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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열차 차창으로 보이는 장엄한 치악산 설경
 달리는 열차 차창으로 보이는 장엄한 치악산 설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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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에 오르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눈이 내린 날은 날씨가 포근하다고 우물이나 냇가에서 빨래를 하셨다. 하지만 이번에 내린 눈은 그 양도 엄청 많거니와 강추위까지 몰고 와 온 나라를 설국(雪國)으로 만든 듯하다.

아파트 창으로 앞산 눈만 바라보다가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올 연말연초는 마음속에 번뇌가 많았다. 곰곰 따져보면 그 모두가 집착 때문이었다. 그것을 잠시나마 잊고 대자연속에 빠지고 싶었다. 내 발길이 머문 곳은 원주역으로, 태백선 영월역까지 가는 차표를 샀다. 문득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문화재가 많다는 영월에 가고 싶었다. 13시 54분 무궁화호 1635열차에 영월행 표를 달라니까 묻지도 않고 경로석을 주었다. 올해부터 경로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나이지만 생일이 11월이기에 아직은 아니라고 차 삯을 더 낼 만큼  정직치는 못했다.

눈에 덮인 원주역
 눈에 덮인 원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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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역 플랫폼으로 나가자 역사 안팎도 온통 눈으로 선로반원들은 눈에 덮인 철길을 쓸기에 여념이 없어보였다. 이윽고 열차가 정시보다 8분 늦게 플랫폼에 닿았다. 그새 우리나라 열차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차표를 개찰하는 역원도, 객차 내에서 차표를 검사하는 여객전무도 없다. 열차는 조용히 섰다가는 경적 없이 떠났다. 1992년 유럽을 기차여행하면서 이런 풍토를 보고서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사실 지난날 우리 열차 문화는 지금 이야기하면 '믿거나 말거나' 프로그램 속 이야기였다. 차표를 정상으로 끊어 타고 다니는 사람보다 그냥 타거나 여객 전무하고 몰래 뒷거래하면서 타고 다니는 손님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무렵에는 철도직원 3년 근무에 집 한 채 못 사면 바보라고 할 정도로 부정이 매우 심했다. 여객 전무가 객차에서 차표 검사를 하면 무임 승객들이 우르르 쫓겨 다니거나 의자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이도 숱하게 많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열차카패
 사람들로 북적이는 열차카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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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카페에서

눈 때문에 도로로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바깥과는 달리 열차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아마도 승용차나 버스 대신 열차를 이용하기에 그런 모양이었다.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 열차를 몇 번 타 보았지만 예삿날 이렇게 승객이 많은 날은 거의 없었다. 달리는 열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치악산의 경치가 장엄했다.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며 이 경치만 보아도 이미 차 삯은 다한 듯하다.

나는 설경에 취해 부지런히 셔터를 누른다. 열차 내 방송에서 4호차 열차카페에서 도시락과 커피 등 음료수를 판매한다는 말을 듣고 옆 객차로 옮겨갔다. 원두커피를 한 잔 사서 빈자리로 가 차창 밖 설경에 취하는데 옆자리 앉은 두 여인도 차창 밖 설경에 탄성을 연발했다. 그들이 나에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줄 것을 부탁하기에 해주었더니 곧 말문을 열고서는 자기들은 여고 동창으로 태백의 눈 구경을 하고자 일부러 청량리역에서 이 열차를 탔다고 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뒷모습만 한 컷 찍겠다고 하였더니 쾌히 응해 주었다. 피차 나이가 들면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차창 밖 설경에 듬뿍 빠진 두 여인
 차창 밖 설경에 듬뿍 빠진 두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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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쌓인 철길을 열차가 달리자 철로에는 눈보라가 일어났다. 곧 닿은 제천역에서 많은 승객들이 오르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중앙선에서 분리된 태백선이다. 열차는 쌍용이라는 역에 잠시 서더니 곧 영월역에 닿았다. 집을 나설 때 목적지를 확실히 정하지 않고 떠나왔기에 답사여행 책자도 인터넷에서 영월관광 안내도 프린트해 오지 못했다. 역 대합실에서 관광 안내 인쇄물이라도 있을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단 한 장 보이지 않았다.

제천역 플랫폼에서 무궁화호 열차에 오르내리는 승객들
 제천역 플랫폼에서 무궁화호 열차에 오르내리는 승객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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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고양이) 저녁밥 줄 시간 전에는 돌아가고자 17시 30분 1640호 상행 무궁화 열차를 타려고 작정을 했다. 가까운 곳이나 택시를 타고 한 바퀴 돌고자 역 앞에서 한반도 지형의 선암마을을 묻자 눈도 아직 치우지 않았을 거라며 많은 돈을 요구했다.

날이 좋은 날 아내 승용차를 타고 같이 와야겠다며 포기하고 돌아서자 곧 다른 택시가 잽싸게 다가오더니 가까운 청령포 설경이 좋다면서 요금은 미터기에 찍힌 대로만 내라고 했다. 그야말로 주차간산하려고 택시 앞자리에 올랐다.

단청이 아름다운 영월역
 단청이 아름다운 영월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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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증 요금에 마음이 상하다

운전기사는 영월을 잔뜩 자랑하면서 찾아줘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영월이 유네스코 문화유적지로 지정된 이후 손님이 부쩍 늘었다고 하면서, 영월 일대는 명소도 많고 박물관도 열 개가 넘는다고 자랑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택시 대기료도 받지 않겠다고 선심을 쓰면서 사진을 마음 놓고 찍으라고 했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에서 강을 건너지 않고 멀리서 사진만 찍고 곧장 택시를 탔는데 택시미터기는 그새 7000여 원이 찍혔고 계속 숫자가 원 단위로 재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내가 왜 미터기에 요금이 이렇게 많이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시외지역이나 빈 차로 오는 경우는 할증 요금을 받는다고 했다. 청령포는 영월역에서 가까운 거리였고, 분명히 나는 다시 영월역으로 돌아오는 조건으로 승차했는데, 승객 동의도 없이 일방으로 할증료를 받아 그만 여행기분이 잡쳤다. 나이도 꽤 드신 기사분이라 내 감정을 자제한 채 점잖게 한밤중도 아닌데 할증요금을 받느냐고 따지자 그제야 슬그머니 일반 요금제로 버튼을 눌렀다.

눈에 뒤덮인 단종 애사의 청령포
 눈에 뒤덮인 단종 애사의 청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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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이 보이지 않는 관광지

단종의 한이 서린 자규루
 단종의 한이 서린 자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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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종이 승하했다는 관풍헌과 단종이 자주 올라 당신의 한을 담은 자규시를 자주 읊었다는 자규루를 돌아보았다. 관풍헌 바로 뒤에 우뚝 서 있는 사우나 모텔 건물이 관풍헌을 압도하여 매우 눈에 거슬렸다. 아무리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자본주의 나라지만 문화재를 압도하는 볼썽사나운 유흥업소를 굳이 그 자리에다 허가했는지 건물주나 관리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나그네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증료로 기분도 상해 택시에서 내려 거기서 가깝다는 금강정과 단종을 따르던 종인들과 시녀들 위패를 모신 민충사(愍忠祠), 단종을 따르던 궁노와 궁녀들이 바위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순사(殉死)했다는 낙화암을 앵글에 담고는 뚜벅뚜벅 영월대교를 건너 영월역에 닿았다. 그래도 열차시간이 40여 분 남아 다슬기가 이 고장 별미라고 요란하게 써 붙인 한 밥집에서 다슬기해장국으로 요기를 한 뒤 영월역으로 가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열차는 좌석이 매진되어 입석을 끊어 탔다. 하는 수 없이 열차카페에 탔는데 제천을 지나자 빈자리가 보여 객차로 가서 어둠에 깃든 차창 밖 설경을 즐겼다.

단종의 시녀들이 동강에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전설을 지닌 낙화암
 단종의 시녀들이 동강에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전설을 지닌 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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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국내여행을 하면서 느낀 바지만 우리나라 자연환경은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으나 손님을 맞고 이를 관리하는 이들은 아직도 저질로 관광 3류를 면치 못한다.

이웃 평창은 몇 해 전에도, 지난해에도 둘러보았지만 메밀꽃 축제로 법석이었으나 이효석 생가지붕은 그 당시에는 있지도 않은 플라스틱 지붕기와를 얹어 눈가림을 하는가 하면, 전남 광양은 자기 고장 인물인 매천 황현의 생가도 택시기사가 몰랐다. 안동 하회마을 들머리에도 한옥여사면 좋으련만 어울리지 않은 모텔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문화에 대한 지식도, 애정도, 진정성도 없는 지자제 단체장들은 철저한 준비도 없이 연임을 위해 우매한 백성들에게 표나 얻고자 각종 축제나 벌이고 국제대회 유치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기는 나라 지도자조차도 겉만 요란한 빈 겁데기이고, 일부 지자제단체장들도 철학이 없는 지방 토호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하급 공무원을 탓하고 관광종사자들을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배나 두드라는 한 통속들이 아닌가.

우리 모두의 디엔에이를 확 바꾸거나 세상을 한바탕 뒤집거나 대대적인 물갈이를 하지 않는 한 세계 문화, 관광 한국 3류를 면할 수 없을 게다. 이미 굳어버린 기성세대는 바꾸기 힘들다. 어린이 교육부터 새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 열차는 7분 늦게 18시 58분 원주역에 도착했다. 빙판 길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집으로 돌아왔다. 카사란 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제놈 밥 때를 맞춰 돌아왔다고 펄쩍 펄쩍 뛰며 환호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송고하기 직전 영월군청 관계자에게 택시 할증료에 대한 문의를 하자 그는 청령포는 할증료 구간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관풍헌 옆 모텔 건에 대해서도 군에서는 이미 보상이 끝났는데도 업주가 철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해명에도 내 구겨진 기분은 펴지지 않았다. 코딱지 만한 영월읍네 지역에 외지인이 어찌 할증료 지역을 알겠는가. 영월군청 관계자 및 관광종사자에게 한 마디 드린다.

"소탐대실" 하지 마라고.



태그:#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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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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