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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주> 지방공무원 6급으로만 16년차인 통합공무원노동조합 부평구지부 박준복(52)
지부장이 33년 동안의 공직생활을 그만두기로 했다.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고향 소청도(인천 옹진군 대청면 소청리)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여러 지방자치단체를 거치면서 한때는 공직자에게 최고의 영예인 청백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는 공직사회 개혁을 위해 공무원노조를 결성하면서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해임을 당하기도 했다.

 

우여 곡절 끝에 복직한 후 2004년 공무원노조 총파업 이후 무너진 노조를 세우기 위해 다시 현장으로 들어갔다. 후배 공무원들이 사무관(=5급)으로 승진할 때도 그는 16년차 6급 공무원으로 남았다. 권력자의 입장에선 눈엣가시였던 그는 복직 후 6급 팀장임에도 불구, 동 주민센터 무보직으로 좌천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그런 그가 33년 동안 이어온 공직생활을 접기로 했다. 박준복 지부장은 퇴직 후에도 지방재정 건전성 문제를 연구하고 시민참여예산운동을 폭넓게 벌일 계획이다. 여전히 공직사회 개혁을 화두로 삼고 있는 그는 지방권력을 개편하지 않고서는 공직사회의 미래도, 지방자치의 미래도 없다고 했다. 33년 공직에 몸담았던 한 청백리의 이야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죽비소리처럼 다가온다.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소청도 소년의 꿈

 

박준복 지부장은 1959년 경기도 옹진군 소청면(=소청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인천시 옹진군 대청면 소청리다. 뭍에서 12시간 동안 배를 타고 가야 닿을 수 있는 소청도에서 가난은 그를 독학으로 단련시켰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독재를 손질하던 71년은 박 지부장이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인천으로 나오던 해였다.

 

그는 인천 중구 신흥동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가난 때문이었다. 인천 최고의 예산전문가로 인정받는 지금도 연구에 몰입하는 그의 독학정신은 이때부터 싹텄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공부를 중단해야했지만 워낙 집안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서운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나무 심고 도로 닦는 취로사업(=공공근로사업)이 있어 마을일을 도와주다가 열여덟 살 때(1976년) 면출장소가 들어서자 거기에 상용직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공직생활을 시작했다"고 들려줬다.

 

상용직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80년 정규직 발령을 받는다. 틈틈이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공무원임용시험을 치러 80년 12월에 정규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박 지부장은 "지금이야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4~5시간이면 도착하지만 그때는 10~12시간 걸렸다. 공부하려면 책이 필요한데 책 사러 인천에 가려면 꼬박 하루를 비워야 했다. 가는데 12시간 오는데 12시간이었다"며 "새벽잠을 뒤로 하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길을 나서도 해 저문 저녁이 돼서야 인천에 도착했다. 일보고 친척집에서 잠을 잔 뒤 다시 12시간 배타고 저녁에 섬에 돌아오곤 했다"고 말했다.

 

도서지역에서 시작한 공직생활은 근무지가 주로 도서지역이었다. 대청면(=대청도)과 대부면(=대부도), 자월면(=자월도) 등 주로 옹진군에 속한 면사무소에서 일을 익혔다. 그런 뒤 86년 처음 뭍으로 나오게 되는데, 뭍에서 첫 발령지가 과천시였다.

 

주민 입장에서 일하는 걸 사명으로 여겼지만...

관제선거 알면서도 순종해야했던 암울한 시절

 

과천시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그가 뭍으로 나오길 원해서였다. 92년 인천직할시 북구(=현 인천광역시 부평구)로 오기까지 시․도를 넘나들며 과천시와 안산시 등 지자체 6곳을 거치면서 행정업무를 두루두루 익혔다.

 

그는 당시 주로 회계과(=예산팀)ㆍ서무(=공직내부 행정)ㆍ사회(=사회복지)ㆍ총무과(=자치행정과)․ 민원봉사과 등의 업무를 맡았다. 훗날 이 업무는 지방재정 분석과 사회복지정책 마련, 시민참여예산운동 등 그의 지평을 넓히는 밑거름이 된다.

 

그렇게 6년여를 경기도에 속한 행정관청에서 근무하다가 고향과 같은 인천에서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인천으로 오게 된다.

 

정규 공무원으로 발령을 받았던 시대는 암울한 군사독재시대였다. 독재자의 편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의 고민이 깊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자에게 순종해야하는 공무원의 신세였다.

 

박정희 군부의 뒤를 이어 또 다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해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신군부를 잇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 지부장은 당시 상황과 자신의 번민을 이야기했다.

 

"사실 당시 내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이 사회를 인식하는 데 빈약했다. 나중에 가서야 내 의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물로 그것은 공무원노조를 준비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때는 순종하는 자세가 몸에 뱄고, 그게 공직문화였다"며 "동사무소 근무할 때였다. 선거인명부를 공무원이 만든다. 선거인명부에 동그라미ㆍ세모ㆍ엑스(=X)표를 매긴다. 동그라미는 여당, 엑스는 야당이라는 표시고 세모는 미확인인데 이걸 작성해서 상부로 넘겼다. 그러면 세모로 분류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작업이 들어갔다. 그렇게 87년 대통령선거와 88년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졌다."

 

감사원도 탄복한 행정관행 개혁

권력자에겐 눈엣가시인 '목민'의 역할

 

92년 인천 북구로 오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공직생활 2장이 열렸다. 2002년 공무원노조를 설립하면서 구속되기까지 그가 거쳐 간 곳에서 행정 개혁이 일어났고, 공직사회 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을 염원하는 공무원들이 공무원노조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행정 개혁, 박 지부장은 그게 처음부터 염두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과천이나 안산시는 신도시여서 비교적 재정이 탄탄했다. 공무원도 창의성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업무를 위해 자기계발도 하고, 성취감도 높았다"며 "하지만 인천 북구(=부평구)는 인구는 많은데 재정은 열악했다. 공무원들이 민원에 치여 살 정도로 민원처리에 급급했다. 그렇다 보니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그는 외부 재원을 끌어들이는 방안과 내부 재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지금은 보편화된 '사랑의 쌀 모으기 운동'이 박 지부장이 고안한 대표적 예다.

 

97년 IMF 경제위기로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하자 사회복지업무를 맡고 있던 그는 "지자체 재원만으로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데 한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민간운동을 전개했다.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공공이 나서 사회복지를 책임지는 게 옳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그 방안을 고안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장례도우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가정 형편이 아주 어려워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가정에 장례물품을 제공하고 행정지원을 펼쳤다.

 

박준복 지부장을 공직자로서 돋보이게 한 것은 행정관행 개혁이었다. 94년 인천 북구청은 세무비리로 얼룩졌다. 지금처럼 전산시스템이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기록해야했다. 그러던 중 지방세 일부를 착복하는 세무비리가 터진 것. 나중에 전산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이 부분은 상당히 해소됐지만 부패한 지방권력 비리는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뿐이 아니다. 단체장의 업무추진비는 지금도 도마 위에 오르내리지만 당시 업무추진비 관행은 지금보다 더했다. 당시 총무팀장을 맡고 있었던 박 지부장은 단체장이 업무추진비를 사용하려하면 명확한 사용처가 있어야한다며 지출을 해주지 않았다. 사실 이 때부터 박 지부장은 권력자에게 눈엣가시로 박히게 되고 나중에는 좌천을 겪게 되고 구속까지 당한다.

 

인사권을 쥔 단체장이 요구하는 업무추진비를 당당히 거부할 수 있는 공무원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그늘 불편부당한 업무추진비 요구를 당당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그의 앞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좌천이었지만 감내했다. 그리고 퇴직을 앞둔 지금도 후배 공무원들에게 소신 있는 공직업무 수행을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그와 같은 소신을 택한다면 우리 공직사회의 모습은 제2의 제3의 박준복을 잉태하는 구조다. 

 

박 지부장은 "지방관청과 민간업자 사이엔 수많은 계약이 존재한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수의계약이다. 97년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계약체결 부서인 경리팀에서 팀장으로 일하면서 수의계약도 공개입찰에 준하는 방법으로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 계약금액이 2000만원 이하일 경우 수의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는데, 우린 1000만원 이하로 낮추고 3군데 사업자를 불러 비교한 뒤 수의계약을 체결했다. 지역사회에서 상당한 파장이 일었다. 그때 구청장이 초대 민선 구청장이었는데 이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감사원에서 이를 문제 삼아 조사가 시작된 것. 박 지부장은 "감사원이 국회법을 거론하면서 법에 없는 행위를 한다고 문제 삼았다. 그래서 국회법에는 '수의계약 할 수 있다'라고 돼있지 '해선 안 된다고 한 건 아니지 않냐?'고 논쟁이 붙었다. 그런 뒤 수의계약을 준공개입찰로 전환한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더니 감사원이 나중에 오히려 취지에 공감하고 이 모델을 알리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www.bpnews.kr)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청백리, #죽비소리, #공무원노조, #공무원, #인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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