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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있어 나가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누구는 먹던 반찬이라도 제대로 데우고 새로 담아서 잘 차려놓고 먹으라고 하지만, 나는 차리고 치우는 일이 귀찮아 최대한 간소하게 먹는다.

보통 날의 평범한 점심식사 준비에 변화가 온 것은 약 1년 전부터다. 물론 일주일에 단 한 번이지만. 남편이 토요일 새벽에 출근하게 되면서 월요일이 대체 휴일이 된 것. 월요일에 내 강의 일정이 없으면 같이 점심을 먹는다. 혼자 먹을 때는 냉장고에서 반찬 그릇 한두 개 꺼내서 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먹었는데, 그게 안 되는 거다.

남편이 유난한 입맛을 가졌거나 격식을 차리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 남편이 모처럼 집에서 점심을 먹으니 째개라도 끓여야 할 것 같고, 생선이라도 구워야 할 것 같은. 그러다보니 식사 준비 시간이 길어지고 설거지가 늘어나는 것도 당연지사.

책 <은퇴 남편 유쾌하게 길들이기>
▲ 책 표지 책 <은퇴 남편 유쾌하게 길들이기>
ⓒ 나무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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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남편 퇴직해서 하루종일 집에 있게 되면 이렇게 점심까지 매일 신경 써야 되는 거야?'

책 <더 늦기 전에 아내가 꼭 알아야 할 은퇴 남편 길들이기>(나무 생각 펴냄)에 나오는 남편 길들이기(혹은 남편 키우기) 15개 조항 가운데 첫째 조항은 바로 이런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본 듯하다.

"제1조 :  당장 실행! "점심은 직접 차려 드세요!"

이 책의 저자는 집안일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은퇴 남편'을 보면서 미움과 분노와 냉전을 거쳐 급기야 팔 걷고 교육과 훈련에 나선다. 한 마디로 남편을 자립적으로 키우는 것! 그 이유는 단 하나. '이혼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 차리기 고민부터 시작해 남편에게 집안일 시키는 방법, 불화의 근원이 되는 부부만의 단출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아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남편의 '바둑이화(化)' 경계, 취미활동의 길로 이끌기, 남편의 지역사회 데뷔 돕기, 각자의 사생활 존중하기, 유사시에 대비한 나만의 통장 갖기 등을 시시콜콜 일러주고 있다.

하루종일 얼굴 마주치며 같은 공간에 머물 경우 벌어지는 갈등과 짜증, 초저녁과 새벽으로 나뉘는 수면 패턴의 차이로 인한 부딪침, 아내 없이는 어디에도 안 가려고 하는 이유 또한 지역사회(동네)에 대해 모르는 데서 오는 어설픔에서 나오는 것이니, 정말 아는 게 힘이다. 탁상공론이 아닌 저자의 실생활에서 나온 이야기여서 책 속 부부의 상황이 손에 잡힐 듯 친근하다.

책에 나오는 은퇴 미아, 정년 미아, 공포의 거실남, 남편의 바둑이화(化), 외출 자립도, 파자마맨 등의 단어에서 은퇴 남편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이것은 거꾸로 표현하면 은퇴 남편을 둔 아내들의 스트레스 항목이 되기도 한다.

평생 바깥에서 일하면서 고생했으니까 제발 가만 좀 놔둬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남편도 물론 있겠지만, 가만 있는 것도 하루 이틀. 함께 사는 사람과 소통하며 어울려 살 길을 찾지 않으면 그 끝은 냉소적인 부부관계를 넘어 이혼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요즘 직장인들의 정년퇴직 연령은 종잡을 수가 없어서 집계된 것으로는 평균 57세지만, 실질적으로는 53세 정도로 보고 있다. 40대만 돼도 불안해 하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새해에 50세가 되는 남편 또한 언제 은퇴 남편이 될지 알 수 없다.

은퇴한 남편의 특징
- 매일 거실에서 빈둥거린다.
- 점심은 당연히 차려주겠거니 생각한다.
- TV가 친구.
- 취미활동은 없다.
- 어딜 가나 따라온다.
- 아내에게 완전히 의지한다.
- 이웃의 얼굴과 이름을 전혀 모른다.
- 아내의 전화를 두 귀 쫑긋 세우고 듣는다.
- 부쩍 인색해졌다.
- 온종일 파자마 차림이다.

<은퇴 남편 길들이기(키우기) 15조>

제1조. 당장 실행! "점심은 직접 차려 드세요!"
제2조. 상갓집 분위기의 저녁식사에서 탈출하라
제3조. 무관심한 남편에게 집안일을 시키는 방법
제4조. 부부만의 단출한 생활은 불화의 화근
제5조. 각방 쓰기를 추천
제6조. 남편이 바둑이화 되는 것을 경계하자!
제7조. 취미활동 없는 남편을 의욕적으로 만드는 필살법
제8조. 두 달에 한 번은 단둘이 외출하라
제9조. 병이 났을 때일수록 위로가 부족하지 않게
제10조. 공격만 하지 말고 칭찬도 아낌없이
제11조. 남편의 지역사회 데뷔를 응원하라
제12조.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일을!
제13조. 남편은 남편, 아내는 아내
제14조. 무신경한 남편으로 만들지 말라
제15조. 유사시에 대비해 통장을 가져라
늘 바깥에서만 생활해 온 남편의 가정으로의 복귀는 내게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동안의 고생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저자의 말대로 두 사람 모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서로가 각자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사이좋게 정답게 은퇴 이후의 시간을 보내려면 바뀌어야 한다.

남편을 바꾸려면 아내도 바뀌어야겠지. 무관심하고 진도가 느리다고 곧바로 포기하거나 낙담할 게 아니라 끝까지 친절하고 상냥하게 집안일을 설명하며 가르쳐주고, 진정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전달할 일이 남았다.

밑줄 그으며 책을 읽었는데 남편이 이 책을 읽으면 뭐라고 할까, 또 내가 쳐 놓은 밑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은퇴 남편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여자들 뿐만이 아니라 은퇴의 당사자들인 남편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순전히 여자 중심의 이야기라고 속좁게 삐치는 남자가 있다면 한 마디 해줘야지.

"정말 외로움을 벌고 계시는군요!"      

덧붙이는 글 | <더 늦기 전에 아내가 꼭 알아야 할 은퇴 남편 유쾌하게 길들이기> (오가와 유리 지음, 김소운 옮김 / 나무생각, 2009)



은퇴 남편 유쾌하게 길들이기 - 더 늦기 전에 아내가 꼭 알아야 할

오가와 유리 지음, 김소운 옮김, 나무생각(2009)


태그:#은퇴 남편 유쾌하게 길들이기, #은퇴, #퇴직, #노년 부부,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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