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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꽃이 핀 아름다운 풍경. 말 그대로 도원경, 무릉도원이다.
 복숭아꽃이 핀 아름다운 풍경. 말 그대로 도원경, 무릉도원이다.
ⓒ 최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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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정말 무릉도원이네."

지난 5일, 5시간에 걸친 비내늪 탐사로 몸은 지치고 얼굴은 화끈거릴 정도로 익어버린 채 승합차에 널브러져 여강선원으로 돌아오던 길. 잠이 슬며시 밀려올 때쯤 창밖에 펼쳐진 풍경에 눈이 번쩍 띄었다. 만개한 복숭아꽃은 분홍과 하양이 어우러져 있고 줄지어 선 나무 아래에는 짙푸른 풀밭 사이로 샛노란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무릉도원. 복숭아꽃이 피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뜻한 도원경(桃源境)의 다른 말이다. 그곳이 바로 충북 충주시 양서면 지당리 일대의 남한강변에 있었다.

환경단체 사람들도 모두 흥분해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차에서 뛰어내렸다. 평소 화려한 색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연이 만들어낸(인간이 약간 간섭하기는 했지만) 색의 조화는 그동안 보지 못한 아주 낯선 풍경이었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놀이동산에서 하는 튤립축제나 대규모의 꽃박람회에 갔을 때도 이렇게 감동하지는 않았다.

자연이 만든 환상적인 색의 조화. 저 꽃길을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자연이 만든 환상적인 색의 조화. 저 꽃길을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 장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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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로에 10만 평이 필요하냐?"

사실 남한강변의 이 복숭아밭에 대한 이야기는 5일 아침, 조사를 떠나기 전 다른 사연을 통해 알고 있었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밭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사연인지 궁금해 돌아가던 길에 그곳을 지나치면 잠시 내려 취재를 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환상적인 풍경에 놀라 내려보니 바로 이야기했던 그 밭이었다. 정보를 전해 준 환경단체 사람도 토끼눈을 하고 "전에 봤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밭에는 도로 쪽을 향해 광목천에 페인트로 서툴게 쓴 문구들이 걸려 있었다. '자전거 도로에 10만 평이 필요하냐?', '내 땅 그냥 두어라! 사유지 출입 금지' 등의 표어에는 농지가 4대강 사업으로 강제 수용돼 생존권을 위협받는 농민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밭 안쪽으로 들어가 강변 쪽으로 다가가다가 사다리 위에서 작업을 하는 농민을 만났다. 복숭아밭 주인인 이상국(44)씨는 "정부가 토지소유자들에게 설명회 한 번 하지 않고 농민들 생존이 걸린 농지를 강제 수용하겠다고 한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현수막을 내건 이유를 설명했다. 또 "여기서 20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지만 수해를 입은 적이 한 번도 없다"며 "강에 문제가 있으면 강만 공사하면 되지 강변까지 다 바꾸려는 것은 문제다"라고 덧붙였다. 이씨는 인근의 농지를 가진 마을 주민 40여 명의 서명을 모아 토지강제수용을 추진하는 대전지방국토관리청에 민원을 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좀 더 취재하고 싶었지만 타고 온 차량이 한 대뿐이었고 환경단체사람들은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환경단체 사람들과 함께 여강선원으로 돌아갔다가 다른 차량으로 다시 오기로 했다. 몇 시간 후 다시 돌아와 보니 10여 명의 마을 주민이 모여 있었다. 떠나기 전, "함께 민원을 낸 분이 있으면 한두 분 더 같이 만나면 좋겠다"고 한 말이 일을 크게 벌렸나보다.

모여 있는 주민은 대부분 60대 이상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붉은색 <오마이뉴스> 명함을 전해 받는 손에는 시커먼 굳은살이 있었고, "오마이뉴스? 여긴 뭐하는 곳이여"라고 말할 때는 입가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평생 이 땅에서 농사만 지어온 사람들의 4대강 사업 성토대회가 시작됐다.

복숭아밭에 펼쳐진 현수막. '자전거도로에 10만 평이 필요하냐?'
 복숭아밭에 펼쳐진 현수막. '자전거도로에 10만 평이 필요하냐?'
ⓒ 정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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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살려주는 사람 뽑아야지"

"연세 드신 분들은 강제 수용되면 농약 먹고 죽겠다는 분도 있어."
"4대강 사업, 누굴 위해 하는 거여. 충주댐 만들어서 물 다 썩었는데, 또 보를 만들어."
"충주댐 생기기 전에는 유리처럼 물속이 보였어. 물이 고이면 물이 썩지 맑아지나."
"여기에 자전거 도로가 뭐가 필요해."
"하천정비면 하천만 정비하면 되지 왜 농사 잘 짓는 땅을..."
"이게 다 건설업체만 먹여 살리려고 하는겨."
"4대강 사업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주는 게 아니라 사람 죽이는 사업이에요. 농민들 죽이는 사업이에요."

기자의 질문이 끼어들 틈도 없이 주민들의 목소리는 계속됐다. 덕분에 이 마을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앙서면 지당리는 4대강 사업 7공구인 영죽지구에 약 10만 평 정도의 강변토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농사를 짓는 개인 사유지는 약 5만 평이다. 주민들은 농사를 짓고 있는 사유지를 공사에서 제외할 것을 우선 요구하고 있다. 만약 강제 수용이 불가피하다면 정당한 토지보상을 실시하고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대체토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토지가 강제 수용되고 대체토지를 받게 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른 토지에 정착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최소 5년 이상이 걸리는데 마을 주민이 대부분 고령자라 토지를 잃으면 더는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토지가 강제 수용되면 농약을 마시고 죽겠다는 분들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대화는 계속 이어져 다가오는 지방선거까지 옮겨갔다. 사업을 추진하는 쪽이 불리해질 수 있어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이 민원을 접수하고도 결과 발표를 미루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어떤 사람을 뽑을 것이냐는 질문을 어렵게 던졌다. "당연히 우리한테 협조해 주는 사람, 우리 살려주는 사람 뽑아줘야지", "우리가 나서서 (선거) 운동도 해주겠소"라는 당연한 답이 돌아왔다.

대전지방국토관리청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영죽지구의 강변지역 공사는 재검토 중"이라며 "토지감정평가 및 공사와 관련해 주민설명회를 열 예정"이라고 밝혔다.

마을의 농지를 지키기 위해 가장 앞장서는 이상국씨는 기자와 대화 중에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이란 말을 계속 반복했다. 농지를 지키는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4대강 사업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 땅만 빠지면 된다'는 이기심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말 뒤에 이어진 말은 모두 정당한 주장이었다. 아마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대한 국가 앞에 선 작은 국민이 느끼는 두려움.


태그:#4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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