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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
▲ 책겉그림 〈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
ⓒ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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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창립하여 목회한 지 2년이 돼 가고 있다. 나름대로 동네 앞에 나가 주보를 돌리며 전도를 하고 있고, 가정 모임도 주도하여 성경공부도 한다. 그때마다 내 외모에 신경도 쓰고, 또 성경말씀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연구를 한다.

예배당 안에서는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외모는 물론이고, 설교하거나 기도하거나 찬양을 할 때도 예외이지 않다. 그런데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행위라고 하지만 때론 보이는 교우들을 위한 예배 행위로 전락할 때가 없지 않다. 예배당에 나온 교우들이 더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말투와 어법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12일인 어제 저녁부터 수안보에서 열린 개척교회 목회자 세미나에 강사로 나선 분은 그 속에 담겨 있어야 할 진정성을 일깨워 주었다. 성결교단에서 바른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그 분은 현대판 목사들이 예수 시대의 사두개인과는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분은 당시 사두개인들이 깊이 기도하는 사람들도 좋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돈 많은 사람들도 좋아했다고 꼬집었다. 그것은 그 강사 목사님이 강조한 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질책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그 분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제발 쇼(show)하지 말자고 강조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니 나도 현재 '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만들어 내고 있는 주보에 상업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 성경 공부하는 가정모임에 거룩한 분위기를 주도하기 위해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 예배당에 나온 교우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평화로움을 선사하고 그 속에서 기도할 때 거룩한 목소리를 자아내는 것, 그 모두가 쇼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젯밤 그 세미나가 끝나고 잠시 시간을 내 주원규 님이 쓴〈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를 읽어나갔다. 무협지와 삼류포르노그래피와 게임중독에 한때 중독된 그라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남다른 환각과 재미와 깊이에 빠져드는 듯 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며 담배와 술을 벗했고, 충주에서 대학생활을 할 땐 매춘부들이 넘나드는 환락가 여인숙에서 더부살이 했고, 병역특례로 3년간 방위산업체에서 혼이 빠질 정도로 일 했고, 잠시 동안 노숙자로 전전긍긍 방랑하다가, 뭔가 새로운 결심으로 신학대학에 들어갔다던 그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일률적인 종교색체로 강의하는 목사들의 가르침이 여느 사육장과 다를 바 없었고, 신학대학교 총장이란 목사도 문어발식으로 여러 것들을 운영하고 있었으니 그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은 그저 쇼(show)하는 것으로 비칠 뿐이었다. 결국 6개나 되는 카드로 빚을 내 낯선 땅 핀란드로 날아가 한 달을 살고 나서야 그 모든 불량스러운 체증이 해체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 참된 예수의 실체를 보고 느꼈다는 그다.

"3년여에 걸친 신학연구원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던 그때, 나는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나의 목표를 스스로 무교회주의를 넘어선 대안 교회라고 부르짖게 되면서부터 나는 목사 안수를 피하지 않았다. 대안 교회란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서 텍스트를 마음의 제단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권력과 자본의 영향으로부터 최소화되는 점조직으로서의 교회를 지향한다고 나는 나 자신에게 대안 교회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주입했다."(142쪽)

불량기 섞인 방랑과 방황의 터널을 지나 목사가 된 그는 현재 자기 노동을 하며 대안 교회를 세우는 데 뜻을 바치고 있다. 이른바 건물과 제도만을 확대해 가는 한국교회와는 다른 방향으로, 성서의 바른 텍스트를 연구하여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노마드 교회를 이끄는 게 그것이다. 결코 허세를 부리거나 거룩한 목소리를 만든다거나, 성공주의와 맞물린 자본의 영향과는 거리가 먼 교회이다.

한때 카드빚에 시달릴 때 창작하여 쓴 글이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그 후 우리시대 네 명의 루저들이 살아가는 힘겨운 인생역정을 그린 <열외인종 잔혹사>가 14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는 일약 유명 작가가 되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지금도 글을 쓰고 있지만, 그것이 자본에 잠식되는 게 아닐지 우려스럽다고 한다. 글을 쓰는 것이 자신에게는 진심어린 기도의 시간인데, 그 황홀한 글쓰기가 물욕과 흥정하는 것이라면 그 역시 불량기 섞인 의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까닭에서다.

아무쪼록 자본에 잠식된 불량기 섞인 글쓰기를 해체하여 온 기도를 바치는 듯 황홀한 글쓰기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다. 대형화되고 조직화된 한국교회가 해체되고 참다운 교회본질을 회복하는 여러 대안 교회가 세워지길 바라며 애쓰는 그다. 그렇다면 나를 비롯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무엇을 해체해야 할까. 분명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쇼(show)'하고 있는 걸 스스로 해체해야 하지 않을까?


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

주원규 지음, 텍스트(2010)


태그:#쇼(SHOW), #대안 교회, #한국교회, #주원규,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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