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갖가지 1년생 농작물을 비롯한 다년생 나무를 살펴보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과정이 사람의 생노병사와 비슷한 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햇볕과 토양과 물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도 그렇고, 특별히 성장의 단계를 뛰어 넘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식물들에게 갑작스런 추위, 가뭄, 홍수, 기나긴 장마는 사람들이 겪는 모진 세월에 다름 아닐 것이다. 또 예측할 수 없는 병충해로 인한 상실은 사람들이 병으로 인해 겪는 고통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텃밭으로 딸기밭으로 가는 길이다. 숨은 듯 텃밭 한 자락을 차지한 딸기밭은 관심 없으면 지나치고 말 것이다.
▲ 숙지원의 서편 길 텃밭으로 딸기밭으로 가는 길이다. 숨은 듯 텃밭 한 자락을 차지한 딸기밭은 관심 없으면 지나치고 말 것이다.
ⓒ 홍광석

관련사진보기


봄이 없이 훌쩍 여름으로 건너가는 날씨를 본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 기후라고 하는데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물들에게는 재앙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침 기온과 한낮의 기온 차가 큰 날씨는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식물들의 성장도 더딜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말 100년만의 꽃샘추위에 고구마 씨앗의 순과 감자의 싹이 꼬시라지는 것을 보면서 금년 농사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남긴 적이 있다. 그때는 분명히 그랬다.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작물의 생명력을 간과한 채 쉽게 포기하고 절망했던 얼치기 농부의 예감이 얼마나  엉터리였음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보 농부의 인식수준을 비웃기라도 하듯 날씨가 풀리면서 숨어 있던 감자의 싹은 새로 돋아나고, 씨고구마의 순은 다시 고개를 내민 것이다. 마을 송노인도 수확은 어떨지 모르지만 감자도 괜찮고, 고구마를 놓는데 지장이 없을 것 같다는 진단을 해준다. 참으로 다행이다.

5월 중순, 숙지원 텃밭에는 감자와 옥수수가 바쁘게 자란다. 완두콩과 강낭콩에서는 꽃이 보이고 줄지어 심어놓은 야콘과 고추모종도 건강하다. 그 중에서도 감나무 사이에 심은 딸기의 하얀 꽃은 더 반갑다. 묵은 잎이 뿌리와 새순을 감싸고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딸기, 숨은 듯 낮은 곳에서 붉은 열매의 넋을 품은 하얀 꽃을 본다. 작고 여린 몸으로 한 여름 쉼 없이 열매를 키워 사람을 즐겁게 하는 식물이 흔하던가!  

   이미 진 꽃에는 작고 푸른 열매가 보이기 시작한다. 여름 해가 길어질 무렵이면  붉어진 딸기를 볼 수 있으리라.
▲ 딸기 꽃 이미 진 꽃에는 작고 푸른 열매가 보이기 시작한다. 여름 해가 길어질 무렵이면 붉어진 딸기를 볼 수 있으리라.
ⓒ 홍광석

관련사진보기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벗은 설음에서 반갑고 임은 사랑해서 좋아라" 그렇게 시작되는 '임과 벗'이라는 노래가 있다. "딸기 꽃 피어서 향기로울 때를 고초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에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로 끝나는 노래에서 처음 만났던 꽃. 그 시절의 벗들과 그 노래를 부르며 취하도록 술잔을 권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꿈과 현실의 괴리에서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꽃 다음에 익어갈 붉은 열매를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앙상한  뽕나무에 잎과 함께  고개를 내민 오디가 경이롭다.  얼마후면 검게 익은 오디를 맛볼 수 있으리라.
▲ 오디 앙상한 뽕나무에 잎과 함께 고개를 내민 오디가 경이롭다. 얼마후면 검게 익은 오디를 맛볼 수 있으리라.
ⓒ 홍광석

관련사진보기


유년과 청년 시절을 거쳐 가정을 이루고, 그러다가 자식들이 자라면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들처럼 식물들도 꽃을 피워 열매를 남기고 어느 순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사라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리라. 그러면서 옛날의 일과 사람도 잊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독이 되는 열매를 남겨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식물은 드물지만, 타인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꽃과 나무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남길 수는 없는 것일까?

고르지 못했던 날씨 탓인지 금년에는 수확량이 많지 않을 것 같다. 꼴을 갖춘 매실이 귀엽다.
▲ 매실 고르지 못했던 날씨 탓인지 금년에는 수확량이 많지 않을 것 같다. 꼴을 갖춘 매실이 귀엽다.
ⓒ 홍광석

관련사진보기


가장 먼저 핀 매화나무에 제법 형태를 갖춘 매실이 보인다. 이제 좁쌀만큼 자란 자두도 얼마 후면 꼴을 갖추리라. 잎과 함께 달린 오디를 보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배꽃은 지고, 분홍빛 사과 꽃잎도 소리 없이 바람에 날리는데 감나무는 이제 연두색 잎을 키운다. 흐드러지던 철쭉도 한 시절의 빛을 바래는 중이다. 피었다가 지는 꽃잎의 정경이 곧 만남과 별리(別離)의 시화(詩畵)인 것을!

없는 듯, 혹독했던 짧은 봄에 이어 성큼 다가온 여름, 하얀 꽃은 붉은 열매가 되어 영글어질 것이다. "딸기 꽃 피어서 향기로울 때를 고초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에 노래했던 벗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보는 백발의 모습이 하얀 딸기 꽃 뒤에 그림자로 남아 어른거린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딸기, #오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개인의 잔잔한 기록도 역사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봄 길 밝히는 등불, 수선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