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7일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인솔로 '명성황후의 피난 처'였다는 수락산의 용굴암과 그 지역에 남아 있는 유적, 유래 등을 살펴보았다.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잠시 피신을 해 있었다는 용굴암을 가려고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에서 만났다. 수락산에 산재해 있는 여러 등산길을 이용할 수 있지만 당고개역에서 출발하는 것이 그녀가 밟은 길이라고 한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대립각 속에서 터져 나온 것이 1882년 6월의 임오군란이다. 황후는 난을 피하려고 경기도 여주에 있던 친정집으로 가려던 길에 수락산 용굴암으로 방향을 틀고 이곳에서 7일간 숨어 있었다고 한다.

수락산 초입에서 바라다본 불암산. 산과 산 사이에 당고개가 놓여있다.
 수락산 초입에서 바라다본 불암산. 산과 산 사이에 당고개가 놓여있다.
ⓒ 박금옥

관련사진보기


수락산, 불암산은 노원구 일대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이다. 일부 구간을 빼고는 산세가 험하지 않고 경치가 빼어나 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산이기도 하다. 산을 오르기 전 수락산과 불암산을 가르는 당고개에 대한 유래를 들었다.

당고개의 옛 지명은 '당현'이었고 일명 '덕릉고개'라고도 이른다. 상계동에서 남양주 별내면 일대로 연결되는 고갯길이다. 예전에는 나무꾼들이 한양으로 나무를 팔러 올 때 이 고개를 걸어서 넘어왔다. 당시에는 산짐승들도 많았던 험한 고갯길이었다고 한다. 경사가 제법 되어서 자동차로 넘을 때도 힘겹게 느껴지는 도로다. 그러한 수락산 고개어름에 '덕흥대원군의 묘'(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가 있다.

조선 14대 왕인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은 선조가 왕이 된 후에 추존된 대원군이다. 왕이 된 선조는 자신의 아버지 묘가 '묘'가 아닌 '능'으로 불리길 원했다. '능'은 왕이나 왕비가 묻혀있는 곳을 말한다. 조정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반대했다.

이에 선조는 당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들어온 장사꾼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 '당고개'를 넘어 왔다고 하면 그냥 보내고, '덕릉고개'를 넘어왔다고 하면 후한 물건값과 융숭한 대접을 하도록 했다한다. 이런 소문이 퍼져 그다음부터는 당고개라 하지 않고 일부러 덕릉고개를 넘어왔다고 했단다. 인근 동네 이름도 덕릉마을로 남아 있다. 입소문으로라도 '덕릉'이 되도록 한, 선조의 고육지책이 스며있는 고갯길인 셈이다.

학림사까지는 도로가 포장이 되어있다. 황후가 걸었을 당시에는 분명 나무 우거진 오솔길이었겠지.
 학림사까지는 도로가 포장이 되어있다. 황후가 걸었을 당시에는 분명 나무 우거진 오솔길이었겠지.
ⓒ 박금옥

관련사진보기


당고개는 눈으로만 일별하고 전철역 4번 출구로 방향을 잡았다. 시장골목길과 주택이 잠깐 나오다가 곧바로 수락산 학림사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나온다. 그 앞에서 잠시 뒤돌아보니 불암산의 바윗덩이가 코앞에 닫도록 다가와 있다. 산에는 아카시나무의 하얀 꽃이 포도송이처럼 대롱거리며 단내를 풍긴다. 푸른 나무들은 아치를 만들며 하늘의 해를 가려주니 걷는 걸음 또한 가볍다. 이렇게 다소곳해 보이는 자연 앞에서 피난길에 급박했을 황후의 사정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학림사 가까운 길옆에 놓여있는 상궁 부도
 학림사 가까운 길옆에 놓여있는 상궁 부도
ⓒ 박금옥

관련사진보기


회원들과 노닥거리며 10여분을 걷다가 만난 것이 부도였다. 커다란 돌 항아리처럼 생겼다. 아무 설명 없이 길목에 나란히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원래 부도는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묘탑을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도는 '상궁부도'란다. 세월의 흔적 때문에 새겨져 있는 글씨가 희미하다.

연구회에서 제공한 자료를 보면 하나의 부도에 '상궁연화(尙宮蓮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궁궐에서 나와 이곳 학림사의 불자로 만년을 보낸 상궁들이라고 한다. 투박한 소금항아리 같은 부도 옆에서 다리쉼을 하며 조선시대 전문직 여성이었을 궁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용굴암으로 오르는 길. 왼쪽 담이 학림사. 이제 진짜 산길이다. 초여름 나무들의 색이 선명하다.
 용굴암으로 오르는 길. 왼쪽 담이 학림사. 이제 진짜 산길이다. 초여름 나무들의 색이 선명하다.
ⓒ 박금옥

관련사진보기


부도가 있는 곳에서 학림사가 얼핏 보인다. 고즈넉하게 들어앉아 있는 절 옆으로 계곡물이 알맞게 흘렀다. 이제부터 도로는 끝이고 산길이다. 용굴암까지는 1.3㎞가 남았다. 산행에 자신이 없는 회원 일부는 힘들어 했지만 그 산길을 험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산책하기에 알맞은 길이었다. 황후가 들었을 당시에는 산도 길도 사람의 손길에 덜 닳아서 많이 험했겠지만 지금은 순박해 보였다.

용굴암에 도착하니 보이는 것은 불암산 정상이다. 수락산은 용굴암을 품고 있으니 오히려  드러나지 않는다. 용굴암에서는 불암산 터널과 당고개역과 근처의 아파트촌이 한 눈에 들어왔다. 용굴암은 고종 15년에 창건된 암자로 수행자들이 기도를 하던 자연토굴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토굴에서 내려간 후, 우여곡절 끝에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 뒤 이곳에 하사금을 내린다. 용굴암은 그 돈으로 지금 대웅전 자리에 법당을 짓게 되었단다. 해설을 담당한 스님은 아마도 당고개를 넘어가려고 하다가 고갯길이 너무 험해 이곳으로 들지 않았나 싶단다.

수락산 용굴암에서는 불암산의 정상과 왼쪽에 불암터널, 산 밑의 사람살이 집들이 그대로 보인다.
 수락산 용굴암에서는 불암산의 정상과 왼쪽에 불암터널, 산 밑의 사람살이 집들이 그대로 보인다.
ⓒ 박금옥

관련사진보기


그녀는 시대의 강물을 거슬러 오르고 싶었던, 자신을 옥죄는 시대의 사슬을 끊어 보고자 애쓴 사람이지 싶다. 명성황후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는 서로 엇갈린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살던 시대를 똑바로 살아 보려한 걸출한 인물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내려오는 길은 걸음을 빠르게 한다.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를 파악하고 산을 내려올 때, 황후의 마음도 발걸음만큼이나 급하지 않았을까 헤아려보았다.


태그:#수락산, #용굴암, #명성황후, #당고개, #덕릉고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민기자가 되어 기사를 올리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