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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이지만 시금치는 잘 자라고 있네요.
▲ 손수 시금치를 장만합니다. 한겨울이지만 시금치는 잘 자라고 있네요.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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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겨울날씨가 며칠째 계속입니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제멋이라고 했는데 정말 추워서 자꾸 어깨만 움츠리게 됩니다. 12월의 얼마 남지 않은 날짜를 세워보며 뭔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추수는 이미 끝이 났고, 김장 담그는 일도 다 끝이 난 상태입니다. 그야말로 만발의 월동준비가 착오 없이 마무리 하고 나니 정말이지 든든합니다. 부엌 한 구석에 차지하고 있는 쌀자루가 그렇고, 김치냉장고 안에는 김장김치로 가득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을 밥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해마다 남보다 따뜻하고 든든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오남매 밥걱정을 해주시는 고향의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표현은 다 못할 것 같습니다.

역시 오래된 손맛은 변하지 않아요.
▲ 대충 대충 말아도 먹음직스러운 김밥! 역시 오래된 손맛은 변하지 않아요.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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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습니다. 일거리가 없는 농한기에는 아무래도 적적함이 더 한 것 같아 마음이 짠한 게 무어라 할 말을 잊었습니다. 제가 전화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먼저 안부 전화도 해주시고 하더니 요즘 들어선 다른 오빠들과 언니들이 자주 오가는지 제게 전화하는 일이 많이 뜸해졌습니다. 어머니가 전화하기 전에 오히려 제가 먼저 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제 생각이지요.

"어디고?"
"출근하는 길임더. 엄마는 요새 전화도 안 해주고, 섭섭하데이."
"마아, 묵고 노는데도 전화 안해지네. 언제 노노?"
"와예. 노는 날이 없다 아인교. 안 그래도 이번 휴일은 좀 쉴까 하는데…"
"그라믄 잘 됐네. 니 언니도 그렇고 말만 맨날 타작 끝나믄 김밥 맹글어준다카더니 소식이 없구마."
"아아. 맞네. 그라믄 이번에 내가 재료 준비 다 해 갈테니 그래 아이소."
"괜히 내 땜에 일하러 가야 하는데 못 가능거 아이가. 우짜든 오는 걸로 알고 있구마."

추수가 시작되고 몇 차례 고향을 들렀을 때마다 작은언니와 전 김밥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김장하고 나면 김밥 만들어 실컷 먹어보자며 약속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날을 한번 잡아야 하는데 못하고 계속 미루고만 있었는데 어머니는 더 이상 기다리기 지치신 모양입니다. 퇴근을 하면서 몇 가지 김밥 재료들을 사서 준비했습니다.

 특별한 것은 아니어도 이렇게 모여 어머니를 위한 김밥을 싼다는 것이 즐겁습니다.
▲ 먼저 제가 하나 만들어봅니다. 특별한 것은 아니어도 이렇게 모여 어머니를 위한 김밥을 싼다는 것이 즐겁습니다.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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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아침 일찍 미리 준비해둔 김밥 재료들을 챙겨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어머니는 많이 기다리셨는지 평소 틀지 않던 거실 보일러도 켜 주시고, 홍시며 이것저것 주전부리들을 꺼내 놓으셨습니다. 어쩌다 한번 쉴 수 있는 저의 직업 특성상 모처럼의 휴일이었습니다. 실컷 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김밥으로 인해 휴일은 묻히고 말았습니다.

사실, 저 역시 김밥은 그 누구보다 좋아했습니다. 평소에도 김에다 밥 깔고 김치 하나 넣어 둘둘 말아서 먹기도 하고, 어릴 적 소풍 갈 때마다 늘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멸치 김밥을 해서 먹기도 하고 간단한 재료만으로도 자주 김밥을 해 먹었지요. 그러다 직장 생활 속에 빠질 수 없었던 점심 메뉴가 김밥이었습니다. 지금도 도서관에서 냄새 나는 것을 먹기 곤란한 탓에 만만한 것이 김밥입니다. 늘 점심으로 김밥을 먹고 있어 정말 김밥에 '김'자만 해도 경기 하겠다며 스스로 웃곤 한답니다.

역시 언니는 김밥 하나는 잘 쌉니다. 저보다 손맛이 좋아요!
▲ 본격적으로 언니가 나서네요. 역시 언니는 김밥 하나는 잘 쌉니다. 저보다 손맛이 좋아요!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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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의 속사정을 그 누가 알리 만무하고, 대대적인 김밥 잔치(?)를 하게 되었으니 전 그다지 기대도 없고, 약속이니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충실할 뿐이었습니다. 작은언니와 조카들까지 다 불렀습니다. 남들은 쌀이 많이 들어가서 실컷 해 먹지는 못한다고들 하지만 쌀농사를 짓는 저의 집에서는 쌀만큼은 풍부해서 김밥에 들어가는 밥의 양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언니네가 도착하기 전에 재료들을 다듬고 간단한 준비를 해놓고, 밥도 밥솥에다 두 번을 해놓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김밥에 들어갈 초록색의 재료, 시금치가 없었습니다. 밭에다 씨를 뿌려놓아서 막 자라고 있으니 시금치는 준비 안해도 된다는 어머니의 말에 빠진 건 그것 하나였습니다. 시골은 아무리 따뜻한 햇살이 비추어도 그 체감온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갑습니다. 밭에 가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장갑과 시장바구니 하나를 챙겨주셨습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어머니와 조카들은 썰어놓은 김밥을 자꾸 먹습니다. 실컷 먹네요.
▲ 만드는 순간, 사라지는 김밥! 기다리지 못하고 어머니와 조카들은 썰어놓은 김밥을 자꾸 먹습니다. 실컷 먹네요.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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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살을 파고드는 차가움이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허허벌판에 칼자루 하나 들고 밭에 쪼그리고 앉아 시금치를 바라보니 정말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는 시금치 새싹들이 아직은 때 이른 시기를 알려주었지만 조금이나마 시금치가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금치 채취(?)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시금치를 캐고, 서리에 얼어붙은 대파를 뽑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선 작은언니와 조카들이 도착해서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마지막 시금치를 데쳐 김밥 만들 준비를 마쳤습니다. 넓은 거실에 신문을 펼쳐놓고 다 모인 가운데 드디어 김밥을 하나 싸서 말고, 쓸어 먹었습니다. 만들면서 옆에서 김밥 꼬다리 얻어먹는 맛은 뭐라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추위도 잠시 텅빈 들판에 홀로 아직 어린 시금치를...
▲ 우리집 시금치는 자라고 있는 중! 추위도 잠시 텅빈 들판에 홀로 아직 어린 시금치를...
ⓒ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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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추억에 잠시 젖어 들면서 전 언니한테 김밥 만드는 자리를 내놓았습니다. 어머니의 멸치김밥 이후, 소풍 때마다 저의 김밥을 싸 주었던 언니였기에 그 때 그 맛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만들면서 먹고,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니 피곤했던 휴일 오후가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모처럼 둘러앉으니 그동안 질리게 했던 김밥은 오간데 없고 정말 맛있었습니다. 멸치김밥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 하며 입 속으로 들어가는 김밥처럼 내년에도 어머니와 저의 가족들의 행복 역시 하나 둘씩 쌓여갔으면 좋겠습니다.


태그:#김밥, #추억, #어머니, #시금치,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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