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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은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요양병원에 계신 노친께서 입원 5개월하고도 10일 만에 드디어 소변 주머니를 떼어내고 처음 외출을 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평소 가장 즐기시던 아귀탕으로 점심을 드시고 집에도 잠시 들렀다가 다시 병원으로 가셨다.

 

다음날 10일 저녁에도 외출을 하셨다. 호주에서 사는 누님의 넷째 딸 가족이 3년 만에 친정을 찾은 길에 외할머니 문병을 와주어서 노친은 또 한 번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아귀탕 전문 음식점에 가셔서 저녁을 드실 수 있었다.

 

다시 걸으시게 된 노친, 병원에서 외출도 하고 가족과 함께 음식점에서 식사도 하시는 노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또 반가워한다. '아들 내외의 효성 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아들의 효성이 기적을 만들었다"는 말도 듣는다.

 

 

일단은 기쁘고 즐겁다. 우선은 내 의지와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사실이 기쁘다. 환자와 보호자의 의지에 따라서는 현대의학의 항암치료와는 성격이 다른 대체의학 활용으로 기운을 차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도 기쁜 일이다.

 

노친이 지난해 6월초 서울성모병원에서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을 때는 여생이 6개월 정도라는 말도 들었다. 갑상선에도 암이 있다는 진단이었다. 고심 끝에 연세도 있으시고 해서 종양내과를 피하고 완화의학과를 선택했다. 통증 조절 속에서 여생을 마치시도록 해드리는 것이 옳은 일일 것 같았다.

 

호스피스 병동에 열흘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성모병원을 다니며 약을 타다가 드리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노친은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이었고, 여생이 6개월 정도라고 한 의사의 말이 실감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지난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후 김 대통령에 관한 내 글이 <오마이뉴스>에 오른 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복건성에서 사시는 분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그 분의 조언에 따라 본격적으로 대체의학을 활용하게 되었다. 그분은 중국에서 이름난 의사이며 대체의학 전문가이신 한 박사의 한국인 부인이라고 했다. 또 그 박사는 한국 유명 가수의 숙부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마늘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식이요법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방법의 대체의학을 적극적으로 실행했다. 점차 노친의 몸 상태가 좋아지는 것을 눈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고, 9월 23일에는 서울성모병원 영상의학과의 검사 결과를 보신 완화의학과 염창환 교수가 놀란 소리로 "폐가 깨끗해졌어요"라고 하는 말씀도 듣게 되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노친께 "폐암이었다"는 말씀을 드렸다. "폐암 말기에다가 갑상선에도 암이 있어서 여생이 6개월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어머니 몸의 암을 이긴 거라"는 말씀을 드릴 때는 어느 정도 흥분한 상태이기도 했다.

 

골반 골 전이 및 골절

 

그런데 지난해 11월 초부터 갑자기 노친께서 걷지 못하는 현상이 생겼다. 걷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급히 서울성모병원으로 모셨고, 정밀 검사가 시행됐다. 6월초 정밀 검사 때도 골반에 깨알만한 점이 있는 것을 포착했지만, 그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통증 조절이 주요 목적인 완화의학과의 진료가 계속되는 동안, 우리 가족의 대체의학 활용에도 불구하고 골반에 붙은 암세포가 커지면서 그 부위가 그만 골절된 것이었다.         

 

 

노친은 11월 한 달 꼬박 호스피스 병동 생활을 했다. 노친의 연세와 체력 문제 때문에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는 배제된 상황이었다. CT 촬영과 MRI 촬영 과정에 조영제가 투입되고 또 여러 가지 약물 작용으로 일주일 이상 배변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또 오래 배변을 하지 못하니 폐도 크게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 빚어졌다.

 

노친은 사경을 해맸다. 호스피스 병동 30년 경력의 이경식 명예교수님은 "환자가 이번 주 안으로 좋아지지 않으면 돌아가시게 되니 알릴 사람들에게는 알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호스피스 병동 간호수녀님이 임종이 임박한 환자 보호자들에게 실시하는 '교육'에도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인체의 대장과 폐는 '짝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장 안에 가득한 숙변을 모두 배출시키면 부어오른 노친의 폐가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인체의 독소를 제거하는 데는 웅담과 마늘이 최고라는 말을 예전에 들었던 나는 노친께 웅담과 흑마늘을 집중적으로 복용시켰다. 그것들이 좋은 작용을 일으켜서 대장 안의 숙변을 모조리 배출시켜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였다.

 

내 기대는 적중했다. 한 번 관장을 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 엄청난 양의 숙변이 배출됐다. 그렇게 숙변이 배출되고 나니 노친의 얼굴에 회생의 기미가 돌기 시작했다. 노친은 차츰차츰 증세가 좋아졌다. 이경식 명예교수님 "최상의 상태"라고 말한 가운데 지난 11월 31일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으로 노친을 옮겨올 수 있었다.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다니다

 

상태가 좋아져서(의료보험 체계상 한 병원에 오래 있을 수 없는 사정도 있고 해서) 우리 고장의 요양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지만, 노친의 여생이 2개월 정도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병원에서 여생이 얼마일 거라고 짚어주면 거의 들어맞는다는 주변의 말들도 이상한 부담감을 주었다.    

 

또 노친의 골반에 붙어서 골절까지 불러온 암세포는 그대로인 상태였다. 노친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병상에서만 생활해야 했다. 노친의 병상에는 '골반 골 전이 및 골절'이라고 적힌 표찰이 붙었다. 또 요양병원 원장님은 내게 "환자의 통증을 조절해서 편안히 여생을 마치시게 하는 것이 요양병원 입원 목적"임을 상기시켜 주시기도 했다.

 

 

나는 '요양병원' 입원 목적에 동의하면서 큰 욕심은 갖지 않았다. 그저 노친이 암세포에 의한 큰 고통을 겪지 않고 사시다가 돌아가시는 것만도 복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노친께서 가족들에게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고 즐겁고 편안한 마음 상태로 여생을 사시다가 돌아가시도록 해드려야 한다는 마음 한가지면 충분할 거라는 생각도 했다.

 

엉덩이뼈 골절까지 부른 '골반 골 전이'라면 골수에까지, 그러니까 전신으로 암세포가 퍼진 상태라는 뜻일 터였다. 또 아무리 약으로 통증 조절을 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노친이 통증을 겪지 않도록, 노친의 몸 안에서 암세포가 더욱 확장되거나 활개 치지 못하도록 내 나름의 방법으로(그 방법들에 기대와 확신을 갖고) 최선을 다했다.

 

매일 하루 세 번씩 식사 시간에 맞춰 병원에 갔다. 먼 거리 출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의치를 끼워 드리고, 식사를 도와 드리고, 의치를 뺀 다음 병원 약을 복용시켜 드리고, 양치를 하게하고, 의치를 깨끗이 씻어다가 소독 상자에 넣은 다음에는 등 안마와 지압, 팔과 다리 주무르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집에서 '가져간 것'을 복용시켜 드리고 병실을 나오면 대개 1시간 가량 소요되었다. 노친이 화장실을 가게 되면 시간이 더 걸리기도 했다. 

 

집에서 가져간 것으로는 웅담, 흑마늘, 홍삼, 오가피 진액 등이 있다. 처음에는 웅담을 한 달 정도 사용했는데, 내 경제 능력이 부쳐서 지속적으로 사용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식사 때마다 마늘을 꼭 드시도록 했다. 흑마늘, 홍삼, 오가피 등을 번갈아 사용했는데, 현재는 아침에는 오가피, 저녁에는 흑마늘 환을 드리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전전자파 광합성 녹말과 바이오 에너지 기공수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드린 일이다. 회전전자파를 방출하는 기계 위에 플라스틱 물병을 4시간 정도 올려놓으면 알칼리 수와 육각수로 변한다고 한다. 임산부 자궁 안의 양수와 똑같은 성격의 물이라는데, 그 물을 계속적으로 공급해 드렸다.

 

또 그 물에다가 회전전자파 광합성 녹말을 타서 하루 세 번 공복에 한 컵씩 드시게 했다. 회전전자파 광합성 녹말은 수원에 있는 한 대학 모 교수님이 개발해 임상 실험을 하면서 특허 출원을 한 물질이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 그 대학에 가서 물질을 받아왔다. 내 정성을 갸륵하게 보셨는지 얼마 전부터는 그 교수님이 택배로 보내주셔서 편안히 받아서 사용하고 있다. 또 주변의 여러 암 환자들에게 소개를 해주기도 했다.

 

 유 상태를 느끼고 확인하는 기쁨

 

내가 하루 세 번씩 병원을 가니 노친은 배변을 기저귀에 하지 않고 아들 오기를 기다렸다가 화장실에 가서 보시곤 했다. 얼마 동안은 오로지 내 두 팔의 힘으로만 노친을 안아서 휠체어에 태우고 또 변기에 앉혀 드려야 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 진땀이 나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3월 중순 어느 날, 노친을 휠체어에 태우던 나는 내 팔이 이상하게 가벼운 것을 느꼈다. 노친이 두 다리에 힘을 준다는 것을 직감했다. 노친이 그렇게 거들어주니 노친을 휠체어에 태우고 또 변기에 앉혀 드리는 일이 아주 수월하게 됐다.

 

그런 현상을 며칠 동안 느끼고 확인한 끝에 나는 지난 26일 노친께 병상을 잡고 걸어보라고 했다. 몇 걸음 걷는 것을 보고 보조기구를 잡고 병실 안을 걷게 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병실 안에서 걷기 운동을 시킨 다음 29일 낮에는 병실 밖으로 나가 화장실까지 걷게 했다. 각 병실의 요양보호사들과 간호사들이 노친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박수를 치며 축하를 하기도 했다.

 

 

그 후 노친은 화장실을 스스로 갈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변기에서 일어서는 게 힘들어 남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곧 변기 앞 양쪽의 시설물을 잡고 일어설 수 있게 됐다. 또 처음에는 요양보호사들이 불안해 화장실에 따라가고, 다시 가서 데려오고 했지만 그것을 부담스러워한 노친이 원장께 간곡히 부탁해 지금은 아무 때고 혼자 자유롭게 다니신다.

 

변비 문제가 해결되면서 한동안은 하루 몇 번씩 화장실을 가야 할 정도로 잦은 배변이 고통스러웠지만 설사가 아닌 것을 확인한 내가 "그것도 낫는 과정이니 걱정하지 말고 즐겁게 걷기 운동하는 셈치고 화장실을 다니시라"고 격려를 해드렸다. 지금은 하루 두세 번 정도 화장실을 가신다.

 

한동안 지워졌던 기억들도 모두 소생됐고 들리지 않던 귀도 들리게 됐다. 아파트에서 사신 4년 여 동안의 기억이 통째로 지워져서 지난 2월 처음 집에 갔을 때는 "언제 이 집으로 이사 왔느냐"고 물으실 정도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당신 방 플라스틱 서랍장 몇 번째 서랍에 뭐가 있으니 가져오라는 말씀도 하신다.

 

또 한동안은 앞 병상의 할머니들과 전혀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듣지를 못했다. "나 귀먹어서 뭔 말인지 몰라요"라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앞 병상 할머니들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이제는 식사 때도 내가 할 일이 없게 됐다. 한동안은 내가 밥을 떠먹여드리곤 했는데, 이제는 당신 손으로 숟가락질은 물론이고 젓가락질도 정확하게 잘하신다. 그리고 이제는 소변주머니도 떼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이 한결 수월하고 자유롭다.

 

지난 1월 말쯤 내가 병원 원장께 부탁해 소변주머니를 한번 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연배뇨가 전혀 되지 않고 방광의 통증을 호소해서 다시 소변주머니를 착용해야 했다. 그런 전력이 있어서 원장님과 간호사들은 걱정을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소변 검사를 하면서 "소변이 아주 맑다"라는 말을 했고, 내 요구에 따라 8일 저녁 감각 테스트를 한 다음 9일 드디어 소변주머니를 분리했다.

 

소변주머니를 분리했을 때 나는 적이 긴장을 했다. 자연배뇨가 되지 않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너무도 쉽게 자연배뇨가 되었다. 화장실 밖에서 노친의 배뇨 소리를 들으며 기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생활을 조금씩 찾아가기로

 

노친이 스스로 화장실을 다니고, 비록 보조기구를 사용할 망정 비교적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됨에 따라, 나는 이 달 초부터는 하루 두 번씩 요양병원을 갔다. 아침과 저녁에만 가기로 한 것. 전에는 오전 7시 20분쯤 갔다가 8시 30분쯤 돌아와서 금세 다시 가야 했다. 조금 있으면 또 병원에 가야할 시간이 되는 것이다.

 

무슨 일 한 가지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소설은 커녕 토막 글 하나 온전히 끝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낮에는 병원을 가지 않으니 집중해서 토막 글 하나라도 온전히 쓸 수 있게 됐다. 노친은 내게 "하루에 한 번씩 오라"고도 하고, "이삼일에 한 번씩 와도 좋다"고 하신다. 하지만  당분간은 하루 두 번 가는 것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동안 먼 거리 출타를 자제하다 보니 가고 싶은 곳, 참가하고 싶은 일 등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는 '오체투지 순례기도' 마지막 코스에 참가하지 못해 안타까웠고, '용산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 아팠다. 또 올해는 '4대강 죽이기'에 저항하는 천주교와 문인들의 강변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적이 죄스러웠다.

 

노친께서 소변주머니를 떼고, 엊그제와 어제 연 이틀 외출해 외식을 하신 것을 자축할 겸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노무현 티셔츠'를 꺼내 입고 병원에 갔다. 노친이 내 모습을 보고 "왜, 어딜 가려구?" 물으셨다.

 

나는 "앞으로 '노무현 음악회'에도 가고, '유품 전시회'에도 가고, 4대강 사업 반대 '생명미사'에도 가고, 문인들의 4대강 관련 행사에도 참석하고 그럴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노친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더욱이 노친이 병상에 계실 경우에는 자식들에게는 무거운 '짐'일 수 있다.  '십자가'라는 표현도 가능하다. 하지만 기꺼이 지고 가야 할 짐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십자가일 터이다. 십자가와 같은 그 '짐'을 잘 지고 가는 마음으로 사회정의 문제와 공동선 쪽에도 부단히 관심을 두고 행동하며 살 생각이다.

 

노친을 다시 걷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태그:#호스피스 병동, #요양병원, #폐암 극복, #골반 전이와 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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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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