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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공주 왕촌 살구쟁이 집단 암매장지에서 드러난 희생자 유해.
 지난 7월 공주 왕촌 살구쟁이 집단 암매장지에서 드러난 희생자 유해.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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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지역 밖에도 다수의 유해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예산 및 시간 여건상 확인하는 것으로 그쳤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2009 유해발굴 보고서> 중에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유해 발굴 조사단이 유해 발굴 도중 다수의 유해 매장을 확인했지만 수습을 하지 않고 다시 묻었다는 얘기다.

이야기는 지난 7월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선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유해발굴단장(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등 연구원들은 충남 공주 상왕동 살구쟁이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군인과 경찰에 의해 희생된 재소자 및 국민보도연맹원들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박 교수는 충북 영동군 노근리 사건 희생자를 비롯한 민간인 집단희생자 유해 1500여 구와 국군 전사자 유해 4000여 구 등을 발굴한 한국 최고의 유해 발굴 권위자로 꼽히고 있다.
  
연일 폭염이 이어졌지만 산중엔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굴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호우주의보까지 내려졌다. 유해 발굴에 앞서 폭우에 대비해 배수로를 정비하는 게 순서였다.

나무뿌리에 엉켜 드러난 사람의 뼈... 80∼90여 구 추정

유해 발굴을 위한 배수로 공사 도중 또 다른 유해암매장지가 드러났다.
 유해 발굴을 위한 배수로 공사 도중 또 다른 유해암매장지가 드러났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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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유해 발굴을 위한 배수로 공사 도중 드러난 새로운 집단 유해암매장지. 사람의 뼈가 나무뿌리와 뒤엉켜 있다.
 본격 유해 발굴을 위한 배수로 공사 도중 드러난 새로운 집단 유해암매장지. 사람의 뼈가 나무뿌리와 뒤엉켜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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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하게 배수로를 파나가던 굴삭기 기사가 어느 순간 작업을 멈췄다.

"박 단장님! 이것 좀 보세요. 사람 뼈 같아요."

유해의 일부가 나무뿌리에 엉켜 있었다. 당초 조사단은 배수로 아래쪽에 위치한 4개의 구덩이만을 유해매장예정지로 추정했다. 배수로 위쪽은 조사범위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박 단장은 작업을 멈추고 유해가 드러난 배수로 위쪽 일부에 대한 표본조사를 시작했다. 겉흙을 조심스럽게 파내기 시작하자 불과 3m 아래에서 다수의 머리뼈가 드러났다. 유해가 매장돼 있는 또 다른 새로운 유해매장지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조사단은 이곳에만 약 80∼90여 구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다음 날부터 조사단은 우선 예정된 4개의 구덩이에 대한 발굴을 진행했다. 새로 드러난 구덩이는 마지막에 발굴할 계획이었다.

4개의 유해매장추정지 발굴 결과는 조사단을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뼈대가 두텁지 않은 부위의 뼈는 모두 삭아 없어진 상태였다. 습한 점토성 토양인데다 산성도마저 높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유해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유해를 흙으로 덮지 않고 화강암 등 큼지막한 돌덩이를 채워 넣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됐다. 흙을 충분히 채우지 않고 돌덩이로 눌러 놓아 유해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겨 부패가 빨리 진행됐다는 분석이다.

흙 대신 돌덩이로 유해 매장... 317구, 20대 이상 남성 추정 

돌덩이에 눌려 있는 유해.
 돌덩이에 눌려 있는 유해.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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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단의 분석 결과 희생자들은 모두 등을 마주한 채 손을 뒤로 묶이거나 목에 깍지를 끼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사살된 것으로 드러났다. 머리뼈의 얼굴 부분은 하늘이 아닌 땅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뒷머리뼈에 총상흔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덩이 가장자리 등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탄이 발사된 것으로 추정됐다. 출토된 탄피는 M1과 칼빈용 634개로 희생자 수의 두 배가 넘었다. 

유해는 모두 317구로 확인됐다. 형무소 재소자들이 입었던 갈색의 죄수복 단추가 145개인 반면 민간인 복장에서 나온 흰색 단추가 195개로 민간인 수가 더 많았던 것으로 예측됐다. 치아발치 정도 등으로 미뤄 희생자는 대부분 20대 이상 남성으로 판단됐다.

4개 구덩이에 대한 유해발굴을 마친 조사단은 작업 도중 드러난 5지점에 대한 발굴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추가 예산이 지원되지 않았다. 예산이 지원되기만을 기다리던 발굴팀은 못다 수습한 유해를 남겨두고 결국 현장에서 철수해야 했다.

기약 없는 추가 발굴... "부식 속도 빨라 발굴 서둘러야"

발굴팀은 유해 발굴 보고서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당초 진실화해위원회가 제시했던 조사지역 내 4개 지점 이외에 조사지역 밖에 다수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 것이 밝혀졌으나 시간과 예산상의 문제로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음을 아쉬워하며 이에 대한 조사가 반드시 계속돼야 할 것이다."

박선주 진실화해위 유해발굴단장.
 박선주 진실화해위 유해발굴단장.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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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0년 4월 조사 업무가 종료되는 진실화해위원회는 추가 유해 발굴 예산을 단돈 1원도 배정하지 않았다. 대전 산내암매장지를 비롯한 전국 168개 집단학살지 중 37곳은 당장 유해 발굴이 가능한 상태이지만 추가 발굴 계획은 어디에도 없다. 지방자치단체도 '중앙정부가 할 일'이라며 손을 놓고 있다. 

박선주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단장은 "공주 왕촌 살구쟁이에 남아 있는 유해의 경우 부식속도가 매우 빨라 가능한 시급히 수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는 최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과 관련해 2009년에 조사를 진행한 충남 공주 상왕동을 비롯해 경북 경산 코발트 광산, 경남 진주 명석면 및 문산읍, 전남 함평 광암리(불갑산 일대) 등 네 지역에 대한 유해 발굴 보고서를 발간했다.


공주 왕촌에서 첫선 보인 '3D 스캔 조사' 기법
"인권교육시설 복원 염두... 구덩이 경사도까지 기록"


공주 왕촌 유해매장지에서 3D 스캔 작업을 하는 모습.
 공주 왕촌 유해매장지에서 3D 스캔 작업을 하는 모습.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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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왕촌 유해매장지는 어떤 유해매장지보다 잘 보존돼 있고 접근성이 좋아 이를 보존해 국민들의 역사교육과 인권교육시설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조사단의 의견이다."

공주 왕촌 유해발굴조사단은 유해 발굴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역사교육시설로 활용할 것을 공식 제안했다. 하지만 이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해 수습을 끝으로 매장지는 매립됐다. 

하지만 유해가 드러난 당시로 현장을 되돌려 복원·재현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번 공주 왕촌 유해발굴과정에서 3D 스캔 조사 기법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간인 집단희생자 유해 발굴 작업에선 사진과 비디오, 현장실측자료가 기록의 전부였다.

3D 스캔 조사는 구덩이의 길이, 너비, 깊이 등에 관한 정확한 실측이 가능하고 구덩이의 경사도와 방향을 비롯해 유해 매장과 분포 상황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현장을 왜곡하거나 유해들이 섞이는 일 없이 그대로 복원·재현해 낼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박선주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단장은 "이 지역을 교육시설로 복원할 경우를 고려해 현장 자료를 3D 스캔을 이용해 기록했다"며 "유해가 드러난 상태 그대로 현장을 재현해 인권교육시설로 활용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태그:#유해발굴, #집단희생, #박선주 교수, #진실화해위, #공주 왕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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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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