토 등의 주거문화의 질 높이기 사업.

한강을 그 옛날 여름휴가를 즐기던 곳으로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한다. 수중보를 제거하고 습지와 백사장을 복원한다. 빗물을 받아서 재활용하고, 2020년까지 탄소배출감축과 재생에너지 비율 10% 달성. 폐식용유를 바이오디젤로 전환 버스와 공공차량에 이용. 태양광 발전설비 지원해 재생에너지 비율 확대. 대중교통정기권 재도입으로 교통비 부담 줄이기. 서울 도심 트램 도입하여 친환경 녹색교통을 확충. 차량 진입 제한할 주차장 축소와 대중교통지원확대.

저상버스를 확대하고 장애인 콜택시를 늘려서 약자의 이동권을 보장하고 노숙인 쉼터 확대, 여성 고위공무원30%, 반차별 조례 제정,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포하여 공론화하여 시민과 소통한다.

제대로 된 공약으로 싸우는 선거는 언제쯤일까

이런 공약들이 정말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값등록금을 약속한 대통령은 등록금이 싸지면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로 믿었던 지지자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기나 하고 있는 요즈음, 공약의 실천가능성과 실행의지의 진실성이 중요하다.

위와 같은 정책공약은 정책집행자와 입안자의 손발만 맞으면 충분히 지금 서울시가 가지고 있는 예산 주머니로 실행가능한 일이다.

시정 홍보를 위한 돈을 쓰지 않고 한강 르네상스 예산을 없애고, 디자인서울의 예산을 약자를 위한 복지와 사회적일자리 확충에 쓰는 것이 훨씬 낫다. 으리으리하고 비까번쩍한 외관보다 내실이 좋아야 대다수의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 아니겠는가.

같은 예산을 어디에 좀더 비중을 두어 쓰느냐에 따라 체감하는 복지의 수준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진보적 일꾼을 인정하는 것이 아직 우리의 시민들이 가진 의식과 가치로는 힘들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노회찬의 약속/ 진보신당/ 레디앙/ 5,000\



노회찬의 약속 - 서울, 2010년 6월

노회찬.노회찬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 위원회 기획하고 지음, 레디앙(2010)


태그:#서울시장공약, #노회찬, #공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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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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