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하여

 

연초에 내린 폭설은 강추위를 몰고 왔다. 내가 살고 있는 강원 영서 일대는 다른 지방보다 더 춥다. 엊그제 내가 6년 가까이 살았던 횡성군 안흥면은 영하 30도로 내려갔다는 보도가 있자 몇몇 친지들이 아직도 내가 그 마을에 사는 줄 알고 안부 전화가 오고, 원주로 이사한 줄 아는 분들은 이 추위에 미리 아파트로 이사해서 따뜻하고 편케 지낸다며 덕담을 하는 분도 있다.

 

안흥에서 원주로 이사한 지 아직 두 달이 채 못 됐다. 하지만 나는 아직 헤매고 있다. 그동안 오마이뉴스 가사도 두 편밖에 못 썼는데 한 편은 책동네 기사요, 다른 한 편은 민족 국제 기사로, 이사 이후의 내 삶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날 이른 아침에 워싱턴에 사시는 한 동포로부터 국제전화를 받았는데 이사 이후 통 후문이 없어 궁금해 전화하였다고 하시면서 30여 분 이런저런 얘기들을 물었다. 그분은 2002년 7월 8일에 실린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장군 생가는 헐려'라는 나의 오마이뉴스 첫 기사부터 '안녕, 안흥이여'까지 죄다 읽은 듯, 내 전력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고교시절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계동 중앙학교 앞에서 찐빵 장사한 전력까지 들추면서 안부와 격려를 하는 데는 고마운 마음 이상으로 감동치 않을 수 없다.

 

글쟁이들은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쓴다고 한다. 그런데 내 글은 지구촌 곳곳의 꽤 여러 동포들이 정독해 주신 듯하다. 그분들에게 새해 인사와 아울러 내 사는 이야기를 전해 드린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원주의 새 아파트단지로 지난해 10월부터 입주하기 시작했다. 15층 고층아파트인데 나는 5층에 살고 있다. 나는 고공공포증이 있는 듯하여 처음 이 아파트를 계약할 때는 4층을 선택했으나 현장 답사 뒤 5층으로 바꿨다. 아파트 앞 상가가 시야에 가려 한 층 더 올라갔다. 나나 아내나 태어난 이후 첫 아파트생활이다.

 

원래 나는 촌놈으로 서울에서도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 때거나 수도도 들어오지 않아 지하수를 끌어다가 먹는 곳에서 텃밭을 가꾸며 살았다. 그 뒤 내가 살던 동네도 지금은 많이 개발된 듯하지만 그즈음 나는 그곳을 떠나와 강원도 횡성 안흥산골 마을로 떠났다.

 

그곳에서 여섯 해를 보내고 원주 우산동 이 아파트로 이사를 왔는데 다행히 내 방에서는 산이 빤히 보이는 양지 바른 곳으로 도시 아파트마을치고는 비교적 언저리가 쾌적한 편이다. 하지만 나는 이즈음 내 영혼이 붕 떠 있는 기분으로 집중력이 떨어져 아직도 헤매고 있다. 지난해 10월 26일 안중근 장군 의거일 날 속초항을 떠나 자루비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를 거쳐 하얼빈, 채가구, 장춘, 대련, 여순까지 다녀왔건만 아직 답사기는 자루비노로 가는 동춘호 선상에서 머물고 있다.

 

불행 중 다행

 

지난 12월 8일에는 목욕탕을 가다가 자동차에 부딪쳤다. 저물녘 길을 건너다가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차에 부딪쳤는데 하늘이 도운 탓으로 전치 2주 경상으로 끝났다. 운전자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무사했다. 그는 차에서 뛰어내려 일 미터 정도 튀겨나간 나를 감쌌는데 그의 가슴에서 마구 뛰는 심장의 맥박이 내 어깨로 전달되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그에게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이요. 브레이크를 재빨리 밟아줘 고맙소."

 

그도 119 구급대원도 보험사 직원도 의사도 입원을 권유했지만, 마침 아내가 먼 길을 떠난 때라 집에 혼자 있는 카사(고양이)가 저녁을 굶고 기다린 것이 떠올라 상처에 붕대를 감고 요대를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카사는 영문을 알았는지 반갑다고 내 품에 파고 들었다.

 

원주경찰서 교통조사계에서 피해자 조사를 하는데 담당 경찰이 학교 앞 사고와 중앙선 침범은 무조건 구속감이라고 하면서 처벌을 묻기에 문득 내 아들이 생각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2주 뒤 보험사에서 피해 보상을 해 주는 데 입원환자가 아니라고 일용근로자 수준의 보상을 받았다. 고양이 때문에 입원치 않고 통원 치료했다면 별 미친 사람이라고 믿어주지 않을 거다.

 

보험회사 직원은 내 집에 와서 실사를 하고는 안경 부서진 것, 바지 찢어진 것, 그동안 약을 사먹은 영수증을 챙긴 뒤, 거실의 책장을 보고 내 방문의 '박도글방' 현판을 보고는 선심 쓰듯 애초 보상액에서 10만 원을 덤으로 더 얹어주기에 두 말 않고 서명해 주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목발 짚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인가. 아마도 아직 좀더 일하라고 하늘은 경고만 주시는 것 같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

 

사람 위에 사람 있다

 

요즘 잠자리에 들면 '사람 위에 사람 있다'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내 방 아래 4개 층이나 있고, 내 방위로 10개 층이나 더 있다. 그야말로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다.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좋아하는 자식보다 싫어하는 자식이 더 많은 걸로 아는데, 나도 후자다. 하지만 내 아버지의 어지러운 삶의 길에서 한 때는 진보인사로 몸담으신 것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1958년 골수 여당 텃밭인 고향 선산에서 제4대 민의원에 출마하시면서 애초에는 진보당 공천으로 나오려고 하다가 당시 진보당 조봉암 당수가 간첩으로 몰려 사형 당하고, 진보당이 해산되는 바람에 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했다.

 

6명 후보자 가운데 4위로 참패했지만 그때 아버지가 내세운 구호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였다. 그 구호는 득표와는 별 관련이 없었지만, 아니 오히려 역효과였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는지 지금도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그 구호를 되새겨 준다.

 

안흥에서 원주로 이사를 할 때 포장 이사를 했는데 이른 새벽 다섯 분의 일꾼들이 와서 이삿짐을 날랐다. 그날 이사 삯으로 모두 55만 원을 주었는데, 그들은 하루 품값으로 6만 원 정도 받는다고 했다. 곁에서 지켜보니까 이삿짐 나르는 게 보통 힘 드는 게 아니었다. 그마나 일감이 한 달 내도록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한 달 내도록 있어도 힘에 겨워 일할 수 없다면서 한 달에 20일 정도 일한다고 했다. 우리 내외는 그날 그분들에게 마실 물을 넉넉히 준비해 드리고 점심을 대접했더니 매우 고마워했다.

 

그 무렵 한 프로야구 선수는 일본의 구단으로 옮겨가면서 3년 몸값으로 70억 원을 받는다는 보도였다. 일당으로 치면 일당 품꾼과 그 선수는 몇 배나 차이가 나는지 계산에 서툰 나로서 얼른 정답이 나오지 않지만, 이게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분명 우리 사회는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 날이 갈수록 아파트 층수가 높아지듯이 사람의 값도 날이 갈수록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

 

일찍이 공자가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고르지 않음을 걱정해야 된다"고. 하지만 위정자들은 무한경쟁, 신자유주의를 내세우자 백성들은 고층 건물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듯, 빈부의 격차가 점차 커져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모두가 함께 무너져 내리는 하늘의 벌이 내리는 날이 올까 두렵다. 이미 남태평양의 나라에서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국토가 잠긴다고 울부짖고 있는 오늘이 아닌가.

 

새삼 아버지가 젊은 날 부르짖었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그 말이 이 세상을 구하는 복음처럼 들린다. 이 엄동설한에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이들이 어른거린다. 다들 귀한 생명들이 아닌가.


태그:#아버지 , #아파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