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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섰습니다.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3박 4일에 걸쳐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다들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기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슬프고 아픈 만남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팠던 자리는 부당해고를 당한 아주머니 세 분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눈물은 자신의 안위보다는 자녀의 학업을 계속 뒷바라지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를 걱정하는, 온전히 자식들만을 생각하는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세상' 두 번째-<보이지 않는 사람들> 여는 글에 저자 박영희

길에서 만난 세상 두 번째 이야기-<보이지 않는 사람들> 겉그림
 길에서 만난 세상 두 번째 이야기-<보이지 않는 사람들> 겉그림
ⓒ 우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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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부터 르포 작가 박영희의 팬이 되었다. 르포집 <길에서 만난 세상-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서>(우리교육 펴냄)이란 책을 읽는 순간부터. 이 책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격월간지인 '인권'에 실린 글들을 엮은 것이다.

작업 중에 다쳤는데 보상은커녕 자신도 모르는 사이 퇴사 처리된 어느 비정규직의 눈물을 통해 본 비정규직들, 앉아 있으면 먹는 것이 생각나 이른 새벽부터 하루 종일 걸어 다닌다는 김씨 할아버지 부부를 통해 본 도시 노인들, 잠잘 때도 죄의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고3 수험생,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 고공철탑위의 투쟁 노동자 등이 주인공인 이 책은 내게 별 의미없이 스치고 말던 세상과 주변 사람들을 좀 더 찬찬히 바라보고 가슴으로 이해하게 했다.

경기불황과 악재 때문에 몇 년간 공들였던 가게를 접어야만 했던 슬픔과 어린 자식들과 함께 헤쳐 나가야만 하는 세상에 대한 샛노란 현기증으로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나는 봄에 읽었었다. 여하간 이 책은, 책속의 사람들은 그해 봄 내게 참 많은 용기와 격려를 주었다. 때문에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책이 된 것이다. (<오마이뉴스> 관련 서평: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울었다')

"재개발이라는 것이 '인천상륙작전'을 쏙 빼닮았더라구"

얼마 전, '길에서 만난 세상' 두 번째 이야기인 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우리교육 펴냄)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솔직히, 첫 번째 책처럼 울컥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으리라 지레짐작했다. 한편으론 어서 빨리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꼭 소개해야 한다는 정체모를 책임감 또한 갖게 됐다. 이렇게 만난 이 책의 여는 글 첫머리부터 가슴 짠하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첫 번째 이야기는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 거침없이 불고 있는 재개발이란 바람에 수 십 년 동안 살아온 터전을 빼앗겨야만 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저자가 찾은 곳은 흑석동 제7구역 재개발지역.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가 버린 한쪽에선 철거가 한창인데 그 한쪽에선 이런저런 사정으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숨을 짓고 있다.

"지난해 가을이었지, 아마. 추진위(재개발추진위원회)라는 데서 나와서는 개발 동의서에 도장만 찍어주면 새 아파트를 한 채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 믿지 않았어. 오래전 일본 놈들이 그랬거든. 저희 놈들 이익이 되는 것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 그리고 이번 일을 겪으면서 깨달은 거네만 재개발이라는 것이 예전 '인천상륙작전'을 쏙 빼닮았더구먼. 삐이십구(B29)의 융단폭격이랑 무엇이 다른가. 산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니 이게 어디 개발인가. 전쟁이지"-흑석동 제7구역 김 노인

오죽하면 김 노인이 전쟁에 빗댈까. 젊은 날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5년간 가족들과 떨어져 돈을 벌어 마련했던 집이란다. 아들 둘과 딸을 키워낸, 가족들의 행복이 가득 스민 집이란다. 그러니 쉽게 떠나지 못한다. 김 노인은 덧붙인다. "칠십 평생의 꿈이 이 집에서 눈을 감는 것. 나에게 이런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라고. 하지만 글쎄? 용산 짝 나지 않을까.

김 노인과 헤어진 저자가 만난 흑석동의 또 다른 주민인 최형국씨도 김 노인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가 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흑석동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사람이다. 그도 김 노인처럼 내 집을 가진 가옥주인데, 재개발 덕분에 머잖아 세입자로 전락할 판이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재개발 이후 주어진다는 아파트가 전체 주민 중에서 20퍼센트만 입주가 가능하고, 그마저도 추가 부담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저 같은 경우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같은 평수의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최하 2억은 더 있어야 한다네요. 이러니 가옥주로 살다 세입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흑석동 제7구역 최형국씨


재개발 혹은 뉴타운과 함께 정부가 늘 먼저 앞세우는 말이 있다. "내 집 장만이 힘든 서민들이 보다 쉽게 집을 장만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옥주들마저 하루아침에 세입자로 전락시켜가면서, 어떻게 가옥주들보다 가진 것 없는 세입자들이 보다 쉽게 집을 장만할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건지요?

"다 떠나고 이제 여섯 곳의 공장만 남았어. 내 반평생이 이렇게 무너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네. 재개발? 좋지. 그런데 말이야.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는 재개발이라면 그게 과연 진짜로 사람들을 위한 제대로 된 개발인 걸까? 집이야 줄이고 줄여 단칸방이라도 구해 살면 된다지만, 이 나이에 공장을 버리고 떠나서 뭘 먹고 살란 말인가. 기름밥 30년 인생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네."-왕십리 제1구역 금속공 정씨

저자가 다음날 찾아간 또 다른 재개발지역인 왕십리 제1구역에서 만난, 30년째 금속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정씨의 입장은 좀 더 절박해 보인다. '당신이 살고 있듯 나 또한 살고 싶다'라는 현수막이 나부끼는, 90%의 주민이 떠나간 왕십리에서 만난 세입자 은정씨의 당연히 보장 받아야 하는 가이주 단지 확보를 위한 투쟁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국가인권위 격월간지 <인권>에 6년 넘게 글을 쓰다

'함께 나누는 생각'
한 시사 잡지의 기사에 따르면 감단직(경비원 등 감시적 노동자와 아파트나 건물의 기술직 등 단속적 노동자) 노동자들을 옥죄는 것은 법적인 문제 외에 '최대한 싸게 잡부처럼' 인력을 부리고자 하는 아파트 주민들의 이기적 욕망도 일조하고 있다 한다.

기사 속 아파트에서는 2007년부터 감단직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이 순차적으로 적용되자, 임금 인상으로 인한 관리비 상승을 우려해 관리 인력 해고를 단행했다. 그 결과 가구당 2천 원 정도가 절감되었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2012년부터는 감단직 노동자도 완전한 최저임금제를 적용 받는다. 그러나 이 법이 시행되면 관리 인력을 줄이는 아파트는 더욱 더 늘어날 터이다. 실제로 경비원들 중에는 월급이 오르고 잘리느니 현재 임금으로 일만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관리비 몇 천 원을 아끼기 위해 사람을 자르고, 열악한 노동 여건에 몰아넣고 머슴처럼 부리는 곳, 대한민국 아파트의 또 다른 모습이다.-모질고도 야박한 0.5평 그 뒷 이야기 '함께 나누는 생각'중에서
글의 끝마다 '못다 한 이야기'와 '함께 나누는 생각'이란 페이지가 있다. '못다 한 이야기'는 취재후기에 해당되고, '함께 나누는 생각'은 우리들이 관련지어 함께 생각해봐야 하며 꼭 알아야 하는 이야기들이다. 둘 다 기사에 미처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까.(박스 참고)

국가인권위원회의 격월간지인 <인권>에 6년 넘도록 지속적인 글을 써오고 있는 저자는 단지 이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통해 인권을 묻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제81조 1항 등 이야기와 관련된 법도 쉽게 알려준다.

저자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다. 혹은 또 다른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까.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생존위협을 받아야 하는 노점상들 ▲무서운 쓰레기, 두려운 새벽거리의 청소부 혹은 환경미화원들 ▲수업 4시간에 알바 6시간? 껑충껑충 뛰는 등록금에 몸도 마음도 휠대로 휘는 대학생들 ▲"우르과이라운드? 급이 맞아야 싸움이고 뭐고 하지" 우리의 농촌 ▲모질고도 야박한 0.5평-아파트경비원 ▲"빚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신용불량자들 ▲"졸업하면 군대나 가려고요"라고 말하는 전문고(실업계)학생들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짤릴까봐 시키는 것은 다했지만…." 부당하게 해고 당한 어머니들 ▲가난한 부모를 만나 공부방 혹은 시간에 버려진 아이들 ▲ 꽃피는 봄에 그는 겨울을 살고 있었다-건물 청소원들 ▲탈북인 재영씨의 빵과 자유 등이다.

책을 읽는 동안 자꾸 떠올랐던 여는 글 그 나머지.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말합니다. 현재 한국은 경제대국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그런데 왜 두 명만 웃고 있고 여덟 명의 얼굴은 잔뜩 지쳐 보이는 것일까요? 지난 6년 사이에 비정규직의 숫자는 양계장 닭처럼 늘어났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2:8, 정규직과 비정규직 4:6. 앞뒤가 맞지 않는 퍼즐 속에서 살아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누군가는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을 아주 잘못 내리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한쪽은 시속 400킬로미터로 주행하는 고속열차에 승차해 있고, 다른 한쪽은 시속 100킬로미터를 지켜야 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가요."
-여는 글 중에서

덧붙이는 글 | 길에서 만난 세상 두 번째 이야기-<보이지 않는 사람들>|박영희|우리교육|2009.12.23|13,000원



보이지 않는 사람들 - 길에서 만난 세상 두 번째 이야기

박영희 지음, 우리교육(2009)


태그:#재개발, #뉴타운, #인권, #르포, #국가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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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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