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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엄-"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잔뜩 찌푸린 하늘로 수문장 교대식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수문군의 입장부터 취타대의 연주 퍼레이드까지. 시청역 빌딩숲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희한한 거리 공연에 사람들이 발길을 멈춘다. 조선시대 복장을 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우뚝 서 있는 남정네들.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듯한 이들에게 함께 사진 찍기를 부탁해 본다. 수염 하나 꿈틀하지 않으면서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는 이 남자들, 참 혼란스럽다. 도심 속의 수문장 교대식만큼이나 이들에게도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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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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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수문장 밤에는 소믈리에

최규식(30)씨는 '참하' 역할을 맡고 있다. 참하는 교대식의 시작과 중간, 끝을 알리기 위해 초엄, 중엄, 상엄을 외친다. 그는 목소리가 우렁차고 맑아야 참하로 뽑힐 수 있다고 말한다. 목소리 좋은 이 남자, 밤이 되면 와인바의 소믈리에로 변신한다. 밤에 일한다는 직업의 특성상 낮에 할만한 일을 찾게 되었다는 최씨. 최씨뿐만이 아니다. 연극 배우, 마사지사, 레스토랑 직원, 엑스트라 배우, 가수 지망생 등 각양 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낮에는 수문군으로 일한다. 



수문장
 수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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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와 자부심 느끼는 직업... 매일 찾아오는 외국인도 있어

지인의 소개나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통해 이 일을 가볍게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3, 4년 이상 많게는 8년까지 장기간 일하고 있다. 수문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정호(29)씨는 일의 매력으로 재미와 자부심을 꼽는다.

"고증을 거친 한복을 제대로 입고 의식을 하면 현대에서 조선 시대로 완전히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주목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그는 기억에 남는 관람객으로 거의 매일 행사를 보러 온다는 외국인을 꼽았다.

"러시아 분인데 유모차를 끌고 매일 오세요. 그러다 보니 눈인사도 하게 되고. 왜 만날 오냐고 물으니까 원래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데 교대식이 특이하고 재미 있어서 그렇다고."

최규식(30) 씨는 외국인 관광객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한 번은 비 오는 날, 어떤 분이 찾아 오셨어요. 교대식 보려고 일부러 지방에서 올라오셨다는데, 저희는 비 오면 행사를 안 하거든요. 죄송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자부심이 들기도 했죠."

더 흥미 있는 교대식 보여주기 위해 고민... 처우개선 해줬으면

하지만 이들이 옷을 차려 입고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데에서만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니다. 수문장 교대식의 기획에 비공식적으로 참여하며 전통행사를 더욱 흡인력 있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옛날 방식을 그대로 고수해서 보여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예를 들어 취타 연주를 메인으로 하면 식을 진행하는 저희도 지루하거든요. 보는 사람은 어떻겠어요. 고증을 적절히 살리면서 요즘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무언가를 섞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이씨에게서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하지만 이들의 처우가 직업에 쏟는 노고나 행사의 중요성에 비례하여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문화 바로 알리기'의 일환으로 서울시에서 덕수궁의 수문장 교대식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정작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씨는 "관람객들은 저를 특별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제가 생각하는 저와 갭(gap)이 느껴질 때가 많아요. 보람 있는 일이지만 처우가 더 좋아진다면 더욱 자부심을 갖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수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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